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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ejin Jeung Nov 04. 2019

용궁에 정착한 토끼...군소 이야기

몇 년 전 tvN ‘삼시세끼 어촌편’에서는 조금 낯선 바다생물 하나가 등장해 시청자들의 눈길을 끌었다. 바로 바다 달팽이라고도 불리는 연체동물 ‘군소’다. 필자는 어린시절 외가가 있던 동해안 망상 해수욕장에서 처음으로 군소를 만났다.


동갑내기 사촌이 잡아 온 물컹한 이 생물은 움찔거리는 모습이 뭔가 징그럽게 느껴졌다. 게다가 이 녀석은 묘한 빛깔의 액체까지 내뿜는데, 보라색 액체를 보자 사촌은 “이거 먹을 수 있는 거다”라고 자랑스럽게 말했다. 어렴풋이 기억하기로, 그 기묘한 바다생물은 푹 삶겨져 집안 어른들의 입 속으로 들어갔다. 남성의 정력에 좋다는 속설이 있다는 걸 알게 된 것은 한참 후에 일이다. 


연체동물문 복족강 군소목 군소과에 속하는 군소는 분류상 복족류에 속하지만 단단한 껍질은 갖고 있지 않아 마치 민달팽이를 연상시킨다. 몸 빛깔은 지역이나 환경에 따라 각기 다르며, 우리나라에 서식하는 종류는 대부분 진갈색 바탕에 흰 점 무늬를 갖고 있다. 영어로는 ‘Sea hare’, 즉 '바다의 토끼'라고 불린다. 군소의 머리에 있는 더듬이가 마치 토끼의 귀와 닮아 이런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수심이 얕은 바다에서 해초를 뜯어 먹고 사는 모습을 보면 더욱 토끼와 비슷해 보인다. 


그 때문인지 어촌에서는 군소를 가리켜 별주부전의 토끼가 바다 속에 자리 잡은 것이라는 재미있는 전설도 있다.  용왕의 병을 고치기 위해 토끼 간을 구하러 온 자라는 감언이설로 토끼를 용궁까지 데려온다. 이에 기지를 발휘한 토끼가 간을 육지에 두고 왔다는 핑계를 대고 무사히 돌아왔다는 별주부전의 이야기는 잘 알려져 있다. 그런데 일부 어촌 마을에 구전되는 설에 따르면 자라의 집요한 추적 끝에 토끼는 결국 간을 빼주었고, 용궁에 눌러앉아 살게 됐다는 것이다. 


짝짓기를 빠르게 끝내는 토끼가 다산의 상징으로 불리는 것처럼 군소 역시 많은 자손을 퍼뜨리는 것으로 유명하다. 자웅동체인 군소는 두 마리가 서로 껴안아 교미를 하는데 한 달 사이에 낳는 알의 수가 무려 1억개에 이른다. 생식력이 매우 왕성하다 보니 짝짓기 모습을 연중 쉽게 볼 수 있으며 여러 마리가 줄줄이 붙어 연쇄 교미를 하기도 한다. 번식 활동은 1년 내내 이뤄지고, 특히 여름철인 6~7월 경에 가장 활발하다. 해조류 사이에 낳는 알은 노란색이나 주황색으로 마치 국수 가락을 연상시키는 모양이다. 


혹자는 군소의 어원을 ‘군수’에서 찾기도 한다. 전해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한 어촌에 부임한 군수가 어민들의 민생고를 듣기 위해 이들이 일하는 바닷가를 방문했다고 한다. 생업으로 미역을 채취하던 어민들은 미역 수확이 예년만 못하다며 “고놈의 군소 때문에 못 먹고 살겠다”고 푸념했다. 그런데 신임 군수는 이 ‘군소’를 ‘군수’로 잘못 알아듣고 그만 얼굴이 푸르락 불그락해졌다는 것이다. 


실제로 군소는 미역이나 다시마 등 해조류를 주식으로 삼기 때문에 군소가 많이 번식하는 해에는 해조류의 씨가 말라 버리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종류에 따라서는 200g에 불과한 개체 하나가 먹어 치우는 양이 1㎏를 넘기기도 한다. 하지만 어민들 입장에서는 각종 공물에 무거운 세금을 수탈해가는 군수가 오히려 해초를 먹어 치우는 군소보다 훨씬 얄미운 존재였을지도 모를 일이다. 군소라는 이름이 고혈을 빠는 탐관오리, 군수에게서 나왔다는 설은 그런 의미에서 설득력이 있다. 


군소는 천적에게 공격을 받거나 위험을 느끼면 색소를 내뿜는데, 보라색에 가까운 군청색 빛깔의 색소를 분비하는 종류가 식용이 가능하다. 묽고 흰 색소를 내뿜는 군소는 먹을 수 없다. 또 드문드문 있는 하얀 점의 색깔이 노르스름할수록 더욱 맛이 좋다고 한다. 서양에서는 군소가 내뿜는 색소를 채취해 보라색 염료로 사용했다는 기록도 있다. 쥘 베른의 소설 <해저 이만 리>에도 군소 체액을 이용한 염색 방법이 언급된다.

군소는 주로 남해안에서 식용하는데 수산시장에서도 취급하는 곳이 드물다 보니 대부분은 직접 잡아서 먹는다. 바다에서 물질을 하는 해녀들은 군소의 배를 가르고 색소를 완전히 빼낸 후 삶아서 건조시켜 판매하기도 한다. 군소의 내장과 알에는 독성이 있기 때문에 반드시 제거해야 식용할 수 있다. 


군소 내장과 알에 들어 있는 성분은 디아실헥사디실글리세롤과 아플리시아닌이라는 것이다. 군소 알의 지방 성분을 이루고 있는 디아실헥사디실글리세롤은 섭취했을 때 구토와 설사를 유발한다. 알과 내장에 존재하는 아폴리시아닌은 촉매 반응을 거쳐 과산화수소를 생성, 세포 손상을 일으킨다. 이들 두 성분은 가열을 해도 파괴되지 않는데다 간혹 알레르기 체질을 가진 사람의 경우, 제대로 손질을 했더라도 드물게 혈관 부종 등의 반응이 나타날 수 있으므로 주의하는 것이 좋다. 


삶을 때는 군소 자체에 수분이 많아 물을 내뿜기 때문에 물을 바닥이 찰랑거릴 정도의 소량만 넣는다. 다만 아예 넣지 않으면 식감이 다소 거칠어진다. 군소는 막 잡았을 때는 20~30cm에서 큰 것은 40cm까지도 있지만 내장을 제거하고 나면 절반 정도로 줄어들고, 삶고 나면 달걀과 비슷한 크기로 쪼그라든다. 


급격히 줄어든 양을 보면 왠지 속은 기분(?)이 들기도 하지만 초장이나 기름장에 찍어 먹으면 쌉싸름한 바다 맛에 쫀득하니 씹는 느낌이 좋아 문어보다 낫다는 사람들도 있다. 지나치게 삶으면 고무처럼 딱딱해지는데 요리하기 전에 식초를 뿌리면 이를 막을 수 있다. 호불호가 갈리는 맛이기는 해도, 남해안 일부 지역에서는 제사상에 올릴 만큼 별미로 꼽힌다. 다만 영양과잉이 오히려 문제인 요즘은 독성 위험과 창렬스러운 양을 감수해가며 굳이 먹을 필요가 있는지는 조금 의문이 든다. 


군소는 중국에서 상처나 염증을 치료하는 데에도 쓰인다. 또 그 신경망이 단순하고 신경세포가 매우 크기 때문에 신경 회로 연구에도 유용하다. 미국 컬럼비아 대학의 에릭 캔덜(Eric R. Kendel) 교수 등은 지난 2000년 군소를 통해 학습과 기억의 메커니즘을 밝혀내 노벨의학·생리학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이들의 연구는 파킨슨병 등 신경계 질병의 신약 개발의 발판을 놓은 것으로 평가된다. 

한편 어느 시인은 이 별나게 생긴 바다생물을 소재 삼아 시를 쓰기도 했다. 


사람들이

눈 깜짝할새 넘어가는 바위가

내게는 보랏빛 눈물 흘리며

일평생 가는 고갯길     

내 눈은 

청이 찾아

인당수 헤매는

심봉사의 지팡이     

끝내

서러움 토해내

엮어낸 노랜 실타래     

긴 숨     

짧은 걸음     

거룩한 歷程이여     

이상민, <군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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