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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ejin Jeung Mar 28. 2020

19세기 미국판 삼시세끼 스토리

로라 잉걸스 와일더의 초원의 집


’      

tvN의 리얼리티 예능 ‘삼시세끼’ 시리즈가 꾸준히 인기를 모으고 있는 이유는 무엇보다 자연에 대한 사람들의 향수를 자극했기 때문일 것이다. 특히 마트나 슈퍼마켓에서 완제품을 사먹는 데 익숙한 현대인들에게 자연에서 직접 식재료를 얻는 과정은 신기함을 넘어 경이롭게까지 느껴진다. 그런데 이런 낭만 때문이 아니라 생존을 위해서 자연을 개척해 먹거리를 찾아내야 했던 시절이 불과 100여년 전 미국에서도 있었다.


로라 잉걸스 와일더의 자전적 소설이면서 80년대 미드 시리즈로도 잘 알려진 ‘초원의 집’을 보면 서부개척시대 미국인들이 거친 자연과 싸워가며 음식을 얻어가는 고군분투가 펼쳐진다. 그런데 이들이 자연에서 얻는 음식들은 풀뿌리며 나무껍질로 연명하던 농경민족의 구황작물보다는 한층 더 호화스러워 보인다. 아무래도 사냥문화가 발달하고 고기가 흔한 지역이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19세기말 위스콘신주에 살던 잉걸스 가족은 작은 통나무집을 짓고 말 그대로 식량을 자급자족하며 살아간다. 이 책에 가장 먼저 등장하는 음식은 아버지가 갓 사냥해 온 신선한 사슴고기이다. 레시피가  어떤 것인지는 묘사되지 않지만 아마 선도가 좋은 고기였던 만큼 소금 후추 정도로 간단하게 양념해 구워 먹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사냥해 온 고기가 남으면 가족들은 이를 겨우내 비축해 두기 위해 훈제고기로 만든다. 요즘도 훈제 재료로 인기가 있는 히코리나무로 연기를 피우고, 빈 나무 등걸에 작은 문까지 내면서 스모커를 만드는 로라 아빠의 솜씨를 보면 그저 감탄이 나온다.


부지런히 움직이는 부모님 덕에 로라네 다락방은 겨울을 날 푸짐한 먹거리로 가득하다. 직접 가꿔 수확한 감자와 당근, 순무, 양배추, 양파가 가득 쌓여 있고, 붉은 고추와 호박은 마치 크리스마스 장식처럼 풍성한 분위기를 더해준다. 육고기 뿐 만 아니라 연못에서 잡아 소금에 절인 송어도 훌륭한 월동준비 식품이 된다.  


겨울이 다가오면 로라네 가족은 큼직한 돼지 한 마리를 통째로 잡아 역시 월동준비 식량으로 보존한다. 알뜰한 엄마는 돼지 지방으로 라드를 만들고 부스러기 살점까지 긁어모아 소시지 재료로 쓴다. 당장 먹지 않을 돼지고기는 훈제해 햄, 베이컨으로 만들고 삶은 머리 고기는 잘게 다져 소금 후추와 향신료를 뿌린 후 육수를 부어 서서히 식혀 마치 우리나라 족편 같은 편육을 만든다. 소시지를 만들때는 부스러기 살점과 비계에 소금 후추, 세이지를 넣고 반죽한다.

우리에게 다소 낮선 식재료가 돼지 비계를 녹여 만든 라드이다. 한때는 중국집에서 빠질 수 없는 재료였지만 기름이 하얗게 엉겨 하수구를 막는데다 동물성 기름은 몸에 좋지 않다는 인식 때문에 자취를 감췄었다. 종종 어르신들이 짜장면 맛이 예전만 못하다고 하는 이유는 라드를 식물성 유지로 바꿨기 때문이다. 다만 최근에는 동물성 기름에 대한 기피 현상이 다소 줄어들면서 맛을 위해 라드를 쓰는 집들이 늘고 있다. 또한 라드의 주성분은 불포화 지방이어서 오히려 건강에는 식물성 기름보다 낫다고 한다. 


아마도 독자들의 마음을 가장 사로잡았을 장면 하나는 로라 엄마가 커다란 단지에 우유를 넣고 저어 버터를 만드는 장면일 것이다. 시판되는 우유는 보통 살균과 함께 균질화 과정을 거치는데 소에서 갓 짠 원유는 서늘한 곳에 두면 크림층이 위로 뜬다. 이 크림을 저으면 버터 알갱이가 막대에 달라붙기 시작한다. 지금이야 원심분리기나 교반기가 있지만 그 시절에 버터 만들기는 말 그대로 중노동이었을 것이다. 버터를 만들고 난 우유를 버터우유라고 하는데 쉽게 말하면 지방이 빠진 탈지유라고 할 수 있으며, 팬케이크나 비스켓을 만들 때 첨가하면 풍미를 더해준다. 음식의 맛 뿐 아니라 모양새도 중요시하는 엄마는 겨울 버터는 하얀색이어서 색이 예쁘지 않다며 당근즙으로 버터를 물들이고, 딸기 무늬가 있는 예쁜 틀에 찍어낸다. 


로라네 가족이 즐기는 크리스마스 만찬 장면을 보면 그야말로 예술의 경지에 오른 엄마의 음식 솜씨가 묘사된다. 달걀과 우유, 밀가루를 섞은 호밀빵과 스웨덴식 크래커, 소금에 절인 돼지고기와 시럽을 넣은 콩 냄비요리, 새콤한 파이와 말린 사과 파이, 쿠키 등이 상에 오른다. 달콤한 사탕도 어린이들에게는 최고의 크리스마스 선물이다. 메이플 시럽이나 당밀을 눈 위에 부어서 굳힌 사탕이며 빨간색과 하얀색 줄무늬가 있는 박하사탕, 옥수수 푸딩에 메이플 시럽을 얹어 먹는 디저트도 있다. 엄마는 크리스마스 하면 떠오르는 생강 빵 대신 인형 모양 팬케이크를 아이들에게 준다. 


크리스마스는 서양에서 가장 큰 명절인 만큼 이 책에서 많은 비중을 차지한다. ‘실버레이크 호숫가’에서 엄마는 소금에 절인 돼지고기를 양념 삼아 어느 때보다 맛있는 메뉴들을 만들고, 이웃의 보스트 씨 부부는 귀한 굴 수프와 굴 크래커를 보답으로 대접한다. 가족이 드 스메트에 살고 있을 때, 식량 공급이 끊긴 상황에서도 크리스마스 메뉴를 만들어내는 로라 엄마의 모습을 보면 그저 감탄이 나온다. 


다만 후반부로 갈수록 로라 가족의 가난이 현실적으로 묘사되며 당시 개척민들의 어려운 현실을 접할 수 있다. 이들 가족은 밀가루 빵보다는 옥수수 빵을 주로 먹으며, 농사를 망친 찌르레기를 파이로 구워 ‘재활용’한다. 크리스마스 때 칠면조를 구하지 못할 때가 많았던 이들 가족은 산토끼로 이를 대신하는 일이 태반이다. 


작가의 자전적 이야기를 다룬 만큼 어두운 내용들도 상당부분 등장한다. 예쁜 금발 소녀였던 장녀 메리는 성홍열로 시력을 잃고, 동생인 로라가 어린 나이로 교사가 되어 언니를 맹인학교에 보내는 데 뒷바라지를 한다. 로라 가족은 자연 재해와 야생동물 등의 위협으로 어려움을 겪는가 하면, 아버지 찰스는 농사짓는 일이 여의치 않자 철도 공장의 임노동자로 힘겹게 가족을 부양하기도 한다. 


그러나 작품 전체로 본다면 이런 고난들은 로라 일가의 가족애를 더욱 두텁게 하며, 주인공 로라가 강인한 여성으로 성장하는 데 뒷받침이 되어 주는 장치로도 볼 수 있다. 시대가 시대이다 보니 흑인이나 미 원주민들이 부정적으로 그려지기도 하지만, 어린 소녀의 눈을 통해서인지 당시로서는 상당히 호의적인 묘사도 많다. 


특히 눈길을 끄는 대목은 ‘호미니’라고 불리는 껍질 벗긴 옥수수를 만드는 과정이다. 로라 엄마는 잿물에 옥수수를 삶고는 이를 빨래판에 비벼 껍질을 벗겨내는데 이 방법은 미 원주민들이 옥수수를 처리하는 전통 방식이다. 옥수수만을 오래 먹다 보면 니아신 등이 부족해 펠리그라에 걸리기 쉬운데 석회수나 잿물에 삶으면 이들 성분이 소화흡수할 수 있는 형태로 바뀐다. 먼 유럽에서 이민 온 백인들은 모든 것이 낯선 아메리카에 적응하기 위해 좋든 싫든 이들의 생활양식을 보고 배울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초원의 집’ 시리즈 후반부를 보면 교사가 되어 가계를 돕고, 알만조라는 멋진 청년과 결혼해 가정을 이루는 로라의 이야기가 묘사된다. 그러나 이 부분에 와서 밝고 긍정적이던 작품의 분위기가 급격히 어두워지는데, 이는 집필 당시 남편인 알만조가 사망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또 현재 잉걸스 가족의 후손 중 생존해 있는 사람은 안타깝게도 한 명도 없다. 그러나 험난한 자연과 맞서면서도 끈끈한 가족애를 지켜간 이들의 이야기는 지금도 많은 이들에게 감동을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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