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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벨의 단상: 고수의 처신법


   직장을 옮긴후 헤벨는 ‘처신(處身)’이라는 단어에 꽂혔다. 

이유는 간단하다. 학교에서 나의 위치가 학교의 최고참되시는 분과 평교사들 간의 소통과 인화의 역할을 해야하는 통로이기 때문이다.  직장 옮긴지 1달이 되었다. 

    헤벨의 위치에서 어떻게 처신하고, 나의 몸이 있어야 할 자리를 구분하고, 내가 생각하는 나의 지표를 

확인하는 것이 쉽지 않다.  처신의 한자는 곳 처(處) 몸신(身)이다. 몸을 두는 곳인데 직장에서 내가 몸을 두고 내가 있어야할 자리를 구분하는 것에 익숙해져야한다. 


   중간자로서의 통로의 역할을 하다보니 학교의 최고참 되신분의 요구사항을 평교사에게 전달해야하는 입장에 있을 수 밖에 없다. 헤벨은 누군가의 말을 전달하는 입장이 무척 꺼끄럽다. 특히 헤벨의 생각과 일치하지 않는 다른 누군가의 생각을 전달하는 것이 좋지 않다. 알다시피 말을 전달하는 과정에는 감미료가 첨부되기 때문이다. 헤벨은 생각한다. ‘ 다른 사람을 시키는 것이 꺼끄러운 일이라면 차라리 시키지 말라고 말이다. ’ 

   자신이 하기 싫은 일도 다른 사람도 하기 싫다. 그러니 왠만하면 자신이 직접 하지 못하는 말은 다른 사람에게도 시키지 말아야한다. 

출처: 교보문고(고수의 처신법, 저자: 한근태, 출판사: 스노우폭스북스, 2023.10.2.)


      학교의 중간자리로써의 역할에 대한 처신을 고민하게 되면서 접하게 된 책이 ‘고수의 처신법’이다. 

짧은 글들로 이루어진 작가의 어록같은 책이었다. 

  처신을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하는가?라는 작가의 질문에 이 책을 통해 헤벨이 생각하는 처신의 좌표를 확인하는 계기가 되었다. 한근태 작가의 글에서 얻은 메시지를 함께 공유하고자 한다. 


 나를 의심하라 

한국에는 신념에 찬 사람들로 차고 넘친다. 확성기를 크게 틀어 자기 주장을 남에게 강요하는 사람도 많다. 이걸 믿어라, 누구를 석방하라, 저 사람을 구속하라, 이 놈은 나쁜 놈이다. 이러면 안된다. 저래야 한다 등등. 하다 아되면 길까지 막고 난리르 치는 사람들도 많다. 인터넷에서도 그런 사람들은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난 그들을 볼 때마다 여러 생각이 든다. 어떻게 저렇게까지 자기 확신이 강할까? 저렇게 확신하는 근거는 무얼까? 반대편에 있는 사람들과 대화해본 적은 있을까? 자기 생각이 틀릴 거라는 생각을 해본 적은 있을까? 저라다 자기 생각이 틀렸다는 걸 알게 되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난 신념에 찬 사람을 의심한다. 난 이들의 일상이 궁금하다. 최근 어떤 책을 읽었는지, 신문이나 잡지를 읽는지, 누구를 주로 만나는지, 술을 자주 마시는지, 담배를 피우는지, 운동을 하는지, 잠은 충분히 자는지, 가족들과 사이는 좋은지, 자기 삶에 만족을 하는지 등등 . 나는 신념에 가득찬 사람보다 의심에 가득찬 자를 신뢰한다. 소설가 김훈의 말이다. 난 신념에 찬 사람으 진심으로 의심한다. 내가 생각하는 신념은 무지의 결과물이다. 하나만을 알기 때문에 다른 모든 것을 부정하는 것이 신념이고 확신이다. 
 - 고수의 처신법(한근태 저)-


    최근에 나의 의사 결정에 의심할 때가 많았다. 다행히 확신에 차서 결정을 내리지 않은 것이 잘된 경우도 있었다. 신념에 차있다는 것은 교만일 수 있다. 다른 사람의 생각을 받아들이지 못해 자신의 결정과 사고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은 교만이다. 나이가 들수록 확신할 수 있는게 아무것도 없어진다. 차라리 이게 좋을 수도 있다. 난 나를 의심한다. 


인정에 목말라 하지 마라 

인정은 중요하다. 하지만 인정에 목숨을 걸어서는 안된다. 타인은 타인이고 나는 나일뿐이다. 남이 알아부면 그 행동을 하고 알아주지 않으면 하지 않는다는 건 어리석은 일이다. 그런 사람은 타인의 만족을 위해 살 가능성이 높다. 우리는 누굴 위해 사는가? 당연히 자신을 위해 산다. 인정에 목숨을 거는 것은 타인을 위한 삶이다. 타인의 인정을 바라고 타인의 평가에만 신경을 쓰다 보면 끝내 타인의 인생을 살게 된다. 
-'고수의 처신법' (한근태 저)-


   사람들 평판과 인정이 누군가에게는 중요할수도 있다.  하지만 나 자신의 행복과 건강보다 인정이 중요하지 않다. 교육지원청 8년의 세월동안 윗상사에게 인정받기위해, 승진을 위해 자신의 몸도 돌보지 않고 일하는 사람들을 종종 봐왔다. 잠깐은 인정받을 수 있겠지만 건강잃으면 그 누구도 쳐다보지도 않는다. 아무도 신경쓰지 않는다. 타인의 인정보다는 나 자신이 목표하고 정한 나만의 인정기준을 세우는 것도 중요하다는 것을 새삼 최근에 다시 느낀다. 


 

섭섭해 하지 마라 

자주 서운한가? 늘 섭섭한 마음이 드는가? 왜 그렇게 생각하는가?
잘해줬는데 그만한 보답이 없어 섭섭한가? 그럼 대가를 바라고 잘해줬는가?
그러는 당신은 누구 덕분에 여기까지 왔는가? 잘해줬는데 그만한 보답이 없어 섭섭한가? 그럼 대가를 바라고 잘해줬는가? 그러는 당신은 누구 덕분에 여기까지 왔는가? 혼자 힘으로, 아무 도움없이 왔다고 생각하는가? 당신에게 베푼 사람에게 당신은 어떻게 했는가? 섭섭한 이유는 교만 때문이다. 자신을 대단한 존재로 느끼고 떠받들어야 하는데 그렇지 않으면 섭섭한 마음이 생기는 것이다. 상석으로 모시고, 스피치할 기회를 주고 굽실거려야하는데 그렇지 않은 것이다. 세상이 자기를 중심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자주 느끼는 감정이다. 미성숙하다는 증거이다. 섭섭한 마음을 없애는 방법은 그 마음을 감사의 마음으로 채우는 것이다. 현재 상태에 감사한 마음을 갖는 것이다. 
  - '고수의 처신법' (한근태 저)-


    헤벨은 의전(儀典)이라는 것에 괜히 두드러기가 난다.  마음에서 우러나오지 않은 격식을 차려야하는  직장인의 태도와 양식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헤벨의 환영식날이었다.  너무 바빠서 학교의 최고참되시는 분을 모셔야하는다는 생각은 했지만 부장에게 물어보니 학교의 최고참되신분이 자차를 가져와서 혼자 오신다는 말을 듣고  꼭 내가 모시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내가 모셔야했다. 헤벨을 위한 환영회식이었는데  헤벨은 불편했다. 학교의 장이시니 누군가는 모셨어야하는데 아무도 모시지 않으셔서 섭섭하셨으리라. 짐작은 간다. 헤벨의 사회성이 떨어지는 면이다. 하지만 어떠하랴? 헤벨의 성격은 변할수도 없고  변하고 싶지도 않다.   휠체어를 타거나 지체가 부자유스러운 분이시거나 자가용이 없으시다면 말하지 않아도 헤벨은 모실 것이다. 누군가 헤벨의 위치에 따라 헤벨을 모시거나 의전을 행한다면 나는 단연코 거절할 것이다. 


헤벨은 다짐한다. 최대한 섭섭해하지 않으리라. 누가 나를 대접하든 안하든 섭섭해한다는 것은 어른스럽지 못한 것이다. 섭섭한 이유는 교만 때문이라는 한근태 작가의 말에 200% 공감한다. 자신을 대단한 존재로 느끼고 떠받들어야 하는데 그렇지 않으면 섭섭한 마음이 생기는 것이다. 이런 섭섭한 마음이 생기지 않도록 경계해야한다. 


   현재의 헤벨이 있는 것은  알게모르게 누군가 나를 도와주었고, 지지해주었기 때문이다.  그 누군가에게 감사하고, 보답하고 싶다.  나이들어 존경받아야하고 직위에 따라 대접받지 못한다고 해도 섭섭해하지 않으면서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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