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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ejin Jeung Sep 26. 2019

조금 낯선 매운맛, 초피의 얼얼한 매력


요즘 대한민국이 '마라 열풍'에 휩싸였다. 한국식 매운 맛과는 다른, 혀가 얼얼해지는 마라의 중독성은 바로 '화자오'라는 향신료에서 나온다. 그런데 중국 식재료로만 알고 있는 화자오의 맛은 뜻밖에 우리 민족과도 오랫동안 친숙했던 것이다. 비록 고추의 등장으로 그 존재감이 미미해지긴 했지만 말이다. 


조선 최초의 푸드 칼럼니스트로 불리는 허균은 <도문대작>을 통해 우리나라 방방곡곡의 맛있는 음식들을 백과사전 식으로 정리했다. 바로 이 <도문대작>에 등장하는 음식 중 ‘초시(椒豉)’라는 것이 있는데,  허균은 초시에 대해 “황주(黃州)에서 만든 것이 매우 좋다”고 언급하고 있다.          


초시란 맵게 양념한 된장을 가리킨다. 고추가 없었던 시절 매운맛을 내는 재료로 쓰이던 식물로는 후추나 초피가 대표적이었다. 중국에서 소량씩 수입되던 후추가 엄청난 고가였을 것을 고려하면 고추가 전래되기 전, 우리 식탁의 매운맛은 주로 초피가 담당했으리라 추측할 수 있다. 


‘산초’라고도 불리는 초피는 운향과 식물 중 하나인 초피나무의 열매다. 3m 정도 키에 가시가 달린 초피나무는 5~6월경 꽃을 피우고 8~9월에 열매를 맺는다. 후추알보다 약간 더 큰 열매를 따서 말려 겉껍질을 향신료로 이용하는데, 추어탕에 들어가는 양념이 바로 이 초피이다. 고추처럼 혀를 자극하는 매운맛이 아니라 마치 마비가 된 듯, 톡 쏘면서 얼얼한 것이 특징이다. 


이 초피는 화자오와 풍미가 조금 다르기는 하지만 기본적으로는 같은 종류라 보아도 큰 무리는 없다. 그런데 지역마다 부르는 이름이 다른 데다 비슷한 다른 식물까지 있어 명칭의 혼동이 심하다. 경남에서는 제피, 강원도는 조피, 전남 지역은 젠피, 경북에서는 산초 등 제각각이다. 더구나 일본에서 초피를 산초라고 부르는 탓에 산초나무 열매인 산초와 헷갈리는 이들이 많다. 


초피와 같은 운항과 식물인 산초나무는 열매 모양까지 서로 비슷하나 향과 용도가 다르다. 초피의 경우 열매를 씹으면 마비되는 듯한 아린 맛이 나지만 산초에는 옅은 향만 나는 정도다. 초피가 겉껍질을 향신료로 사용하는 반면, 산초는 씨앗에서 기름을 짜내는 용도로 쓴다. 외관상 산초는 가시가 어긋나서 났으며, 작은 잎에 잔 톱니가 있어 초피와 구별된다. 

임진왜란 이후 고추가 등장하기 전, 초피는 매운 맛을 내는 데 빠질 수 없는 재료였으며 한국을 상징하는 대표 음식인 김치에도 쓰일만큼 그 비중이 컸다. 초피가 많이 나는 지리산 근방 지역에서는 최근까지도 고추를 빻을 때 초피를 넣거나 김장에 초피 가루를 첨가했다고 한다. 


지금도 드물게 초피를 넣어 김장을 하는 곳을 찾아볼 수 있는데 이렇게 하면 김치가 빨리 시는 것을 막아 준다고 한다. 특히 부추와 궁합이 좋아 부추김치를 담글 때 소량의 초피 가루를 첨가하면 풍미가 강렬하게 살아난다. 경상도에서는 추어탕이나 매운탕을 먹을 때 방아 잎과 초피로 타 지역에서 맛볼 수 없는 독특한 향을 낸다. 또한 고기를 먹을 때 초피 잎에 싸서 먹으면 느끼한 맛을 덜어주고 소화에도 도움이 된다.      


초피에는 매운맛 외에 박하처럼 화한 향도 있어 고기나 생선의 잡내를 없애고 입안을 상쾌하게 해준다. <동의보감>은 초피에 대해 “맵고, 독이 있으며, 속을 따뜻하게 하며 피부에 죽은 살, 한습비(차갑고 습한 기운으로 인해 저리고 아픈 병)를 낫게 한다. 또한 한랭 기운을 없애며 귀주, 고독(蠱毒)을 낫게 하며, 벌레 독이나 생선 독을 없애며 치통을 멈추고 성기능을 높이며 음낭에서 땀나는 것을 멈춘다. 허리와 무릎을 덥게 하며 오줌횟수를 줄이고 기를 내려가게 한다”고 적고 있다. 


초피는 어디에서나 잘 자라는 식물이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수요가 많지 않은 편이다 보니 주로 수출된다고 한다. 초피 산지는 지리산 일대가 가장 유명하며, 열매가 열리는 8~9월경이면 산청, 함양, 남원 등에서 흔히 볼 수 있다. 다만 나무에 가시가 달려 있는 데다 열매 자체도 작다 보니 채취 작업이 만만치 않다. 초가을 햇볕에 반나절 이상 말리면 열매가 갈라져 까만 씨가 드러난다.  


우리나라에서 생산되는 초피는 중국 화자오에 비해 신맛이 조금 더 강하다. 중국인들이 신맛이 적은 화자오를 주로 사용하는 반면 일본인들은 이 산미를 선호해 국내에서 사 가는 일이 많다. 일본에서 ‘산쇼’라고 불리는 초피는 그 활용도가 매우 넓은 편이다. 여러 가지 음식에 후추 대용으로 사용하는가 하면 어느 식당에나 기본양념으로 놓여 있는 시치미(7가지 향신료를 섞은 일본식 양념)에도 초피가 들어간다. 


장어 양념구이에도 곁들이며 초피 껍질을 굵은 소금과 함께 빻아서 튀김에 찍어 먹으면 색다른 맛이 난다. 열매 뿐 아니라 어린잎도 ‘키노메’라는 이름으로 식용하는데 일본식 회덮밥인 치라시 스시를 비롯해 국이나 생선구이 같은 각종 요리에 올리면 시각적으로도 돋보이고, 상쾌하면서 톡 쏘는 향이 식욕을 돋운다.   


초피는 한때 고추의 역할을 대신했을 뿐 아니라 특유의 풍미와 몸에 이로운 각종 성분들로 우리 선조들의 식생활에서 적지 않은 비중을 차지했다. 이렇게 다채로운 개성을 가진 식재료인 초피가 오늘날 우리나라 일부 지역에서만 제한적으로 활용되고 있는 것은 다소 아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최근 들어서는 어린잎이나 열매를 이용해 장아찌를 담그는 등의 레시피가 알려지고 있지만 여전히 대중적이지는 못하다. 


그리고 아이러니하게도, 초피를 접하지 못하고 자란 세대들은 몇 백 년 이상 이어져 온 우리 토종 식재료를 중국이나 일본을 연상케 하는 이국적인 향신료로 인식하고 있다. 지금이라도 전통 레시피를 되살려 ‘우리 초피’의 진정한 맛을 알리려는 노력이 뒤따라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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