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달 전에 보게 된 리스본행 야간열차 영화, 울림과 여운이 많았던 리스본행 야간열차 영화의 내용을 이제야 글로 쓰는 이유는 이 글의 마지막에 밝히고자 한다.
그레고리우스는 30년간 같은 학교에서 히브리어, 그리스어 등 고전문학 교사로서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정확하고 규칙적인 사람이다. 그날도 여느 날처럼 똑같은 일상을 시작하는 과정에서 다리 난간에 서있는 자살하려는 여인을 만났고, 그 여인이 놓고 간 코트 속에 있던 책과 리스본행 열차표를 가지고 그레고리우스는 무엇인가에 이끌려 열차에 몸을 싣는다.
리스본에 도착한 그레고리우스는 언어의 연금술사라는 책의 저자를 찾아 나선다.
책의 저자는 아마데우스 드 프라드였으며, 이미 고인이 되었고, 그가 묻힌 공동묘지에는
“ 독재가 현실이라면 혁명은 의무이다. ”라는 묘비명을 통해 그레고리우스는 비밀결사대 요원 중 한 명이었던 아마데우스 삶 속으로 들어간다.
포르투갈의 카네이션 혁명(1974년)
살라자르 정권이 장기간 독재하던 그 시기의 포르투갈의 시기에 아마데우스 드 프라드가 생존해있었고, 프라드는 독재 정권에 저항하던 비밀결사대 요원 중 한 명이었다.
아마데우스의 둘도 없는 친구의 여인과의 사랑,
혁명도 모두 버리고 사랑하는 여인과의 도주 등의 아마데우스 삶의 일생을 그레고리우스는 탐구 해나간다.
아마데우스 드 프라드의 삶 속에는 자유와 진실에 대한 열망이 있었고, 뜨거웠던 사랑과 이야기가 있었다. 안경이 깨져서 안경을 다시 맞추기 위해서 만난 안과 의사 ‘마리아나’ 여인과
그레고리우스는 아마데우스라는 인물과 책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다.
마리아나 여인에게 “ 인생의 진정한 감독은 우연이다”라는 문장의 문구가 최고로 좋았다고
말하는 그레고리우스는 57세의 나이에 평생을 규칙적이고 일탈하지 않는 삶을 살아온 그레고리우스는 인생을 이제는 우연과도 같은 만남을 통해서 인생이 이루어질 수도 있다는 깨달음을 얻는다.
“우리가 우리 안에 있는 것들 가운데 아주 작은 부분만을 경험할 수 있다면 나머지는 어떻게 되는 걸까?”
그레고리우스는 자신의 지루한 삶과 비교되는 프라드의 시간을 들여다보면서
그레고리우스는 무언인가를 느꼈을 것이다.
프라드와 함께 비밀결사대 일을 했던 마리아 주앙은 그레고리우스에게 이렇게 말한다.
“ 사람들은 자기 자신에게 무엇이 없는지 알지 못합니다. 그게 나타나기 전까지는 말이지. 그러다가 그게 나타나면 그 모든 것이 확실해지죠”
우리는 우리의 일부를 남기고 떠난다.
그저 공간을 떠날 뿐
떠나더라도 우린 그곳에 남는 것이다.
그리고 다시 돌아가야만
찾을 수 있는 것들이 우리 안에 남는다.
우리가 지나온 생의 특정한 장소로 갈 때
우리 자신을 향한 여행도 시작된다.
그 여정의 길이는 중요하지 않다.
라고 했던 프라드의 말에 울림이 있다.
그레고리우스가 아마데우스를 만나기 위해서 떠난 여정에서 만난 인물들 아마데우스의 절친
조지, 조지의 연인이었던 스테파니, 스테파니는 마지막에 조지가 아닌 아마데우스를 선택
하였고, 아마데우스는 스테파니아와 함께 차를 타고 국경을 넘어 스페인으로 도피하고 스테파니아와
더 큰 세계로 탐험하기 위한 여행을 떠나자고 말하지만 스테파니아는 그의 제안을 거절한다.
결국 아마데우스는 포르투갈로 돌아오지만 혁명의 결과를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난다.
아마데우스라는 작가의 삶을 탐구한 채 이제는 다시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가야 하는 그레고리우스, '
기차역에서 마리아나는 그레고리우스에게 리스본에 머물기를 바란다고 조심스레 말한다.
영화 마지막 장면에서 그레고리우스가 어떤 선택을 한지는 보여주지 않는다.
그레고리우스의 선택은 전적으로 관객들의 몫이다.
과연 내가 그레고리우스의 입장이라면 어떤 결정을 내렸을까? 인생의 반 시간동안 몸 담았던
직장과 일상을 버리고 새로운 곳에서의 삶을 시작하기란 쉽지 않을 것같다. 나라면 말이다.
리스본행 야간열차 영화를 보고 난 후에 내가 결심한 것은 리스본을 한번 나도 가보자는 것이었다.
지루하고 똑같은 일상에서 벗어나 여행을 하라는 것일 리스본행 야간열차가 의미하는 것이 아닐
것이다. 더욱이 평범한 일상이 소중하지 않다는 말이 아니며, 지루하고 똑같은 일상에서 느끼는
책임과 의무에서 벗어나 일탈을 꿈꾸라는 메세지는 더더욱 아닐 것이다.
" 우리가 우리 안에 있는 것들 가운데 아주 작은 부분만을 경험할 수 있다면
나머지는 어떻게 되는 걸까?" 라는 문장처럼 우리 안에는 광대하고 무한대의
경험과 무엇인가를 이룰 수 있는 공간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안에 작은 부분에 갇혀
사는 것은 아닐까?
Koi Fish 잉어처럼 어항의 크기에 따라서 자신의 크기가 결정되는 코이 잉어는 자기 숨쉬고 활동하는
세계의 크기에 따라 작은 관상어에 머물러 버리기도 하고 대어가 되기도 하는 것처럼 내 안에 나머지는
어떨게 될까? 자문해 보면서 리스본으로 여행을 떠나보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