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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온실 수리 보고서』, 김금희, 2024

마음의 상처도 '수리'할 수 있다면,

by 현재를즐겨라

# 소설에서 표현되고 있는 모든 인명 및 단체명은 가상의 것이라고 합니다. 혹여나 착각하실까봐 서두에 단서를 달아둡니다.


Ⅰ. 이질적인 존재들


누구와 언제 갔는지도 흐려진 먼 과거에 나는 창경궁 대온실을 다녀온 적이 있다. 하도 오래되어서 그날의 기억은 거의 흩어졌지만, 그럼에도 상당히 '이질적'이었다는 단상이 남아있다. 조선의 궁궐에 남아있는 일제의 식물원이기 때문일까. 전통 건축의 상징과도 같은 곳에 있는 서양식 유리건물이라는 점 때문일까. 그리 크지는 않았던 그 건물과 작은 정원만큼은 이상하리만큼 기억에 남아있다.


아마 작가도 창경궁 대온실에서 나와 비슷한 인상을 받았던 것 같다. 소설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다들 자신의 정체성과, 자신이 살아야 할 공동체 사이의 '이질감'을 견뎌냈던 사람들이다. 낯선 세상 한 가운데에 떨어진 듯한 쓸쓸함은 그들에게 지울 수 없는 상처가 되었다. 작가는 그 고독함을 온 몸으로 마주하며 살아야했던 인물들의 이야기를 『대온실 수리 보고서』라는 이야기로 풀어낸다.


서울에 사는 것처럼 위장으로 전입을 하고 '서울 사람'인 척을 했어야 했던, 그로 인해 외로움과 불합리함을 온 몸으로 뒤집어 쓸 수 밖에 없었던 영두. 일본인으로 태어났지만, 한국인 양부의 손에서 일제 치하의 경성에서 살아야 했으며, 해방과 전쟁이라는 격동의 시기를 거치며 일본인이라는 '정체성'을 가슴 깊숙히 가둘 수 밖에 없었던 시미즈 마리코. 그렇기에 창경궁 대온실은 영두를 상징하기도 하며, 동시에 마리코, 낙원하숙의 할머니를 상징하기도 한다. 결국 창경궁을 수리한다는 것은 그들의 상처를 '수리'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Ⅱ. 이질적인 존재들 - 영두의 이야기


이야기는 영두가 한 건축사무소에 문화재 공사 백서 기록 담당자로 일하게 되면서 시작한다. 창경궁 온실의 복원 과정에 참여하게 된 영두는 자신이 중학생 시절 살았던 원서동과 몰래 드나들던 창경궁을 떠올리게 된다. 영두에게 그 시절은 지워버린 과거이자, 아픈 추억이었다. 그렇기에 어른이 되었음에도 영두는 여전히 원서동에서의 기억을 꺼내기를 두려워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영두는 자신의 과거와 마주하고자 한다.

돌아보면 항상 어떤 장소를 지워버림으로써 삶을 견뎌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잊어야겠다 싶은 장소들은 아예 발길을 끊어서 최대한 망각할 수 있게 노력해왔지만 이 일을 맡으면 그곳에 대해 생각하고 더 알게 될 것이었다. (p. 17)


과거의 원서동에는 낙원하숙과 리사가 있다. 낙원하숙에는 제법 좋은 기억들도 있었다. 다만, 영두를 곤경에 몰아 넣은 것은 아주 작은 것이었다. 마치 작품 중 언급되는 후쿠다 마모루의 포도 농장이 아주 작은 복병을 만나 망가져 버린 것처럼 말이다. "그 복병은 아주 작은 것이었어. 1밀리미터도 되지 않은 포도뿌리혹벌레" (p.61). 영두에게 있어서 그 복병은 바로 리사였다. 리사는 어딘가 모르게 꼬여있는 방어 기제로 자신을 가둔채 살아간다. 영두와 마찬가지로 '서울 사람'인 척해야 했던 리사는, 자신의 '수준'이 들키지 않는 것에 집중할 뿐이었다. 영두와는 달리 리사는 누구도 믿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꼭 이렇게 까지 해야해?" 또 싸우고 싶은 건 아니지만 이번에는 정말 이해라는 걸 해보고 싶어서 물었다. 리사의 세계를 알아내고 가능하면 조립해보고 싶었다. 그 안에 있는 두려움, 수치심, 공격성, 슬픔, 연약함, 욕심, 채워지지 않는 허기 같은 것을. "수준을 들키는 것보다는 낫지" (pp.112~113)
리사가 "너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해?"하고 물었다. 시선을 내 발치쯤에 둔 채였다. "뭘?" 어둠 속에서 실잠자리들이 마치 보풀처럼 떠올랐다. "때로는 믿어야살 수 있어서 누군가를 믿게 된다고, 정말 그렇게 생각하느냐고." ... "나는 당연하게 생각되는데, 아니면 사람이 대체 어떻게 살지?" (p. 113)


영두가 유민을 밀쳤던 그날도 마찬가지였다. 리사는 영두를 믿지 못했고, 유민 또한 믿지 못했다. 단지 자신의 약점을 들키고 싶지않다는 이기적인 마음으로 가득 차있었을 뿐이었다. 그렇기에 리사는 양할머니와 낙원하숙의 모두를 밀어낸 것이 아닐까싶다. 결국 리사는 영두에게 밀쳐 넘어진 일에 분개한 유민의 사주를 받아 시험지 유출 사건에 영두를 연루시킨다. 하지만 결국 상처입은 것은 영두였고, 영두는 그 억울함을 모두 떠안은 채 원서동과 낙원하숙을 떠난다.

나는 미래가 욕심나는 것이 두려웠다. 이미 차가운 실망 속에서 마음의 문을 닫아버렸기 때문이다. ... 그때 내 답에 따라 상황이 달라졌을까. 내가 할머니를 믿고 하나도 해결되지 않았다고, 나는 아픈 사람이 되었다고 솔직하게 말했다면. ... 이미 내가 버리기로 한 것을 떠올렸고 떠나기로 결심한 순간을 떠올렸다. 그리고 돌아가기로 한 결정을. ... 리사와 같은 말이었지만 같은 마음이 담기지는 않은 말이었다. "다 해결되었어요." (p.224)



Ⅲ. 이질적인 존재들 - 시미즈 마리코의 이야기


낙원하숙의 문자 할머니, 즉 시미즈 마리코는 해방 후 조선 땅에 남겨진 잔류 일본인 여성을 대표한다. 조선이 일제의 식민지이던 시절, 마리코는 창경궁 대온실에서 일하던 양아버지를 따라 경성으로 오게 된다. '마리코 히메'는 경성과 창경궁 동물원과 대온실을 드나들며 제법 행복한 일상을 보낸다. 하지만 식민통치 말기 심화되던 전쟁의 소용돌이 안에서 그 평안이 계속 될 수는 없었다. 게다가 일제는 패망하고 조선은 해방을 맞이하면서 그녀의 처지 또한 확 뒤집어져 버린다. 해방된 '서울'에서 일본인인 그녀는 불청객일 수 밖에 없었다.

종전이 되었을 때 할머니는 열살이었다. 천황의 항복 선언과 조선의 해방 같은 것에 대해 정확히 알 수 없는 어린아이였다. 해방이 되고 거리마다 만세를 부르며 춤추는 사람들이 몰려나왔을 때 동생 손을 잡고 구경을 가기도 했지만 천황의 사진이 불태워지고 뻐드렁니와 주먹코로 일본인을 희화화한 그림과 함께 "기어서라도 일본으로 돌아가라"라는 벽보가 붙기 시작하자 충격을 받았다. (p.291)


하지만 마리코는 일본으로 돌아갈 수도 없었다. 조선인이었던 아버지가 있었기 때문이었고, 조선 땅에 살면서 전쟁의 화를 피한 사람들에 대한 일본 내지 사람들의 차별이 못지 않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기에 그들은 '서울'에 남게 되었고, '일본인'으로서의 자신들의 정체성을 숨겨야 했다. 우선적으로 '조선 이름'을 썼다. 일제의 창씨개명이 조선인들을 일본인으로 만들고자 함이었다면, 마리코와 그의 가족들은 일본인임을 숨기기 위해 '조선 이름'으로 서로를 불러야 했다.


그러던 와중에 한국 전쟁이 터진다. 서울의 주인이 두 번 바뀌고, 국군이 다시 후퇴하던 때, 아버지 박목주는 자신의 선임 이창충의 지시를 받고 잠시 서울을 떠나게 된다. 직접적으로 언급되지는 않지만, 후에 이창충이 큰 부를 누리게 된 것을 보건데, 전쟁통에 황실의 재산을 빼돌리던게 아니었을까. 아무튼 아이들이 걱정된 아버지는 식물원 지하 배양실에 아이들을 숨겨뒀고, 마리코와 그의 동생은 지하에서 아버지를 기다린다.


그 여정에서 부상을 입은 박목주는 아픈 다리를 끌고 창경궁에 도착하지만, 끝내 이창충에게 죽음을 맞게 되고, 마리코가 그 광경을 목격하게 된다. 한편 동생 유진 또한 지하실의 생활을 견디지 못하고 병치레를 겪게 되면서 상황은 급박해진다. 그 상황에서 약을 갖고 있던 이창충은 끝까지 마리코를 압박하지만, 마리코는 기지를 발휘해 그곳에서 도망쳐 나오는데 성공한다.

그 도깨비는 유진이 떠나자마자 저를 찾아왔습니다. 유진의 창백한 얼굴을 보더니 "이제야 당신은 완전히 혼자가 되었군"하고 무섭도록 천진하게 말했습니다. ... 그때의 비명은 내가 들은 창경원 어느 동물의 것보다도 크고 요란했지만 너무나 궁상맞고 하찮은 것이었습니다. 나는 원수를 갚은 탓에 엄마에게 죄를 지었습니다. 나를 죽은 것으로 생각하게 하는 죄였습니다. 평생 내 죄는 그것뿐이라고 여겼습니다. 마리코는 엄마에게 죄를 지었습니다. 다른 사람에게는 아닙니다. (p.366)


그 후 마리코는 일본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악착같이 조선 땅에서 버틴다. 피난 간 부산에서 리사의 집안의 양자로 들어가게 되었고, 아버지의 고향이었던 강화를 떠돌다 영두의 할머니를 만나게 되었다. 그 인내의 시간 끝에 자신이 어린 시절 살았던 아버지의 관사이자, 한때는 낙원하숙이었던 그곳으로 돌아오게 된 것이었다. 그렇기에 낙원하숙은 할머니의 '낙원', 그 자체였을 것이다. 이 단어말고 어떻게 그 집을 표현할 수 있을까.

"할머니의 마지막 진심은 뭐였을 것 같아? 영두씨라면 알지 싶었어" ... "이미 아시잖아요." ... 삼우씨는 고개를 숙였다. 낙원하숙에서의 하루하루가 말해주지 않는가. 우물마루 널 한장 한장에 기름칠하던 할머니, 미닫이문틀을 솔로 쓸고 모서리가 반들반들 닳은 2층 계단을 걸레로 훔쳐내던 할머니, 창덕궁 단풍나뭇가지와 맞닿은 기와지붕을 오래오래 응시하던 할머니. 그럴 때면 할머니와 그 오래된 집이 얼굴을 쓰다듬으며 대화를 나누는 듯했다는 걸 알고 있지 않은가.(p.277)



Ⅳ. 생존자의 이야기 - 상처를 '수리'하는 방법


다소 극적으로 표현되어 있지만, 결국 이 모든 이야기는 '생존자'들의 이야기이다. 기적과 같은 생존 이야기를 다루는 소설들은 있어도, 대게 생존 이후의 삶을 그려낸 이야기는 흔치 않다. 마치 어떤 동화가 "오래 오래 행복하게 살았습니다"라는 말로 마무리를 맺지만, 그 이면의 모습은 잘 그려내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간신히 살아남은 그들은 살아남았다는 것에 안도했을지도 모른다. 다만, 살아남는 과정에서 입은 상처가 흉터가 되어 오랫동안 그들을 괴롭힌다. 단적으로 마리코는 가족을 잃었고, 영두는 추억을 잃었다. 하지만 그 뿐만 아니라 마리코는 자신의 죄를 껴안고 사는 것으로써, 영두는 기억을 애써 지움으로써 '스스로 만든 감옥'에 자신을 가둔 채 살아갔다.


건물을 '수리'하는 것처럼 마음의 상처를 봉합하는 것 또한 정해진 방법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건물을 수리하는 것만큼 명확하지는 않지만, 그 상처를 제대로 마주하는 것이 그 방법이라고 소설은 이야기하고 있다. '대온실 수리 보고서'를 작성하면서 영두는 비로소 자신의 과거와 제대로 마주하게 된다. 그리고 그 과정은 겉으로는 대온실을 수리하는 일이지만, 영두는 그 과정을 통해 자신의 상처를 '수리'하게 된다. 이는 자신의 상처를 마주하지 못한 채, 여전히 외면의 보호에 집착하며 사는 리사의 삶과 대조된다.


그렇다면 우리는 상처를 어떻게 마주해야하는가. 그에 대한 힌트를 이야기의 축을 이루는 또 한 명의 이질적인 존재인 '후쿠다 마모루'를 통해서 이야기하고 있다. 일본에서 포도 농장을 꾸리려다 실패한 그는, 유럽으로 그리고 다시 미주를 횡단하며 포도를 기르고 와인을 만드는 일에 빠진다. 아무리 국비 유학생의 신분이었다고는 하지만, 죽을 뻔한 고비들을 넘기는 그의 하루하루가 평안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일본으로 돌아온 그는 일본의 상징인 포도가 아닌, 국화를 재배하는 일로 성공을 하게 된다. 그 과정에서 식물을 보존에 눈을 뜨게 된 후쿠다는 온실을 만드는 일을 계획하게 된다. 일본에서의 온실, 그리고 창경궁의 대온실이 바로 그 결과이다.


후쿠다 마모루의 삶이 보여주는 것은 '그저 일어나는 것'이 전부임을 알려준다. 작 중에서 영두가 말하듯, 더 억울해지는 건, 그 억울한 일에 내가 갇혀버리는 일이다. 후쿠다 마모루에게도 끊임없이 좌절할만한 일들이 있었으리라. 그럼에도 그는 결국 일어났다. 넘어져도 일어나는 것. 그것이 그가 할 수 있는 일이었고, 상처를 마주한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이 아닐까.

산아는 내 귀에도 들릴 정도로 큰 볼륨으로 노래를 듣다가 갑자기 뚝 끊더니 "억울함은 어떻게 해야 해?" 하고 물었다. 길을 걷다가 불길 같은 노여움을 느끼면서 억울해,라고 소리 질렀던 시절이 떠올랐다. ..."잊는 건 불가능해" ... "산아야 더 억울해지는 건 그 억울한 일에 내가 같혀버리는 일 같아. 갇혀서 내가 나 자신을 해치는 것." (pp.316~318)


마지막으로, 낚시꾼 설화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용왕의 딸을 구해준 낚시꾼은 용궁에서 용왕의 딸과 행복한 시간을 보낸다. 하지만, 그는 며칠 후 육지로 돌아가고 싶었고, 육지로 돌아온 그는 300년이 지난 시간을 마주하게 된다는 이야기. 그 이야기는 시간은 모두에게 평등한 듯 하지만, 사실 시간은 저마다 다른 속도로 흘러가고 있음을 말해준다. 현재를 살아감으로써 과거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영두에게도, 그리고 이미 세상을 떠났지만 영두를 통해서 나마 자신의 억울함을 풀 수 있었던 마리코 할머니에게도 말이다. 이 모든 것은 단순히 연속되어 흘러가는 시계열로는 설명할 수 없는 것이지 않은가. 풀어야하는 매듭은 언제라도 풀어야 한다.

(낚시꾼 설화이야기를 듣고) "후쿠다, 이게 뭘 얘기하는 거라고 생각하니?" ... "아니란다, 영두야. 그건 인간의 시간과는 다른 시간들이 언제나 흐르고 있다는 얘기지." 그때는 할머니의 진심을 받아들이지 못했지만 이제 나는 이해할 수 있다. 세상 어딘가에는 지금이 아닌 시간이 흐르고 있다는 것을. (p.403)



작가의 말을 통해, 창경궁 대온실을 이렇게 말하고 있다. "한때는 근대의 가장 화려한 건축물로, 제국주의의 상징으로, 대중적 야앵의 배경지로, 역사 청산의 대상으로 여러번 의의를 달리한 끝에 잔존한 창경궁 대온실은 어쩌면 '생존자'에 비유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이 건축물과 함께 그 시절 존재들이 모두 정당히 기억되기를 바란다. 그리고 더 나아가 당신에게도 이해되기를."


적어도 나에게는 작가가 이야기하는 그 의도가 전해지는, 가슴이 따뜻해지는 소설로 기억될 듯하다. 글을 읽다보면, 글을 쓴 사람의 감정이 온전히 다가올 때가 있다. 내가 받은 감정은 바로 '따스함'이다. 세상의 어느 곳은 햇빛이 들지 않는, 가려진 공간들이 존재한다. 아마 작가는 그림자가 진 그 곳들 조차 소중히 간직되길 바라는 듯하다. 한 번도 해방 후에 남겨진 잔류 일본인에 대해서 생각해 본 적은 없다. 잊혀져있던 그들의 존재가 이 소설을 통해 조금 더 알려졌으면 한다.


# 이미지 출처 :: 국가유산청 홈페이지 - 창경궁 대온실, https://www.heritage.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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