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반려견 발 뒤꿈치에 벚꽃이 피었다.

세상 사람들이 즐기는 시즌이 되면 가는 봄 구경, 가을 단풍놀이를 가본 적이 없다.

사람들이 많은 상황이 극도로 싫을 뿐만 아니라 시즌만 되면 통과의례처럼 봄 구경을 가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올해는 간곡하게 봄의 벚꽃 피기를 기다렸다.

이유는 단 한 가지이다. 봄이 빨리 왔으면 하는 소망이었다. 지루하고 힘들었던 겨울이 끝났다는 것을 알려주는 봄의 전령사가 벚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벚꽃을 기다렸지만 관광버스를 타고 벚꽃 구경까지 갈 만한 시간적, 경제적 여유는 없다.

그래서 나의 반려견을 데리고 집 근처 벚꽃이 만개하게 피어있는 길을 걷기로 했다.


전날 비가 와서 그런지 벚꽃이 흐드러지게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오랜만에 밖에 나온 반려견의 발걸음이 가볍다.

벚꽃이 떨어진 꽃길을 둘이 걸어간다.

반려견 발뒤꿈치에 벚꽃이 묻어나서 떨어지지 않는다.

나의 반려견의 발뒤꿈치에 벚꽃이 피어난다.


한 걸음, 한 걸음 반려견이 걷을 때마다 벚꽃이 발바닥에 피어오르고 있다.

아름답다. 다양한 모양의 벚꽃이 피어난다.


반려견의 발바닥에 피오르는 벚꽃의 아름다움이 나의 아픔을 녹여준다.

삶에 지쳐, 먹고사는 것에 지친 나는 세상의 아름다움을 느끼는 감정을 잃어버린 상태였다. 아름답다. 정겹다. 즐겁다, 행복하다는 형용사적인 삶의 가치를 느낄 여유와 시간도 없이 그렇게 나라는 존재는 닳아없어지고 있었다.


행복이 다가와도 행복할 시간 따윈 없다고 생각했고,

타인과의 관계에서 내 마음을 보이고,

내 전부를 던지지 못하고,

벗을 그리워하면서도 벗에게까지 나의 아픔이 미칠까봐 마음을 완전히 열어 보이지 못했다.


밥벌이에 지쳐, 타인과의 관계의 상처들로 내 온몸은 마치 고슴도치처럼 날 선 가시들로 뒤덮여 있어

눈앞의 아름다움과 행복도 알아보지 못했다.

반려견의 발뒤꿈치에 핀 벚꽃을 보면서 세상의 아름다움이 나의 아픔을 찌르고 짓이기는 느낌이다.

이러한 아픔이 나의 감성과 이성을 되찾게 해주고 있다.

이 느낌 싫지 않다. 이런 아픔은 잊어버린 나를 되찾게 해주고 있다.


나는 반려견 발뒤꿈치에 피어난 벚꽃까지도 아름답다고 느낄 수 있는 권리, 즐겁고 행복하다고 느낄 수 있는 이성을 찾아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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