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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ejin Jeung May 15. 2020

옛 귀부인들의 티타임, 다과상

서양식 티파티 못지않은 정성과 화려함


최근 몇 년 전부터 여성들 사이에서 인기를 끌고 있는 간식으로 ‘애프터눈 티세트’라는 것이 있다. 3단으로 된 쟁반에 케이크와 스콘, 샌드위치 등을 담고 홍차와 곁들여 나오는 이 메뉴는 빅토리아 시대 영국 귀부인들이 즐기던 것이라고 한다. 값비싼 기호품이었던 홍차와 설탕, 아기자기한 도자기가 어우러진 이들의 티타임은 호화로움의 극치였을 것이다. 

우리나라의 옛 귀부인들도 이들 못지않은 세련된 차 문화를 향유해 왔다. 불가에서 기원한 다과상이 바로 그것이다. 한반도에 차가 들어온 것은 삼국시대로 추정되는데, 인도 출신의 허황옥 황후가 최초의 전파자라는 이야기도 있지만 실제로는 중국과의 교역을 통해 전해졌다는 게 정설로 받아들여진다. 


다도가 우리나라에서 화려하게 꽃핀 시기는 불교 왕국이었던 고려 때였다. 고려시대에는 불교 사상이 민간 생활에 깊이 침투돼 있어 대다수의 사람들은 육식 대신 차와 과자를 즐겼다. 차 재배 역시 사원을 중심으로 이뤄졌다고 한다. 명절 때 지내는 차례와 ‘일상다반사’라는 단어의 유래 역시 차 문화에서 비롯됐다. 


맛이 다소 씁쓸한 차는 그냥 먹기보다는 과자를 곁들이는 경우가 많다. 일본인들이 쓰디쓴 말차를 마시고 단맛이 강한 화과자를 먹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여럿이 모인 자리에 차와 과자가 있는 다과상을 차리면 자연스럽게 분위기가 부드러워지며 대화의 꽃이 피게 마련이다. 


과자에 대한 옛 문헌 중 중국에서 6세기경 쓰인 <제민요술>을 보면 오늘날 약과나 매작과, 타래과, 산자 등의 원형으로 여겨지는 것들을 찾아볼 수 있다. 또 <삼국유사> 가락국기 수로왕조에는 제사에 쓰이는 제수용품의 하나인 과(果)라는 단어가 등장하며 서기 683년 신문왕이 왕비를 맞을 때 폐백품목에 쌀과 술, 장, 꿀, 기름 등이 언급되는 것을 보면 과자류가 이때에도 만들어졌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 중에서도 고려 시대에 특히 발달한 과자로는 유밀과가 있다. 우리 역사상 가장 사치스러운 과자류로 분류되는 유밀과는 밀가루를 주재료로 꿀과 기름을 이용해 반죽해서 이를 튀겨내 다시 물엿이나 꿀로 즙청하는 과정을 거친다. 오늘날 전해지는 유밀과는 약과를 비롯해 다식과, 연약과, 만두과, 박계, 매작과 등 종류도 다양하다. 


불교 행사인 연등회와 팔관회 등에 유밀과는 빠질 수 없는 음식이었으며 왕족이나 귀족 집안, 사원 등에서 많이 만들었다. 고려 유밀과의 명성은 중국에까지 퍼져 원나라 간섭기인 충렬왕 때 고려병이라는 이름으로 유행했고, 몽골에는 지금도 유밀과의 영향을 받은 과자가 있다고 한다. 그런가 하면 고려가요 <쌍화점>에 나오는 ‘쌍화’가 사실은 만두가 아닌 중동에서 전해진 디저트의 일종이었다는 설도 있다. 


다만 유밀과는 곡물과 꿀, 기름이 아낌없이 들어가다 보니 물가 상승의 원인이 되었고 서민들이 식량 부족까지 겪으면서 자주 금지령이 내려졌다. <고려사>형법 강령에 의하면 명종 22년과 공민왕 2년 등에 유밀과 대신 과일을 이용하도록 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이런 사치스러움 때문인지 조선 시대에 와서는 다과상 자체는 그대로 남았지만 그 상차림은 예전에 비해 상당히 소박해졌다. 불교가 억압을 받으면서 사원을 중심으로 하던 차 재배 역시 쇠퇴했다. 조선 시대 사람들은 찻잎을 대신해 계피나 유자, 모과, 구기자 등 약재나 흔하게 구할 수 있는 식물로 마실 것을 대접하기 시작한다. 여름철 차갑게 마시는 식혜와 수정과, 화채 같은 음청류가 발달한 것도 이 시기이다. 


계절감을 살린 음청류로는 진달래 화채, 앵두화채, 배 화채 등을 예로 들 수 있다. 그밖에도 녹말가루 반죽을 가늘게 썰어 국수처럼 만든 책면, 떡이나 데친 보리알을 넣은 각종 수단, 꿀물에 송홧가루를 푼 송화밀수 등 그 종류만 해도 무궁무진하다. 


조선 시대 술과 안주를 차린 주안상이 남자들의 문화였다면, 차와 과자를 내는 다과상은 여성들의 사교 문화라 할 수 있다. 여성들이 그 주체인 만큼 아기자기하면서 정성이 들어간 것이 다과상의 특징이다. 기본적으로는 떡과 조과류, 생과류에 차가운 음청류와 더운 차를 마련하는데 그 종류와 가짓수는 형편에 따라 알맞게 조절했다고 한다. 다과상은 그 집안의 가풍이나 법도, 안주인의 솜씨를 가늠하는 척도가 되기도 했다. 


간단하게는 마실 것과 함께 과일류를 대접하는데 생률, 곶감, 대추, 잣, 호두, 유자 배 등이 가장 흔하게 상에 올랐다. 과자 종류는 각종 편(片)류를 비롯해 정과, 약과, 산자, 강정, 다식 등 대부분 집에서 손수 만든 것들로 손님이 올 때를 대비해 미리 준비해 두었다고 한다. 


비교적 간단하게 만들 수 있는 과자로는 다식이 있다. 다식은 차 문화와 함께 발달한 한과로 밤가루, 송홧가루, 콩가루, 녹말가루, 흑임자가루, 쌀가루 등 날로 먹을 수 있는 가루를 꿀에 반죽해 무늬가 새겨진 다식판에 박아내 만든다. 승검초, 생강, 용안육 등을 이용한 다식도 있는데 색깔 뿐 아니라 맛이 다양해 다과상 위에서 특히 돋보이는 존재이다. 꿀로 반죽해 단맛이 꽤 강한 편이지만 쌉쌀한 차와 잘 어울리며, 제대로 만든 다식을 맛보면 입에 넣는 순간 사르르 녹아내리는 풍미를 느낄 수 있다. 


요즘 사람들에게 조금 생소한 과자류를 꼽자면 젤리와 비슷한 과편이 대표적이다. 각종 과일을 삶아 거른 즙에 녹말가루를 섞거나 설탕, 꿀을 넣어 조려 엉기게 만든 후 그릇에 쏟아 식혀서 썰어낸 것이다. 과편 재료로는 앵두, 살구, 오미자, 포도, 머루, 산딸기, 산사 등 새콤한 과일류가 많이 쓰인다. 


이보다 조금 더 많이 가는 한과류가 숙실과와 정과이다.  밤이나 대추, 생강 등을 엿이나 꿀과 함께 약불에 조린 다음 본래의 모양으로 다시 살린 율란, 조란, 생란이 숙실과에 해당한다. 정과는 살구, 연근, 수삼 등 다양한 재료가 사용되며 역시 물엿, 꿀에 오래 조려내 시간과 정성이 많이 소요된다.


전통 음료와 과자로 구성된 우리 다과상은 이처럼 서양식 티파티 못지않게 다채롭지만, 요즘에 와서는 의외로 제대로 된 맛을 재현하는 곳이 드물다. 젊은 세대의 취향에 맞으면서도 전통 방식을 살릴 수 있는 아이디어가 아쉬운 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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