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10월 건명원 2기 과학수업 에세이 @건명원
인간의 역사는 길지 않다. 과학이라고 이름 지어진 학문의 역사는 더욱 그렇다. 인간은 과학의 발전을 발판삼아 지구 위 어떤 생물도 겪어본 적 없는 문명을 누리고 있다. 존재를 지탱해 온 종교적 신념도 무의미하게 할 만큼 놀라운 과학적 발견과 발전이 펼쳐지고 있다. 한편, 생명체는 각자의 방식으로 세상을 보고 인식한다. 그런데 인간의 ‘봄’은 다른 생물체의 그것과 달리 추상으로 이어진다. 추상은 독자적인 사유체계를 세우는 철학, 물질의 원리를 탐구하는 물리학(과학), 이야기를 꾸려내는 문학 등의 모습으로 정점에 다다른다.
객관성이 핵심인 과학은 인간의 ‘봄’에서 주관성을 배제시키는 것을 사명으로 한다. 개개의 주관성은 과학으로 세상을 인식하는 데 있어 발 디딜 구석이 어디에도 없다. 그런데 나날이 과학이 발전함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봄’에서 주관성은 쉽게 배제되지 않는다. 과학이라는 도구로 세상을 본다 해도 행위의 주체인 인간에게 ‘욕망’이라는 주관이 개입되기 때문이다.
호랑이가 담배 태우던 시절은 차치하더라도, 고대 그리스․로마 시대에 살았던 인간의 고민과 고뇌는 21세기를 살고 있는 인간들에게도 깊은 울림을 준다. 되레 인간은 수 천 년 전 그들이 남긴 흔적에서 위안과 지혜를 얻으려 갈망한다. 그런 의미에서 과학이 아무리 발전했더라도 인간은 하등 발전하지 않았다. 세상을 보는 도구인 과학이 첨단이고 객관적일지라도, 세상을 보는 주체인 인간이 그대로인 거다. 지식과 정보를 천문학적으로 축적한 인간일지라도 욕망의 굴레를 벗어나기 쉽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욕망의 흐름을 주도적으로 이끌어 역사를 개척한 이들을 일러 우리는 ‘위대하다.’고 이름 붙인다. (이러한 특수한 경우를 제외하고) 결국 인간은 이제껏 배운 것이 하나도 없고, 아는 것도 하나 없다는 극단적인 결론을 내리게 된다.
작금의 수많은 ‘사태’들은 인간이 여전히 욕망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했다는 통쾌하게 증명한다. 인간은 끝없이 샘솟는 욕망을 과학의 이름을 본 딴 지식으로써 보기 좋게 포장해 왔을 뿐이다. 지식으로 눈을 덮고 귀를 막아왔다. 인간의 배움과 앎은 주체를 껍데기로 뒤덮어온 과정이었다. 주체적 존재로써 ‘생각’할 수 없다면, 객관적이고 절대적인 과학을 도구로 가진다한들 껍데기로만 보게 된다. 존재로써 ‘살아있음을 깨달을 때’(生角) 비로소 껍데기를 걷어내고 볼 수 있게 된다. 존재가 도구를 ‘제대로’ 활용할 수 있게 된다. 무의미를 깨달을 때 의미가 생겨나는 역설처럼 무지(無知)를 깨달을 때 앎을 알게 되는 거다.
태어남은 고생의 시작이다. 생명체 모두는 시작과 동시에 마지막을 향해 달려간다. 껍데기만 더하는 배움과 앎에 시간 뺏기기엔 짧은 시간이 아깝기만 하다. 유한한 생(生)의 초침은 지금도 흘러간다. 뒤안길로 사라진 수많은 인간들이 그랬던 것처럼, 모두가 ‘과학적 지식’을 향해 쉼 없이 달려갈 때, 조금 다른 길에서 무지(無知)로 향하고 싶다. 그 곳에 과학도, 철학도, 문학도, 아니 그 어떤 것도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는 ‘앎’이 있을 거다. 욕망의 껍데기를 뒤집어 쓴 채 과학으로 세상을 보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존재로써 세상을 보는 과학을 얻을 것 같다. 욕망의 흐름을 역사의 물꼬로 이끄는 데 조금이나마 가까워질 수 있을 것만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