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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ejin Jeung May 19. 2020

레미:집없는 아이..그리고 크레이프

달콤한 음식이 주는 아련한 가족의 기억

한때 유초딩 소녀들의 마음을 사로잡던 변신물 일본 애니 중 '크리미 마미'란 작품이 있다.

제목만 들으면 좀 낯설지만 '천사소녀 새롬이'라고 하면 다들 "아하~"하고 무릎을 칠 것이다.

평범한 초딩 소녀 유리가 10대 후반의 아이돌로 변신하며 이중생활을 시작하는 게 줄거리다. 

지금 생각하면 미성년자가 매니저도 없이 신원을 철저히 숨겨가며 활동한다는게 좀 말이 안되지만..

어쨌든 만화의 주 무대는 유리의 부모가 운영하는 크레이프 가게이며, 당시만 해도 한국에서는

낯설었던 크레이프라는 메뉴가 작품 속에 자주 등장한다. 한번은 새롬이의 정체를 쫓던 파파라치가

크레이프집 딸이라는 단서를 찾아내면서 오징어 부침개 푸드트럭과의 배틀이 벌어지기도 한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들을 토대로 추측해보면, 유리네 집은 크레이프 거리로 유명한 하라주쿠일거고

오징어부침개란 요리는 오사카 명물 이카야키였을 것이다. (고향 사람들이 버스 대절하고 와서 먹음..)

오늘날 하라주쿠에서 볼 수 있는 크레이프는 대략 위와 같은 모양새를 하고 있다. 

화려함과 다채로움으로 따지자면 한국에 들어와 무한변신을 하고 있는 마카롱에 비교할 법 하다. 

참고로 타코야키, 오코노미야키와 함께 오사카를 상징하는 요리 중 하나인 이카야키는 이렇게 생겼다.

묽은 밀가루 반죽에 오징어를 넣고 강한 압력을 가해 굽는데 오사카를 배경으로 한 소설 백야행에도

형사가 막과자 가게에서 이카야키를 주문해 먹는 장면이 등장한다. 한큐 백화점의 명물로도 꼽히지만

사실 명성에 비해 특별한 맛은 없다. 저렴한 가격에 갓 구워 따끈할 때 먹으면 주전부리로 좋은 정도..... 


그런데, 본고장이라 할 수 있는 프랑스 현지의 크레이프는 하라주쿠 크레이프만큼 화려하지 않다. 

오히려 앞서 소개한 이카야키에 가까울 정도로 별다른 장식도 없고 토핑이래봤자 한두가지다.

이는 크레이프가 탄생한 노르망디가 척박한 자연환경 탓에 소박한 음식문화를 갖게 된  영향이 크다.


프랑스에서 크레이프는 명절 메뉴이기도 하다. 우리의 입춘과 비슷한 의미를 지니는 성촉절(Chandeleur)

이 되면 각 가정에서는 태양을 닮아 둥근 모양을 한 크레이프를 구워 먹으며 풍년을 기원한다.

또한 크레이프는 '재의 수요일'로 불리는 마르디 그라에 먹는 축제 음식이기도 하다. 

금욕기간인 사순절이 오기 전에 버터 등 영양가 있는 음식을 미리 먹어두는(!) 셈이다.

(산패되기 쉬운 버터를 남겨두지 않으려는 실용적인 의미도 있다.)       

우리나라에는 동화책이나 애니메이션으로 먼저 소개된 '집 없는 아이'가 곧 개봉을 앞두고 있다.

'Sans Famille'라는 원제를 가진 이 소설은 19세기 말 작가 액토르 말로의 작품이다. 

아버지는 타지로 돈을 벌러나가고, 엄마와 근근히 살아가는 소년 레미는 어느날 아버지가 크게

다쳤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치료비를 마련할 길이 없던 엄마는 하나뿐인 암소 루제트를 팔았다. 

레미네 집 식량 사정은 크게 열악해져, 마르디 그라에도 별식을 해먹을 수 없는 처지가 된다.

하지만 엄마는 실망해 있는 레미 앞에 깜짝 선물로 어렵게 얻어온 우유와 버터, 사과 등을 보여준다.

크레이프와 사과 튀김을 해먹을 생각에 들떠 있던 레미...하지만 생각지 못한 복병이 파토를 내는데..

오늘날 크레이프는 우리나라의 붕어빵만큼이나 프랑스에서 흔한 국민 간식이다. 

생크림, 딸기 등을 때려박지(!) 않아서 그렇지 버터, 누텔라, 캬라멜 등 종류도 꽤 다양하다.

이런 종류는 크레프 쉬크르라고 부르는데 달달한 토핑을 얹어 간식이나 디저트로 먹는다.


위 사진은 설탕버터 크레이프인데 볼품은 없어 보이지만 'Simple is best'가 무엇인지 보여주는

대표 메뉴라고 할 수 있다. (만화 '어제 뭐 먹었어?'에서는 여기에 레몬즙 추가..)

조금 럭셔리한 버전으로는 파인 다이닝 등에서 디저트로 흔히 나오는 크레이프 수젯이 있다.

오렌지 리큐르인 그랑 마니에를 붓고 불을 붙여 알콜을 날린 후 아이스크림을 얹어 먹는다.


치즈와 햄, 베이컨, 각종 야채를 얹고 간단한 한끼 식사로 먹을 수 있는 크레이프도 있다. 

이런 종류는 '갈레뜨'라고 부르며 메밀가루를 주 재료로 가장자리를 네모나게 접어 서빙한다.

여기에 브루타뉴 특산 사과주인 애플 시드르를 곁들이면 간단하지만 훌륭한 한끼 식사가 된다.

2010년대까지만 해도 신촌에 있는 '라쎌틱'이란 가게에서 프랑스인 셰프가 직접 만든 크레이프를

판매했었는데 안타깝게도 지금은 폐업했다고 한다. (왜 정통파는 한국에서 안먹히는 걸까..ㅠㅠ)


한편 레미와 엄마가 크레이프와 함께 만드려던 사과 튀김은 대략 이런 모양이었을 것이다.

사과를 가로로 얇게 썬 다음 심을 도려내고 달걀옷으로 튀긴 후 파우더슈거, 계피를 뿌린다.

오래 전 이다도시가 직접 쓴 요리책을 보니 흰자와 노른자를 분리했다가 밀가루+노른자 반죽위에 

거품 낸 흰자를 입힌다고 한다. 실제로 해봤는데 사과의 아삭함에 머랭이 폭신한 식감을 더해준다.


소설 후반부, 우여곡절 끝에 길러 준 엄마를 다시 찾아가는 레미는 암소를 선물로 사간다. 

양아버지의 방해로 못 먹은 크레이프와 튀김이 얼마나 아쉬웠을까 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지만,

지금 돌이켜 보면 부자 친부모 이상으로 가난 속에서도 아낌 없는 사랑을 준 양모에 대한 마음을

잘 보여주는 장면이라고 할 수 있겠다. 2020년 식으로 새롭게 해석된 레미의 모험이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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