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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oreaSeJin 코리아세진 Dec 31. 2018

2018년을 여미며

2018. 12. 31. 

"긴 잠에서 깨어보니 세상이 온통 낯설고, 아무도 내이름을 불러주는 이 없어, 나도 내가 아닌 듯하다."


 2018년 1월 1일, 건명원 최진석 선생님 그리고 친구들과 함께 북한산에 올라 힘차게 솟구치는 태양을 보며 호기롭게 한 해를 시작했다. 세상 그 누구보다도 밝은 미소를 지어보였지만, 그 속에는 시련과 고난이 함께 깃들어있었다. 빛이 밝을 수록 그림자도 어둡다고 하지 않던가!

2018년 새해 첫 날, 북한산 자락에서

 

 회사일과 두 번째 책 집필 그리고 일본어공부를 병행하며 정신없이 지내던 2017년 11월, 아빠가 갑자기 간암 3기 진단을 받고 병상에 눕게 됐다.(공교롭게도 같은 날 새벽 둘째조카가 태어났다. 생명과 죽음의 소리가 동시에 울려퍼진 기묘한 날이었다.) 곧바로 수술을 통해 간의 18cm를 잘 잘라냈지만, 12월부터 시작된 항암치료에서는 별다른 효과를 보지 못했다. 일생동안 잔병치레도 거의 없던 몸이었지만, 암세포는 상대적으로 젊은 육체의 활력에 힘입어 남아있던 간을 맹렬하게 집어삼켜갔다.  


 2월 중순 3차 항암치료를 받기 위해 입원한 아빠는 말똥말똥 멀쩡하게 숨 쉬고 보통사람과 다를바 없이 활동하고 있었다. 담당교수님은 나를 불러 CT사진을 함께 보여주며 "더 이상의 치료는 의미가 없다."고 탄식하며 “몇 주 안 남으셨다.”고 말했다. 아빠의 시한부 선고를 받는 나의 모습은, 목숨마저 내던지고 최후의 결전에 임하는 군인의 그 무엇이었을까, 입술을 굳게 다물고 저 밑은 곳에서부터 솟아오르려는 무언가를 억눌렀다. 고개를 떨구고 내 눈을 아예 마주보지도 못하던 교수님을 내가 되레 위로해드렸다. 


 그런데 누나의 산후조리 돕던 엄마와 갓 태어난 아기를 돌보던 누나에게 이 소식을 전할 때는, 가슴에서 마구 요동치는 무언가를 더 이상 통제하지 못했다. 그것은 입에서 어떤 소리도 나오지 못하게 목구멍을 조여왔고, 눈을 미친듯이 뜨겁게 만들어버렸다. 마치 정신을 통째로 앗아가버리려는 것 같았다. 전화너머로 건네지는 흐느낌들은 마구잡이로 가슴팍을 난도질해왔다.  

 하지만 여기서 내가 무너지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며 어금니를 질근 깨물었다. 솟아나는 모든 감정을 철저하게 배제하고 오직 이성과 굳센 의지만을 붙잡으려 했다. 가장 힘든 건 당사자 본인일 것이기에 보호자인 나는 더욱더 침착해져야 했다. 아무일 없었다는 듯이 병실로 돌아왔는데 갑자기 창문너머로 까치 한 마리가 내려앉았다. 우리는 잠시동안 말 없이 까치를 봤다. 그는 고개를 몇 번 휘저으며 입맛을 다시더니 푸득푸득 어딘가로 날아갔다. 나는 "아빠 힘내서 이겨내라고 까치가 왔다가네요~" 라며 한 움큼의 미소를 지어드리는 속으론 자유롭게 날아다니는 까치가 이상하리만큼 야속했다. 

 

 지난 3개월 간 투병소식을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았지만, 지인들과의 작별인사 자리를 꼭 마련해드리고 싶어 아빠 핸드폰에 저장된 분들께 연락을 돌렸다. 아빠를 보기 위해 많은 분들이 병원을 찾아주셨고 전국 곳곳에서도 응원 메시지를 보내주셨다. 뿐만 아니라 간병하는 나의 지인들도 함께 힘을 보태주었다. 


 3월 3일, 압권이었다. 육군사관학교 졸업에 즈음해 가족사진을 함께 찍었던 스튜디오를 찾아가 8년 전 찍었던 사진을 겨우 찾아냈고 영정사진으로 주문했다. 곧이어 건명원 3기 졸업식, 4기 입학식에 자리를 함께 하며 삶과 죽음, 시작과 끝의 공존을 온 몸으로 마주했다.

 3월 8일, 아빠의 혈액에서 측정될 수 있는 모든 수치가 급격하게 떨어졌다. 발끝부터 시작된 붓기는 온 몸을 퉁퉁붓게 하고 안색은 점점 노랗게 변하다가 갈색빛을 띄기 시작했다. 암세포가 간 동맥을 모두 먹었을 때 나타나는 증상들이었다. 

 3월 12일, 누나의 생일. 누나가 갓난 조카를 데려 와 잠시나마 온 가족이 단란한 시간을 보냈다. 엄마가 만들어온 딸기주스를 끝으로 더 이상 아무것도 먹지 못했다. 병상에서 가장 먹고 싶어하던 음료수 "오란C"도 더 이상 마시려고 하지 않았다. 

 3월 14일 새벽, 며칠 전 '임종 증상'에 관련된 외국 논문을 뒤적여 알아낸 바에 따르면, 숨 쉴 때 가래 끓는 소리가 나면 길어야 하루이틀이라고 했다. 가래끓는 소리를 내며 잠자던 그가 갑자기 복부에 강한 통증을 호소했다. 곁에서 선잠을 자던 나는 급하게 간호사를 불러 진통제를 놓아드렸다. 그 때부터 진통제 강도가 점점 높아지더니 몰핀(마약성 진통제)까지 놓게 됐다. 이때부터 의식을 잘 차리지 못하고 "아이고 배야~"만 반복해서 외쳤다. 

 고통에 신음하던 그의 얼굴을 부둥켜 안고 입을 귓가에 가져가 이야기했다. "아빠, 예전에 이미 떠난 부하들 기억나죠? 그 분들 생각하며 군인답게 멋지게 가요. 내가 끝까지 아빠 옆에 있을거니까 절대 무서워하지 마요. 아빠 현충원에 잘 모셔다드릴게요." 나는 고개를 끄덕이는 그를 뒤로하고, 화장실로 뛰어가 흐르는 눈물을 닦아냈다. 

 

 저녁부터 갑자기 온 몸의 붓기가 다 빠지기 시작했다. 지난 며칠 간 거의 움직이지도 못했는데, 갑자기 몸을 비틀고 격렬하게 움직이며 마지막 불꽃을 불태웠다. 몇 시간 뒤, 온 몸에서 땀이 흘러내려 옷과 이불을 적셨다. 온 몸의 모든 구멍이 열린 것이다. 오직 폐만 살아남아 무의미한 호흡운동을 반복하던 중에 같이 자리를 지키던 엄마가 잠시 편의점에 갔다. 3월 15일 새벽 1시 50분 어간, 나와 단 둘이 있는 틈에 아빠가 마지막 숨을 내쉬며 더 이상 숨을 내뱉지 못하더니 완전히 멈추었다. 나는 그의 마지막 숨을 온전히 들이키려했다.


 간호사 선생님들의 숙연한 인사를 뒤로하고, 태극기로 차갑게 굳은 몸을 둘러싼 뒤 장례식장으로 이동해 냉동고에 넣어드렸다. 그 새벽에만 유독 장대비가 쏟아졌다. 하늘이 아빠를 반기는게 분명했다. 

 아빠를 위해 만들었던 추모동영상과 이런저런 자료를 통해 우리 가족만의 장례축제를 만들어냈다. 며칠 간 잠을 거의 못자면서도 어찌저찌 장례식장을 지켜냈다.(이때 힘을 준 고마운 분들께 평생토록 은혜를 갚아나가도 부족할 것 같다...) 화장을 통해 백골만 남은 그의 뼈가 가루로 바뀌어가는 소리는 솔직히 충격이었지만 겉으로는 티내지 않았다. 

 아주 뜨거운 유골함을 두 손으로 움켜쥐고 서울 국립현충원에 안장했다. 아빠는 전투복을 입고 떠나갔다. 그리고 나의 육사동기들, 육군 대위들이 끝을 함께해줬다. 평생토록 군인을 그렇게 좋아했던 아빠는 전투복을 입고 떠날 수 있고, 자신의 육신을 마지막으로 들어준 이들도 군인이라 참 좋아했을 거다. 마지막 절차에서 그에게 거수경례를 했다. "아빠, 나 잘했지?" 모든 일이 끝나고 엄마와 누나가 고생많았다며 나를 끌어안아주니, 한 번도 울지 않았건만 나도 모르게 왈칵 눈물이 나왔다. 하지만 끝날 때까지 끝난게 아니었다. 각종 행정처리와의 고된 싸움을 한 달 여간 이어가야 했다. 


 장례를 마치고 1주일 뒤 곧바로 회사로 돌아왔다. 역시나, 아무일도 없었다는 것처럼 세상은 잘 돌아가고 있었다. 서비스가 급격하게 성장하며 내가 맡고 있는 팀에서 해결해야 할 일도 점점 많아졌다. 난관도 있었지만 진심어린 소통과 강력한 팀웍을 바탕으로 우리는 함께 극복하며 고객평가에서 최고수준의 성과를 달성하는 팀을 만들어 갔다. 

 피카소와 쌍벽을 이뤘던 "자코메티" 전시는 나의 이야기와 별반 다를바 없었다. 그는 삶과 죽음의 문제를 승화시키며 꿋꿋이 걷는 인간의 의지를 형상화했다. 운명적인 공감대를 느끼며 큰 위로를 얻기도 했다. 

자코메티 전

 49일이 지났다. 불교의 장례의식에 따르면 망자는 저승에 가기 전에 7개의 관문을 통과하게 된다고 한다. 그런데 지난 49일 동안 정확히 7번 비가 오고, 49일째 당일에도 비가 왔다. 아빠가 모든 관문을 잘 넘기고 저곳으로 넘어간 것이 틀림없었다.  


 건강을 고려해 난생 처음 다이어트를 시작했다. (2주만에 3KG 감량에 성공했지만 세상엔 맛있는 음식이 너무나 많았다... 더 이상 빼지 못했다. 아흑.) 서울하프마라톤을 뛰고, 체력을 더욱 높이기 위해 진땀흘려 운동했다. 6월 부터는 새로운 업무, 조직문화를 맡게 되었다. 1년 전에 만들었던 고감팀에서의 역할은 다른 팀원에게 차근차근 넘겨줬다. 심적부담도 큰 시기에 상한 물을 잘못 마셔버렸고 위염, 장염, 바이러스 등이 한꺼번에 찾아와 난리통을 겪었다. 아빠가 겪었을 고통을 생각하며 이겨내기 위해 발버둥치며 겨우 회생했고 그렇게 여름이 찾아왔다.  


 정상컨디션을 겨우 회복하고 나니, 문득 아빠의 영전에 책을 바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미 초안은 나와 있었지만 더 이상 진척시키지 않고 방치해뒀던 원고를 다시 펼쳤다.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계속해서 미뤄온 스스로를 용납할 수 없었다.  퇴근 이후 짬을 내고, 주말을 모두 바쳐가면서 꾸역꾸역 편집과 탈고를 반복했다. 그 와중에 건명원에서 "요시다쇼인" 강의를 진행했고, 약 두 달의 고된 작업을 거쳐 원고가 거의 완성될 즈음에 출판사와의 연락을 시도했다. 

 마침 1년 반 전, 동양포럼에서 만났던 '호밀밭 출판사'의 장현정 대표님이 떠올랐다. 짧게 만났던 그 자리에서 책이 완성되면 꼭 본인에게 연락을 달라고 했던 그였다. 오랜만에 연락을 드렸음에도 불구하고 나를 기억해주셨고, 흔쾌히 출판작업을 진행하겠다고 해주셨다. 부산에 있는 호밀밭 팀원분들과 소통하며 책이 완성됐다. 나는 쇼인을 한반도에 알리기에 둘 도 없이 좋은 날인 "광복절"을 출판일로 정했다. 


 최종탈고가 끝난 8월 초, 4박 5일의 요시다쇼인 탐방여행을 떠났다. 이번에는 최진석 선생님과 건명원 4기 원생들과 함께였다. 일본에서 버스 옆자리에 앉은 선생님은 "너의 여정을 이제 책으로 내보는 게 좋겠다." 라고 하셨다. 나는 "선생님, 고백할 게 있습니다. 다음주에 출판됩니다...!" 라고 말씀드리자 적잖이 당황하셨다. 추천사라도 요청드릴 수 있었겠지만,,, 나는 [나를 외치다] 때와 마찬가지로 오기가 발동해, 그 누구의 이야기도 아닌 오직 나의 목소리만을 책에 담아내려 했다. 


 여정에서 귀국한 직후, 아빠의 생일(8월 13일)에 "요시다쇼인 시대를 반역하다" 책을 받아보았다. 그리고 이틀 뒤 광복절에 공식적으로 출판됐다. 여기저기에서 두번째 책 출판을 응원해주셨다. 하지만 내가 대부분의 시간을 쏟았던 것은 책이 아니라 "일"이었다. 

 국내에서 가장 큰 파이썬 개발자들의 축제인 '파이콘 2018' 후원사 부스운영을 담당하고, 이제까지 가져온 '관점'들의 한계를 인식하며 성장을 고민했다. 국방일보 전우 마라톤을 완주하고 결승점을 지나 간식을 받으러가다가 발목을 접질렀는데, 얼마 뒤 축구를 하며 발목이 완전히 돌아가버렸다. 여러모로 부침을 반복하다 보니 어느새 9월 중순이 되었고, 낮과 밤의 길이가 같은 추분(생일)을 기점으로 만 서른의 시대가 시작됐다. 


 추석 때는 엄마와 함께 현충원을 찾아 아빠의 제사를 지냈다. 자원봉사자분들은 아빠의 영정사진을 보며 우리보다 더 안타까워해주셨다. 이래저래 마음정리가 필요했던 차에 오래 전부터 버킷리스트로 가지고 있던 "지리산 종주"를 저질렀다. 홀로 좌충우돌하면서 지리산을 다녀온 뒤엔, 중편의 에세이를 남기며 나를 외쳐보려했다. 

 그런데 이 때 즈음에 최 선생님도 부친상을 당하셨다. 이미 조용히 장례절차까지 끝마친 선생님의 문자를 받고 눈물이 핑돌았다. 1주일 뒤 건명원 개교기념행사에 찾아가 선생님의 손을 꽉 움켜쥐었다. 우리는 10초 동안 말없이 눈빛을 교환하며 서로를 응원하고 그렇게 의지했다. 


 역시나, 쇼인은 살아있었다. 감사하게도, 여기저기서 쇼인의 이야기를 들려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문예비평지, 인터넷매체, 11월 중순 대전 백북스, 12월 초 삼청동의 한 카페 그리고 영광스럽게도 모교인 육군사관학교에서... 나는 쇼인의 이야기를 통해 '감정과 무지'가 아닌 '철저한 지피지기'를 강조했다. (쇼인에겐 미안하게도 사실 더 이상 쇼인에게는 흥미가 없다. 그보다 더욱 진취적이고 실제적이었던 인물에게 관심을 갖고 있다.)


 회사에서도 다양한 챌린지를 마주하고 극복하며, 매 순간 성장하기 위해 힘쓰던 중 날씨가 추워졌다. 추위는 완전한 무방비상태로 있던 나를 갑자기 사방에서 찌르고 밀려들어노는 것처럼 들이닥쳤다. 보이지 않았던, 여기저기 숨어있었던 다양한 상처들이 동시에 곪아터지기 시작하며 나의 존재를 난도질해왔다. 나는 누구인지, 나는 어디로 가고 있는지, 왜 이렇게 혼란스러운건지 조차 분석하기 힘든 순간도 이어졌다.


 또 다른 존재들과의 만남과 호흡을 통해 치유받기도 하고 다시 아프기도 하며 꾸역꾸역 순간들을 살아내고 있다. 1년 간 익숙했던 공간에서도 떠나왔다. 이사를 하며 보니 나의 삶은 1t 한 트럭, 아빠의 삶은 작은 박스 하나에 담겨졌다. 어차피 갈 땐 아무것도 가져가지 못하는 것을,,, 과도하게 욕심부려 뭐하나~ 싶었다. 


 TV에선 각종 행사들이, 여기저기에선 송년회와 망년회가 이어지며 한 해가 저문다.

올 한 해 보았던 수십 편의 영화, 읽었던 수십 권의 책들과 함께 감동했던 순간들도 과거로 여며진다. 


 나는 또 나이가 들어 어른이 되어가는 걸까, 아니면 아직도 한참 어려서 철이 안 드는 어른이 인걸까?

어쩌면 나는 1년 전과는 완전히 다른 나가 된 걸까?

잘 모르겠다. 

결국 삶이 그 답을 가져다주겠지??

 

2019년, 

나의 무게를 꿋꿋이 견뎌내며 무너지지만 말자. 

늘 그래왔듯이... 

음악은 계속 흐르고, 나도 멈춤없이 흘러갈테지.


나는 다시 일어선다. 

어디로 향하게 될지는 모르지만, 가야 한다. 


빨리보다 멀리, 

따로 또 같이,

머무름없이 흐르자.


하늘은 바람을 피하지 않고, 바다는 파도를 겁내지 않는다. 


- 꿈만 같았던, 차라리 꿈이었으면 좋았을, 아니 현실이기에 감사한 2018년을 여미며



"자신의 무게를 견뎌내는 배는, 어떠한 대양이라도 헤쳐 나갈 수 있다."
- 생텍쥐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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