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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ejin Jeung Jul 27. 2015

그 나물에 그 옥수수

옥수수가 들려주는 세계사

미국에 어학연수를 갔을 때, 우연히 도서관에서 체로키 인디언 설화집을 읽은 적이 있다. 해와 달, 하늘 등 자연에 대한 전설을 모은 책이었는데 그중 내 흥미를 끌었던 이야기가 바로 은하수가 생긴 이유에 대한 것이었다.


어느 인디언 마을에서 언젠가부터 식량으로 비축해 놓은 옥수수 가루가 아침이면 사라지는 일이 계속됐다. 마을 사람들은 고심 끝에 불침번을 서 가며 옥수수 자루를 지키기로 했다. 그날 보초를 서게 된 한 주민은 한밤중이 되자 '영혼의 개'가 하늘에서 내려와 옥수수가루를 입에 가득 문 채 달아나는 모습을 목격했고, 이를 마을 사람들에게 알렸다. 


마을 사람들은 이에 징과 북 같은 시끄러운 악기들을 마련해 영혼의 개를 기다렸다. 영혼의 개가 어김없이 옥수수가루를 훔치러 오자 그들은 악기들을 크게 울려 개를 쫓아낸다. 놀란 개는 입에 머금고 있던 옥수수가루를 하늘로 뿜으며 달아났고, 옥수수가루들은 하나하나 별이 되어 은하수가 이뤄졌다는 것이다. 


견우 직녀가 1년에 한번 눈물의 상봉을 한다는 우리 전설에 비하면 낭만도는 한참 떨어지는 이야기지만...이는 옥수수가 미 원주민들에게 얼마나 중요한 식량인지를 말해주고 있다. 그들에게 옥수수는 하늘의 별에 비유될 만큼 신성한 존재였던 것이다. 


지금도 아메리카 대륙에서 옥수수는 중요한 식량 자원으로 쓰인다. 밀이나 쌀처럼 도정이 번거롭지도 않고 가루로 이용하는 것 뿐 아니라 생으로 먹어도 되며 조리법도 다양하기 때문이다. 북미 지역(주로 남부이기는 하지만) 튀김을 할 때 옥수수 가루인 콘밀을 이용하며 남미의 주식에 가까운 토르티야는 바로 옥수수를 전병처럼 만든 빵이다. 


어디 그뿐인가. 멕시코에서는 썩은 옥수수까지도 식량으로 활용한다! 옥수수에 발생하는 깜부기균의 일종인 '위틀라코체'는 스프나 통조림으로 이용한다. 시커먼 색깔 때문에 보기엔 좀 거부감이 들지만 맛은 의외로 평범한 버섯 맛이라고 한다. 


콜룸버스에 의해 유럽으로, 아시아로 전파된 옥수수는 다양한 음식문화를 낳는다. 그러나 다른 영양소 없이 옥수수만을 장기간 섭취하면 니코틴산 결핍으로 인해 가정시간에 아마 들어봤을 ‘펠라그라’라는 질환에 걸리게 된다. 펠라그라는 피부에 홍반이 생기면서 신경장애와 위장장애를 일으킨다. 급성일 경우 사망하는 일도 적지 않다. 


오래 전부터 옥수수를 주식으로 삼아온 남미 원주민들은 옥수수를 석회에 담가 껍질을 제거해 니코틴산의 함량을 증가시키는 방법을 써왔지만 옥수수만을 가져가고 조리법은 가져가지 않은 유럽인들은 펠라그라 때문에 특히 하층민들이 큰 피해를 입었으며, 신대륙에서 온 옥수수는 곧 빈곤의 상징으로 불리게 된다. 


옥수수를 특히 많이 소비했던 지역은 북부 베네토 지방으로 옥수수 가루를 죽처럼 쑤어먹는 ‘폴렌타’를 많이 먹었다. 폴렌타의 맛은 거의 무미(無味)에 가까우며 우리나라의 ‘감자바위’, ‘보리문둥이‘처럼 지역드립에 쓰이기도 했다. 참고로 동화 피노키오의 제페토 할아버지는 노란 머리 때문에 폴렌타라는 별명을 가졌으며 아이들이 놀릴 때마다 뚜껑이 열릴 정도로 분노한다. 


하지만 최근 들어 폴렌타는 지역 별미로 각광받고 있으며 예전과는 대접이 달라졌다. 버터나 블루치즈를 얹기도 하고, 죽으로 만든 후 마치 누룽지 굽듯 구워 사이드 디쉬로 곁들이기도 한다. 맛과 향이 강하지 않기 때문에 어떤 재료와도 잘 어울리는 것이 강점이다. 


얼마 전 편의점에서 낱개로 포장된 샛노란 옥수수를 보고 반가운 마음에 얼른 하나 사먹었다. 스위트콘에도 쓰이는 그 단맛 옥수수였다. 언젠가부터 시중에 나오는 옥수수는 거의 대부분 찰옥수수가 차지하고 있다. 찰옥수수가 딱히 싫은 건 아니지만 기왕이면 다양한 종류를 맛보는 게 좋은 나로서는 이런 현상이 다소 불만이다. 


어디 그뿐인가. 감자는 80% 이상이 수미 품종이며 가공식품의 경우도 어느 한 제품이 인기를 끌면 다른 회사들도 죄다 유사품을 만들어낸다. 조금 오버일 수도 있으나 음식에서도 개성을 존중하기보다는 획일화를 강요하는 한국사회의 단면을 보게 되는 것이 씁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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