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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ejin Jeung Mar 18. 2020

역관과 상복 입은 여인(3)

일단 늦어서 죄송합니다...ㅠㅠ


“...그렇게 나는 다음날 아침 여인의 몸값을 기방 주인에게 지불하였소. 여인에게는 혹여 돈이 모자랄까 싶어 명에서 팔아 이문을 남기자고 가져온 인삼 한 고리짝도 내어 주었지... 막 행장을 꾸리고 떠나려던 차에 그 소저가 급히 나를 찾아온 것이 마지막 만남이었소.”     


한양에서 연경으로 떠나 명나라 황제를 배알하고 오기까지는 아무리 짧게 잡아도 한 해는 훌쩍 보내야 하는 일정이다. 그 긴 시간 동안 웃전들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으려면 하급 관리인 역관이나 군졸들에게 길을 지체하기란 사실상 어려운 일이었다. 그런 까닭에 순언도 혹여 남의 눈에 띌까 싶어 새벽에 급히 기방 객주를 불러 여인의 몸값을 대신 치른 후 서둘러 떠날 차비를 했다. 객주는 여인을 돌려보내고도 화대를 주고, 심지어 그녀에게 인삼까지 선물한 순언을 보며 뭔가 미심쩍어하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그 자신에게는 딱히 손해가 가는 일이 아닌지라 별다른 이야기 없이 거래는 이뤄졌다.  그리고 출발 직전, 상기된 얼굴의 여인이 다급히 달려왔다.    


"가시는 길에 시장하실까 하여 요깃거리를 준비했습니다. 약소하지만 받아 주십시오."


여인은 그의 손에 대나무 잎으로 싼 종쯔를 건네 주었다. 순언은 여인에게 가볍게 목례를 하고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갈 길을 갔다. 다리가 아파 잠시 쉴 때 꺼내 먹은 종쯔는 찹쌀에 오리알을 넣어 쫀득하고도 짭짤한 맛이 일품이었다. 

 

이처럼 순언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조금씩 취기가 올라 정체 모를 주모와 자연스레 대화를 주고받고 있었다. 주모는 그의 이야기에 적당히 장단을 맞춰 주며 술잔이 비면 술을 따라 주고, 안주가 바닥나니 주전부리를 내 오기를 반복했다.      


“결초보은이라는 말을 아시는지요?”

“...내 비록 서출의 몸이나 글을 아는 역관일세. 그 정도 뜻은 알고 있다네”

“남에게 베푼 것은 언젠가 돌아오게 마련이지요. 그러니 심려 마시고 오늘은 술 한 잔으로 시름을 잊어 보십시오. 아, 그리고 이 주먹밥은 드시다 목이 메일 수 있으니 천천히 드셔야 합니다.”    

 

여인은 베일 뒤로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순언은 겨우 술 한잔을 마셨을 뿐인데도 묘하게 정신이 가물가물해지며 졸음이 밀려왔다.     


서늘한 기운에 눈을 떠 보니 순언은 아까 그렇게 도망치려던 객잔 잠자리에 누워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꿈을 꿨나...’     


그는 이상한 느낌을 떨치려 한쪽 팔을 뻗었다가 벽 가까이서 이름 모를 낯선 나뭇가지와 조그마한 덩어리가 손에 잡히는 것을 알고 깜짝 놀랐다. 나뭇가지에서는 익숙한 향기가 풍겼다.     


‘이것이 말리화란 꽃이던가...’     


정신이 번쩍 든 그는 몸을 일으켜 침상 곁에 놓인 물건들을 확인했다. 새하얀 꽃이 핀 꽃가지와 대나무잎으로 싼 무언가가 눈에 들어왔다. 어젯밤이 꿈이 그저 선몽이 아닌 듯 해 조금은 두려워졌다.      


“잠이 깨셨는가, 갈 길이 머니 어서 차비를 서두르시게”

“예, 소인 곧 나갑니다요.”     


곁을 돌아보니 그를 지키던 군졸은 이미 자리에 없었다. 아마도 그가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었으리라.      


“소인 홍순언, 곧 출발할 준비가 되었습니다.”     


이번 여행길에 순언이 모시게 된 대제학 황정욱은 언짢은 표정으로 한참 동안 그를 노려보았다. 하기야 일이 실패하면 본인도 죽을 목숨이니 밝은 얼굴일수가 없다.      


‘주상께서는 이번 일이 실패하면 모두의 목을 베겠다 하셨지...’     


순언은 새삼 조선에서 출발할 때를 떠올리며 한숨을 지었다. 이들의 명나라행은 사실상 목숨을 건 도박이었다. 오랫동안 명에서는 조선 건국에 대한 기록을 잘못 적어 왔다. 고려 말인 공양왕 2년, 태조 이성계의 정적들이 명나라로 도망쳐 공양왕을 이성계의 인척이라고 거짓 이야기를 퍼뜨린 것이 그 시작이었다. 이들은 이성계가 고려 권신이면서 정적인 이인임의 후손이라 한데다, 명나라를 치려 한다는 말도 덧붙였다.      


이 때문에 명나라 <태조실록>과 <대명회전>에는 국왕의 선조에 대한 왜곡된 기록이 남게 됐다. 조선에서는 태조 대왕 때부터 이를 알고 정정해 달라는 주청을 여러 차례 올렸으나 명나라 왕실은 묵묵부답이었다. 더구나 종계변무 요청이 계속되자 명나라 대신들 일부는 무리한 요구를 하는 조선을 복속시켜야 한다는 이야기까지 나왔다.      


순언이 사신단에 동참하게 된 이유도 이 일이 사실상 죽음을 각오한 여정이기 때문이다. 어느 역관도 명 황실을 설득하는 위험한 길에 따르려 들지 않았다. 결국 사역원에서 한솥밥을 먹던 동기들은 옥에 갇혀 있던 순언을 방패막이로 내세웠다. 만에 하나 일이 성사된다면 그에게는 죄를 벗는 것은 물론 입신양명이 주어질 터였다. 하지만 지금으로서는 실패하고 죽은 목숨이 될 가능성이 훨씬 컸다.      


길고 고된 여정도 어느덧 끝이 보였다. 조선 사신 일행은 곧 연경을 코앞에 두고 발걸음을 재촉했다.      


‘이곳은 몇 년만에 와도 여전히 호화롭구만... 한때는 대국에서 태어나지 못한 내 처지를 원망한 일도 많았지...’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며 일행을 따르던 순언에게 어디선가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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