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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ejin Jeung Apr 05. 2020

'선택'의 그녀는 현모양처였을까?

동아시아 최초의 여성 조리서 ‘음식디미방’ 이야기

오래 전 드라마 ‘대장금’의 음식 자문을 맡았던 궁중음식 전문가 한복려 선생은 “의상이나 미술작품과 달리 음식은 그 형태가 남아 있는 것이 없어 복원에 어려움이 따른다”고 토로한 바 있다. 


실제로 우리가 알고 있는 궁중음식도 대부분 구한말 요릿집에서 만들어지던 것들이며, 같은 채소나 고기를 쓰더라도 몇 백 년 전의 재료와 지금의 재료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고 한다.  드라마 제작진은 그나마 중중 시대의 기록과 가장 가까운 음식을 복원해 내는 데 애썼다고 하는데, 그 바탕이 된 자료 중 하나가 바로 1670년대경 저술된 것으로 추정되는 안동 장씨 정부인 장계향의 ‘음식디미방’이다.  


이 책은 경북 영양군에 소재한 재령 이씨 가문의 서고에서 발견됐으며, 전 경북대학교 교수 김사엽 박사의 논문집을 통해 학계에 소개됐다. 표지에는 한자로 '규곤시의방(閨壼是議方)' 이라 적혀 있고 그 내용 첫머리에 '음식디미방(飮食知味方)'이라는 표기가 있다. 학자들은 이를 두고 장씨 부인이 직접 지은 제목이 ‘음식디미방’이며 ‘규곤시의방’이라는 이름은 남편이나 후대자손들이 붙인 것으로 추정한다. ‘음식의 맛을 아는 방법'이라는 의미의 음식디미방은 장계향이 75세때 며느리와 딸들에게 음식 조리법을 물려주기 위해 썼다고 한다. 


이전에도 음식에 관한 책들은 다수 있었으나 대부분 남성들이 한문으로 지은 것이었다. 이 책은 순 한글로 저술됐다는 점, 또 동아시아에서 최초로 여성이 저술한 요리책이라는 데서 그 가치가 더욱 높다. 또한 중국의 조리서를 참조한 이전의 책들과는 달리 예부터 전해 내려오거나 저자 스스로가 개발한 조리법들이 수록됐다는 것도 특징이다. 음식디미방이 하나의 사료로서 갖는 가치는 조선 시대 상류층 사람들이 어떤 음식을 먹고 살았는지에 대해 상세하게 기술돼 있다는 점이다. 


음식디미방에는 국수와 밀가루 음식이 18가지, 어류나 고기류 음식이 44가지, 술, 한과, 식초 등의 종류 54가지까지 합치면 총 146가지의 음식이 기록돼 있다. 또한 이 책에서는 조선 중기 조리기술의 수준을 엿볼 수 있는데, 식품학자들의 분석에 따르면 그 내용이 매우 과학적이고 일목요연하다고 한다. 가령 강정을 비롯한 건정류 조리법의 경우 막걸리로 찹쌀가루를 발효시키고 열로 부풀리며, 형태를 만들어내는 과정을 상세히 묘사했다. 


오늘날 중식의 대표적인 조리법으로 알려진 전분도 등장한다. 동아나 대구껍질로 만든 ‘누르미’라는 음식은 마지막 단계에서 전분물을 끼얹는 것이 탕수육이나 유산슬의 마무리 기법과 거의 유사하다. 생치즙, 동아즙 같은 즙액을 서양식 소스처럼 활용하는 조리법도 있다. 말하자면 음식디미방은 지금의 요리책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는 다양한 레시피를 소개하고 있는 셈이다.  


음식디미방 속 조선 중기 음식의 가장 큰 특징을 들자면 고추나 고춧가루가 전혀 들어가지 않다는 것이다. 오늘날 고추가 빠지지 않는 한국인의 식탁과 비교하자면 상당히 이질적인 느낌이 들게 된다. 임진왜란 때 전래됐다고 알려진 고추는 문헌상으로는 1613년 이수광의 ‘지봉유설(芝峰類說)’에 처음으로 등장한다. 고추가 본격적으로 김치 조리에 이용되기 시작한 기록은 1766년 ‘증보산림경제’에서 찾아볼 수 있다. 


따라서 그 당시에는 장씨 부인이 살던 경북 지역까지는 고추가 전파되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 고추를 대신하는 양념으로는 ‘산초’라고도 불리는 천초, 후추, 마늘, 파가 주로 사용되며 지금의 레시피에 비하면 담백하고 슴슴한 맛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육류 요리에 쓰이는 동물의 종류도 지금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 음식디미방에 자주 등장하는 고기 재료는 꿩고기와 쇠고기, 개고기 등이다. 꿩고기의 경우 껍질과 뼈는 남겨두고 살코기만 발라내 잘게 다진 후 양념 다시 껍질 속에 채우고 찌거나 굽는 봉총찜이 있다. 쇠고기 요리로는 양념해 구운 고기를 찬물에 담가 수축시킨 후 다시 굽는 설야적이 대표적이다. 오늘날과는 달리 돼지고기가 아닌 개고기로 순대를 만드는 것도 차이점이라 할 수 있다. 개고기를 내장까지 다양한 요리에 활용하는 것으로 볼 때 당시 개의 식용이 보편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음식디미방에는 특이하게도 곰발바닥 요리도 찾아볼 수 있다. 폭군 연산군이 곰발바닥, ‘웅장’을 즐겼다는 기록이 있는 것을 보면, 곰발바닥은 서민적인 음식까지는 아니더라도 희귀한 정도는 아니었을 듯 하다. 곰발바닥 조리법을 보면 “석회를 넣어 끓인 물에 (곰 발바닥을 잠간) 담가 털을 뽑아 없앤 후, 깨끗이 씻고 간을 쳐서 하룻밤을 재어 두어라. (이튿날 물이) 매우 솟구치도록 충분히 끓인 후 (아궁이의) 불을 반으로 줄이고 약한 불로 다시 무르도록 고아 쓰라. 곰 발바닥이 다 힘줄로 된 것이니, 다른 고기와 (같이) 하면 무르게 하기가 쉽지 않다. 곰 발바닥을 소발(牛足) 그을리듯이 불을 많이 때고 그을리면 털이 다 타고 발바닥 가죽이 들뜨게 된다. (들뜬 가죽을) 벗겨 버리고 깨끗이 씻어 무르게 고아 조각으로 잘라서도 쓴다. 발가락 사이를 칼로 긁어 째고 간장 기름을 발라 구우면 더 좋다”라며 자세히 묘사하고 있다. 


그밖에 주로 쓰였던 재료들을 보면 곡물 종류로는 메밀이나 녹두, 밀가루가 있으며 채소류는 무, 외, 골파, 순무, 동아, 순채, 쑥, 연근, 가지, 도라지, 거여목, 냉이, 미나리, 고사리, 시금치, 박고지, 두릅, 녹두나물, 표고, 석이, 염교, 송이 등이 나온다. 과실류로는 잣과 머루, 어패류는 붕어, 해삼, 모시조개, 가막조개, 자라, 대구(대구껍질), 대합, 숭어, 천어, 청어를 찾아볼 수 있다. 오늘날 흔히 쓰이지 않는 재료들로는 앵두나무, 뽕나무, 살구씨, 갈잎, 뽕나무잎, 맨드라미, 돌회 등이 음식디미방에 등장한다. 


전반적으로 보면 게살을 완전히 발라 내어 껍데기에 도로 채워 넣는 등 손이 많이 가는 음식이 많아 고급스러운 상류층의 입맛을 반영했음을 알 수 있다. 또 책의 상당부분을 술에 할애하고 있는 것으로 미뤄 제사 등에 쓰이는 가양주(家釀酒)의 중요성이 컸다는 점도 짐작하게 한다. 경북대학교 도서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음식디미방’ 원본을 보면 저자 장계향은 끝머리에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이 책은 매우 눈이 어두운데 간신히 썼으니 그 뜻을 잘 알아서 그대로 시행하고, 딸자식들은 각각 베껴 가되 이 책 가져 갈 생각은 하지 말고 부디 상하지 않게 간수해서 훼손하지 말라.”


이 말은 얼핏 생각하면 딸들이 책을 가져갈까 우려하는 것으로도 볼 수 있으나, 그보다는 딸들이 각각 책을 꼭 베껴가 그 조리법을 오랫동안 지켜 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해석하는 이들이 많다.  오늘날 전통 음식 하면 ‘~~씨 종가’라는 식으로 부계 가문의 혈통을 중시하고 있다. 그러나 실제로는 친정어머니를 통한 모계전수도 드물지 않았다는 게 학자들의 해석이다. 음식디미방만 봐도 각 조리법의 명칭 뒤에 '맛 질 방문'이라는 표현이 붙은 것들이 16종이나 나온다. ‘맛 질’이란 장씨 부인의 어머니인 권씨가 살았던 경북 예천이며, ‘맛 질 방문’이란 장씨 부인의 친정어머니인 권씨로부터 전수받은 조리법이라는 의미다. 


그런가 하면 이 책의 뒤편에는 장씨 부인이 직접 쓴 한시가 적혀 있어 그가 빼어난 문장력과 학식을 지녔음을 짐작하게 한다.      


시집온 지 삼일 만에 부엌에 들어

손을 씻고 국을 끓이지만,

아직 시어머니의 식성을 몰라

어린 소녀를 보내어 먼저 맛보게 하네.     


실제로도 저자인 장계향은 시서화에 능했으며 재령 이씨 가문에 시집와 7남을 모두 훌륭한 학자로 키운 ‘능력자’였다고 한다. 대문 밖에 큰 솥을 걸고 죽을 쒀 300명이나 되는 걸인들을 먹일만큼 마음도 넉넉했다고. 그의 후손이기도 한 이문열은 <선택>이라는 소설을 통해 “현모양처도 하나의 선택지”라며 요즘 여성들이 이기적이라고 질타한 바 있다. 그러나 동아시아 여성으로서는 최초로 과학적 조리법을 스스로 저술해 남겼다는 점을 볼 때 장계향에게 현모양처의 프레임을 씌우는 것은 다소 무리한 시각으로 보인다. 


오히려 그에게는 여성이 책을 남긴다는 것을 금기시한 가부장 사회에 도전한 혁명가적 면모가 보인다. 이런 공덕을 높이 평가한 재령 이씨 문중은 300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여성으로서는 이례적으로 장계향의 ‘불천위(不遷位) 제례'를 지내고 있다. 우리나라 음식사의 귀중한 문화재이면서 조선시대 한 진취적인 여인의 결실이기도 한 ‘음식디미방’은 현재 경상북도에서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를 추진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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