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미의 이름』을 통해 엿보는 유럽 수도원 음식문화
오늘날 수도원이라고 하면 성직자들이 모여 경건하고 금욕적인 생활을 하는 곳으로만 아는 이들이 많다. 이런 이미지는 산사에서 속세와 단절된 채 살아가는 조선시대 승려들의 모습과도 비슷하다. 하지만 현대의 종교인들이 다양한 방식으로 세속의 일에 관여하듯, 중세의 수도원 역시 수행만을 위한 장소는 아니었다.
중세 가톨릭교회 수도자들이 기도만큼이나 중요하게 여긴 일이 바로 노동이다. 폐쇄적인 공동체에서 모든 것을 자급자족하며 살아갔기 때문에 이들은 각자 농업과 목축, 약초재배 등 수도원 살림에 필요한 것들을 생산해내는 데 투입됐다. 수도원에서 만든 물건들을 외부로 판매해 그 수익을 재정에 보태기도 했는데, 기술이 장기간 누적되면서 일반인들은 쉽게 구하기 힘든 고급 소비재들도 많이 생산했다고 한다.
수도원에서 생산된 대표적인 제품으로는 치즈와 햄, 와인 등이 있다. 맥주와 각종 리큐어도 다양하게 만들어져 나오면서 사람들의 입맛을 사로잡았다. 오늘날까지 사랑받는 마카롱과 에그타르트 같은 과자들 역시 수녀원에서 그 기원을 찾을 수 있다. 또한 귀족들에게 수도원 레이스는 최고의 사치품으로 불렸다.
움베르토 에코Umberto Eco의 소설 『장미의 이름』은 마치 비밀 요새와도 같은 중세 수도원 공동체를 무대로 신에 대한 믿음과 인간의 욕망, 그로 인해 일어나는 복잡한 갈등을 흥미진진한 추리소설 형태로 풀어낸 작품이다.
주인공인 젊은 수사 아드소는 베네딕트 수도회 소속으로 멜크 수도원에 머무르고 있었다. 시대적 배경이 되는 14세기 초는 교황청이 아비뇽으로 옮겨가고, 로마와 아비뇽에서 각자 교황을 선출하는 등 교회 내 혼란이 가중되던 시기였다. 이탈리아 이곳저곳을 방랑하던 아드소는 부친에 의해 바스커빌의 윌리엄 수사의 시자侍者로 동행하게 되며, 이들이 마침 살인 사건이 터진 프랑스와 이탈리아 국경 지대의 산속 수도원을 방문하면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사건 수사를 맡게 된 두 사람이 둘러보는 수도원 내부 모습에서 이 공동체 내에서의 식생활을 짐작할 수 있다. 방을 안내받은 윌리엄과 아드소는 간단한 식사로 와인과 치즈, 올리브, 건포도 등을 대접받는다. 수도원의 채마밭에는 타임, 토란, 아욱, 후추, 루바브, 감초, 노간주나무, 엘더플라워, 호박, 양파 등 온갖 허브와 약초, 채소들이 자라고 있다.
저녁식사를 준비하는 부엌도 분주하다. 수사들의 식사에 쓰이는 식재료로 우유, 식초, 마늘 등을 비롯해 콩, 보리, 귀리, 호밀 같은 곡식류, 순무, 냉이, 무, 당근 같은 채소류가 즐비하게 마련되어 있다. 고기도 빠질 수 없어서, 뛰어다니는 닭을 잡아 요리에 쓰는가 하면 때에 따라 소와 양, 돼지도 잡아 식탁에 올린다. 한편 수도원에서의 첫 저녁식사 때 아드소는 수도원장이 처음 보는 삼지창으로 식사를 하는 것을 보며 신기해한다.
이 ‘삼지창’이 어떤 물건인지는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중세 사람들은 신이 내려 준 음식을 집을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사람의 손뿐이라는 믿음을 갖고 있었다. 때문에 왕이나 귀족들의 만찬에도 포크 같은 식기는 등장하지 않았으며, 핑거볼에 물을 담아 중간중간 손을 씻어가며 먹었다.
포크의 위상이 올라간 것은 14세기 무렵의 일로, 손을 더럽히지 않고 식사할 수 있다는 편리함에 더해 귀금속과 보석으로 만들어 부를 과시하는 역할도 했다. 포크를 전 유럽으로 전파시킨 주인공은 바로 이탈리아 출신의 프랑스 왕비, 카트린 메디치다. 수도원장이 포크를 사용해 식사하는 장면은 중세의 성직자들에게도 세속의 입김이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음을 의미하는 상징으로도 읽힌다.
『장미의 이름』에서 독자들의 관심을 가장 많이 끈 음식은 아마 구운 ‘건락 떡’일 것이다. 건락乾酪 떡이란 치즈를 의미하는데, 이윤기 버전의 번역에는 이런 의역이 자주 눈에 띈다. 가령 수도원 밖 마을을 “사하촌”이라고 칭하거나 시종侍從을 “불목하니”라고 하는 예스러운 불교식 표현들은 다소 난해하게 여겨지기도 하지만 폐쇄적인 수도원의 분위기를 잘 살렸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를 받는다.
어쨌든 치즈 역시 수도원에서 빠질 수 없는 식재료이다. 프랑스 못지않은 치즈 강국인 이탈리아에는 파르미지아노 레지아노, 그라나 파다노, 페코리노 로마노 같은 유서 깊은 치즈들이 많다. 우리나라에서는 모짜렐라가 ‘피자 치즈’로, 파르미지아노 레지아노가 ‘가루 치즈’로 알려져 있는데 공장식으로 생산되는 이들 치즈와 비교하면 오리지널은 제조 공정이 훨씬 까다롭고 가격도 상당히 높다. 소설에서처럼 “버터나 돼지기름을 발라 굽고 설탕, 계피 등으로 양념한” 치즈가 어떤 것인지는 이름은 나오지 않아 정확히 알 수 없지만, 구워서 먹을 만큼 단단한 치즈라면 호리병 모양의 ‘카초카발로’와 비슷한 종류가 아닐지 짐작해 본다.
중세 수사들이 먹던 스튜
아드소와 윌리엄이 수도원에 도착한 지 이틀째 되는 날, 프랑스 출신의 수사 베난티오가 돼지피가 담긴 단지에 거꾸로 처박힌 채 참혹한 시신으로 발견된다. 전날 수도원에서는 겨우내 먹을 육가공품을 만들 목적으로 돼지를 잡았었다. 실제로 알프스 산간 지역에서는 다양한 종류의 선지 소시지가 만들어지는데 잣과 소금, 우유와 양파가 들어간 베르도, 빵과 감자, 향신료를 섞은 마르차파네 등이 있다. 토스카나 주에서는 피렌체의 회향 씨앗으로 맛을 낸 ‘비롤도’라는 이름의 피순대가 유명하다. 우리에게는 조금 낯설지만 선지에 설탕, 초콜릿, 건포도 등을 섞어 만드는 ‘상귀나치오 돌체sanguinaccio dolce’라는 디저트도 있다.
후반부, 아비뇽 사절단을 대접하는 장면에서는 ‘검약’과는 거리가 멀어 보이는 상당히 호화스러운 만찬이 마련된다. 와인에 조린 비둘기 스튜, 토끼 구이, 쌀가루와 아몬드로 만든 성 키아라 빵, 향신료인 보리지를 넣은 파이, 양고기, 볶은 콩, 성 베르나르도 과자, 성 니콜로 파이, 성 루치아 경단 등이 식탁 위를 차지하고 있어 주인공 아드소는 “성서를 봉독하는 목소리만 없었다면 식도락가의 주지육림과 다를 게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레몬주스와 호두술, 용담술 같은 음료도 등장하는데 이는 중세 수도원에서 약용으로 리큐어가 흔히 만들어졌음을 암시한다. 중세 이후의 리큐어는 그 다채로운 빛깔과 향 덕분에 특히 파티에 참석하는 귀부인들 사이에서 사랑받았으며, 현대에 와서는 각종 칵테일에 빠질 수 없는 부재료로 활용되고 있다.
우리에겐 다소 낯선, 성인들의 이름을 붙인 빵과 과자들을 해당 성인의 축일에 만들어 먹는 것은 가톨릭교회의 오랜 전통이다. 가령 성 키아라 빵은 십자가 형태로 칼집을 낸 빵을 말한다. 이와 비슷한 형태의 빵들은 유럽 각지로 전파됐는데 오늘날에는 영국의 핫 크로스 번이 유명하다. 성 베르나르도 과자는 포카치아의 일종으로, 버터와 달걀에 바닐라와 레몬 껍질 등으로 향을 낸 도넛형 빵이다. 성 니콜로 파이는 견과류를 넣은 파이이며, 성 루치아 경단은 슈크림 정도 크기의 작은 빵에 설탕 아이싱을 씌운다.
한편 요새와도 같은 수도원의 실상은 음모와 욕망, 눈먼 신앙 같은 어둡고 복잡한 그림자가 지배하고 있는 장소였다. 성매매와 인권유린, 부정부패 등 인간의 추악한 이면을 목도한 아드소는 설명할 수 없는 혼란에 빠진다. 결국 7일째 되는 날 마치 세기말의 재앙처럼 수도원은 불에 타고 잿더미만이 남는다. 스승 윌리엄과 결별하고 오랜 세월이 지난 후, 수도원을 다시 찾은 아드소는 “Stat Rosa pristina nomine, nomina nuda tenemus(예전의 장미는 그 이름일 뿐, 우리에겐 그 이름들만 남아있을 뿐)라는 말로 소회를 밝힌다.
종교나 기호학에 익숙지 않은 사람들에게 『장미의 이름』은 쉽게 읽히는 작품은 아니다. 하지만 생생하게 묘사된 중세 수도회의 생활상을 따라가다 보면 마치 미로를 헤매다 숨겨진 보물을 발견하는 듯한 즐거움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위 글은 https://prism.buk.io/102.0.15.78에서도 보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