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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ejin Jeung Apr 02. 2020

우울한 사춘기의 부실한 밥상 이야기

아드리안 모올의 성장통을 떠올리며


최근까지도 영국요리 하면 ‘혀에 대한 테러’라고까지 불리며 세계적인 악명(?)을 떨치고 있었다. 이런 이미지가 예전에 비해 개선된 것은 제이미 올리버, 고든 램지 같은 스타 셰프가 등장하면서부터이다. 하지만 사람 사는 곳이 다 그렇듯, 영국 요리가 처음부터 부실했던 것은 아니었다고 한다. 각 지역별로 전통적인 레시피가 발달했고, ‘잉글리시 블랙퍼스트’ 하면 푸짐한 양으로 유명하다. 


영국 요리가 혹평을 받기 시작한 데는 산업혁명 이후 서민 경제의 어려움, 빅토리아 시대의 금욕적인 교육 방식 등 여러 이유가 작용했다. 특히 2차대전 이후에는 마거릿 대처 재임 시절 신자유주의 경제 정책이 음식문화 쇠퇴를 악화시킨 원인으로 지목되기도 한다. 스우 타운센드가 지은 ‘비밀일기’라는 소설을 보면 기업들의 줄도산, 실업자 속출 등 영국 경제의 암울했던 시절과 당시의 부실한 식생활이 생생하게 묘사된다. 


런던 근교 미들랜드에 사는 13세 소년 아드리안 모올이 겪는 사춘기의 방황을 담은 이 작품은 처음 읽을 때는 그저 웃기고 재미있다는 인상을 받는다. 문화권이 달라도 공감할 수 있는 청소년의 이야기를 담았기에 우리나라에서 한때 중고생 추천 도서로 선정되기도 했다. 그런데 실상을 알고 보면 ‘비밀일기’는 점잖은 어르신들이라면 ‘뜨악’할 정도로 신랄한 블랙 유머와 사회 풍자를 담고 있다. 풍자의 대상은 바로 대처리즘 시대에 이뤄졌던 각종 반서민적 정책들이다.  


주인공 아드리안은 그다지 넉넉하지 못한 집안 환경에 각자 애인을 둔 부모 밑에서 자랐다. 부모의 별거와 이혼, 재결합의 과정을 지켜보며 이 소년은 점점 세상을 냉소하게 된다. 그의 불우한 사춘기를 말해주는 소재로 등장하는 것이 작품 속 간간이 언급되는 각종 정크 푸드이다. 부모가 정성껏 차려주는 따뜻한 밥 대신 소년은 마스 초코바와 음료인 루코제이드를 달고 다닌다. 


마스는 미국의 유명 초콜릿, 캔디 브랜드로 국내에서는 ‘밀키웨이’라는 제품으로 잘 알려져 있다. 마스 초콜릿 바는 대체로 초콜릿 자체보다 누가와 캐러멜, 마시멜로 같은 충전물이 많이 들어간 것이 특징이다. 그야말로 칼로리 폭탄인 셈인데 아드리안은 충치가 생기고도 이 초콜릿을 찾다가 여자 친구 판도라에게 핀잔을 듣는다. 더구나 영국에서는 마스바에 밀가루 반죽을 입혀 튀겨먹는 ‘해괴한’ 레시피가 인터넷 등을 통해 알려졌으며, 이 아이템은 영국 요리를 조롱하는 이들의 대표적인 먹잇감이기도 하다.  


루코제이드는 원래 영국의 약사 윌리엄 오웬이 개발한 의료용 음료이다. 과거에는 감기 환자들이 주로 마셨다고 하나 요즘은 스포츠 음료로 인식되고 있다. 다만 이 음료에는 설탕과 카페인이 다량 함유돼 있어 청소년들에게 매우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친다.이런 식생활 때문인지 아드리안은 고작 중학생의 나이에 의치를 하게 됐으며 한술 더 떠 아드리안 아버지는 진짜 이가 하나도 없는 상태다.

 

없는 집 학생이 그나마 기댈 만한 수단이 학교 급식인데 설상가상, 학교 급식마저도 엉망이다. 고기나 채소 등 영양가 있는 재료들이 조금씩 빠지는데 이는 실제로 대처 집권 당시 예산 절감을 위해 이뤄졌던 일이다. 이를 두고 아드리안은 ‘데모 못하게 기운을 빼려는 모양’이라고 하는데 실상을 알게 되면 더욱 씁쓸했을 것이다. 

선데이 로스트와 각종 야채

영국의 부실한 학교 급식은 우리나라에도 ‘제이미의 스쿨푸드’라는 다큐 프로그램을 통해 알려진 바 있다. 감자튀김에 빵 정도가 고작인 학교 급식을 개혁하기 위해 제이미 올리버는 쌀과 닭고기, 채소 위주의 건강식을 도입하지만 아이들은 외면한다. 직접 교육부 장관을 만나 설득하기까지 했다고 하는데 방송 직후 잠깐 급식이 개선됐을 뿐 지금도 대다수 학생들은 정크푸드로 배를 채운다고. 


이 프로그램을 본 사람은 알겠지만 제이미 올리버가 만든 음식도 크림이나 치즈가 듬뿍 들어가 있는 등 우리 기준에서는 건강식으로 보기가 힘들다. 이런 식사까지 거부할 정도라니 한국 어린이들의 편식은 차라리 귀엽게(?)보이는 수준이다.  


한편 아드리안이 봉사를 하는 독거노인 버트 역시 식생활이 부실하기는 마찬가지여서, 먹는 음식이 비트 샌드위치와 인스턴트 카레 등 딱 4종류이다. 참고로 이 비트 샌드위치는 식빵에 얇게 자른 비트 한 조각을 넣은 것이 전부인 ‘심플한’ 레시피다. 이렇게 먹고도 100살이 넘게 산다는 것이 기적처럼 느껴진다.  


아드리안의 부모 세대도 다르지 않다. 아들이 모처럼 식빵 만들 재료를 비롯해 렌즈콩 등 몸에 좋은 음식들로 장을 봐왔는데, 아버지는 집에서 식사를 하는 대신 펍에 가서 셰퍼드 파이와 칩스 등으로 저녁을 때운다. 영국의 대표 메뉴로 꼽히는 셰퍼드 파이는 양치기들이 먹는다고 해서 이런 이름이 붙었으며 각종 채소를 넣고 볶은 양고기에 파이 반죽 대신 감자로 표면을 덮는다. 이 레시피는 밀가루가 충분하지 않던 시절 만들어졌다고 한다. 


피시 앤 칩스는 한국에서도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인데, 얇은 형태의 감자칩이 아니라 우리나라에서 ‘프렌치 프라이’로 불리는 기다랗게 자른 감자를 튀긴 것이다. 생선튀김은 거의 대부분 대구를 이용하며 튀김옷이 두꺼워 느끼한 편이다. 여기에 영국인들은 식초를 듬뿍 뿌려 먹는다고. 


그나마 소설 속에서 먹을 만한 음식을 찾자면 중국이나 인도 요리 등 외국식 메뉴가 대부분이다. 종종 아드리안은 중국 식당에서 간식거리를 사먹거나 이웃집에 사는 인도계 영국인 싱씨 집에서 커리와 차파티 등을 얻어 먹는다. 임신 중 생활고로 아들을 버리겠다고 선언한 아드리안 엄마가 간신히 받아낸 보조금으로 차린 저녁식사도 사프란 향신료를 얹은 닭고기 커리이다. 


일부 영국인들은 농담 삼아 식민지인 인도 음식이 영국의 식문화를 구제해 줬다고 할 정도로 영국에서 인도 음식은 우리나라의 중화요리집 만큼이나 흔하게 찾아볼 수 있다. 향신료를 듬뿍 쓴 인도식 커리는 영국에 와서 고기와 생크림 등이 든 스튜 같은 형태로 변형됐다. 닭고기로 만드는 치킨 티카의 경우 아예 영국 요리로 인식이 돼 있을 정도. 영국을 여행하는 한국인들도 음식이 입에 맞지 않는다면 현지의 인도 식당을 찾을 것을 권한다. 


소설의 후반부에서 가장 ‘안습’인 장면을 꼽자면 가출한 아드리안이 개와 함께 캐드버리 크림 달걀을 나눠 먹는 대목이다. 영국을 대표하는 초콜릿 브랜드 캐드버리사가 생산하는 이 제품은 아이러니하게도, 실제로 달걀을 사용하지는 않았다. 밀크 초콜릿 안에 크림으로 달걀의 흰자와 노른자를 흉내 낸 것. 신기한 모양 덕에 지금도 인기상품으로 불리며, 특히 부활절에 즐겨 먹는다고 하다. 


한국에 번역돼 나온 시리즈는 아드리안이 가출과 방황을 겪고 돌아와 자아를 찾아가고, 판도라와의 관계를 회복하는 데서 끝을 맺었다. 몇 년 전에야 이후 이야기가 완역판으로 출판됐는데 원작의 블랙 유머를 기억하는 사람들에게는 꽤나 우울한 결말이다. 


간략히 이야기하면 아드리안은 대학 입시에 실패하고 옥스퍼드 의대에 합격한 판도라는 다른 남자와 결혼한다. 청, 장년기를 맞은 아드리안은 그의 부모가 그러했듯 별다른 희망이 보이지 않는 평범한 삶을 살아간다. 작가가 현실을 있는 그대로 묘사하려 한 듯 하지만 성장한 아드리안의 방황은 그의 사춘기 시절 부실한 식탁만큼이나 씁쓸함을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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