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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ejin Jeung Apr 12. 2022

전통 오락의 재미를 돋우는 조선시대 먹방

판소리 다섯 마당을 통해 보는 우리 음식문화

“흥선대원군, 고종 때 했던 판소리랑 정조 때 판소리랑 같은 판소리일까요? 아니란 말이죠. 지금 제가 그냥 즐기는 게 21세기의 판소리라고 생각해요. 갓 쓰고 도포 입고 하는 것도 21세기의 판소리고, 이날치를 이렇게 하는 것도 21세기의 판소리인 거죠.”

〈범 내려온다〉로 유명한 국악 밴드 이날치가 했던 말이다. 다른 나라의 전통예술처럼 판소리 역시 다양한 변화를 거듭해 왔다. 또 같은 시대라도 화자에 따라 창법과 이야기 흐름, 결말이 달라지는 등 듣는 이들의 기호에 맞춘 다채로운 변주는 판소리의 또 다른 매력이다.  현란한 CG도 없고 무대 연출에도 한계가 있었던 시절, 전기수傳奇叟나 소리꾼들은 오감을 자극하는 다양한 소재들을 동원해 무대에 재미를 더했다. 그중에는 먹는 이야기도 빠질 수 없었는데, 그 묘사는 ‘조선시대 먹방’을 방불케 한다. 농경민족의 전통을 반영하듯 수십 가지 곡물과 과일 이름을 늘어놓는가 하면 구경도 못 해본 임금님 수라상도 호화롭게 펼쳐진다. 선조들의 신명나는 장단을 통해 오늘날 사람들은 당시의 식문화에 대한 귀중한 자료도 얻을 수 있게 됐다.


우선 판소리 다섯 마당 중 첫 번째인 〈심청가〉에서는 서민들이 먹던 일상식들이 주를 이룬다. 어머니 곽씨 부인은 마을 대소사가 있을 때마다 품팔이를 가서 증편, 중계약과, 과잘(산자에 잣이나 호두를 붙여 만든 과자), 다식, 정과, 냉면, 화채, 신선로, 오색탕수(오방색을 이용한 제사 음식) 만드는 일을 거든다. 뱃사람들의 인당수 고사와 심청이 용궁에서 대접받는 장면에는 다양한 술이 등장하는데 찹쌀과 멥쌀로 만든 증류주인 한주, 담근 지 천 일 만에 마신다는 천일주, 각종 약주에 신선의 술이라는 옥액경장玉液瓊漿 등이 언급된다. 


어린 심청이 밥을 빌어 부친에게 상을 차려줄 때 등장하는 음식들로는 흰밥, 팥밥, 미역튀각, 갈치자반 같은 것들이 있다. 마을 사람들이 먹을 것을 나눠 줄 때는 보리밥, 수수밥, 나물, 김치, 젓갈 등도 나온다. 다양한 곡류로 지은 밥에 채소와 어패류, 발효식품을 반찬 삼아 먹어 온 우리 전통 식생활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묘사이다. 


한편 〈춘향가〉는 그 무대가 먹거리의 고장인 전라도인 데다 기방의 주안상이 등장하므로 다섯 마당 중 가장 호사스러운 음식 묘사를 볼 수 있다. 특히 월매가 이도령에게 술상을 대접할 때는 “주효를 차릴 적에 안주 등물 볼 것 같으면 괴임새도 정결하고 대양푼 가리찜, 소양푼 제육찜, 풀풀 뛰는 숭어찜, 포도동 나는 메추리탕에 동래 울산 대전복 대모 장도 드는 칼로 맹상군孟嘗君의 눈썹처럼 어슷비슷 오려 놓고, 염통산적, 양볶이와 춘치자명 생치 다리, 적벽 대접 분원기에 냉면조차 비벼놓고 생률 숙률 잣송이며 호도 대추 석류 유자 준시 앵두 탕기 같은 청술레를 칫수 있게 괴어”놓아 마치 고급 한정식집에 온 듯한 착각마저 들게 한다. 


동래, 울산 같은 다소 먼 지역의 식재료까지 상에 오르는 것에서 상인을 통해 각지의 특산물이 모여들었던 전라도의 지역적 특성을 엿볼 수 있다. 고기가 귀했으므로 소나 닭 외에 메추리, 꿩고기도 식재료로 쓰이며 염통과 양 등 내장까지 알뜰하게 활용하고 있다.  


또한 술 종류도 다양하게 묘사된다. “이적선 포도주와 안기생 자하주와 산림처사 송엽주와 과하주 방문주 천일주 백일주 금로주 팔팔 뛰는 화주 약주 그 가운데 향기로운 연엽주 골라내어 알안자 가득 부어 청동화로 백탄 불에 남비 냉수 끓는 가운데 알안자 둘러 불한불열 데어 내어 금잔 옥잔 앵무배를 그 가운데 데웠으니 (중략) 권주가 한 곡조에 일배일배부일배라.”



형편에 따라 다르기는 했지만, 옛사람들은 다양한 가양주家釀酒를 빚어서 제사나 잔치에 대비해 보존해 두었다. 주안상은 각각의 술들과 어울리는 재료들을 활용해 계절감을 맞춰 차려 내는 것이 보통이었다. 술상에 냉면이 등장하는 것도 흥미로운 부분인데, 이는 가벼운 해장을 위해 냉면으로 속을 달래던 구한말 요릿집의 ‘선주후면先酒後麵’ 풍습을 떠오르게 한다.  


슈박(수박), 능금, 곳쵸 같은 외래 농작물도 언급되는데, 이는 판소리가 구전되면서 시대에 따라 조금씩 윤색이 이뤄졌음을 의미한다. 즉, 초창기 〈춘향가〉와 후대 사람들이 살을 붙여 종합예술화한 판소리에는 상당한 차이가 있는 것이다. 실제로 이들 작물은 임진왜란 후인 17세기 이후에 들어왔으며 고추 같은 채소류가 보편적으로 쓰이게 된 것은 19세기 들어서의 일이다. 특히 고추의 유입은 한국인의 식생활에 혁명적인 변화를 가져오게 된다.  


반면 〈흥부가〉 속 음식들은 화려함보다 푸짐함이 강조된다. 끼니도 잇기 어려운 상황에서 굶주린 아이들이 상상으로나마 먹고 싶은 음식들을 떠올리는 대목이 왠지 짠하다. 그 중 고기와 떡의 비중이 높은데, 둘 다 농경사회에서는 귀한 음식에 속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흥부가〉에 등장하는 고기 종류는 닭, 쇠용도리(쇠뼈), 빙아리(병아리), 황육(쇠고기) 등이고, 고기를 이용한 요리로는 육만도(고기만두), 졍국(개장국), 탕(자라탕), 골탕(소의 등골이나 머릿골을 맑은 장국에 넣어 익힌 국), 니어집(잉어찜), 영게집(영계찜), 갈비찜, 셜산젹(사슬산적: 쇠고기 따위를 길쭉길쭉하게 썰어 갖은 양념을 하여 대꼬챙이에 꿰어서 구운 것)이 나온다. 


그중에서도 개고기는 기르기가 쉬운 데다 값이 저렴해 계층을 막론하고 널리 먹었다. 양반가 여성이 저술한 『음식디미방閨壺是議方』이나 『규합총서閨閤叢書』에도 개를 잡는 법, 털 뽑고 손질하는 법, 조리법 등이 상세하게 묘사돼 있다. 〈흥부전〉 속 개장은 개를 잡아 삶아서 파, 고춧가루, 생강 등을 넣고 푹 끓인 것으로, 여름 더위를 이기는 보양식으로 그만이었다. 


흥부네 아이들은 가장 먹고 싶은 음식으로 떡을 꼽는다. 조선 후기 떡의 종류는 약 200종에 이를 만큼 다양했다. 호박떡부터 졍졀편(절편), 화젼(화전), 모일범벅(메밀범벅), 찰떡 등이 작품에서 언급된다. 진달래나 장미, 맨드라미 등을 사용한 화전은 계절감을 살리면서 맛과 멋이 함께하는 최고의 사치품이었다.


그런가 하면 〈수궁가〉에서는 물고기들의 이름을 통해 당시 사람들이 이용했을 수산 자원을 짐작해 볼 수 있다. 용궁 어전회의에는 금고(금고래), 금거복, 샹어, 졈복(전복), 광어, 슝어(숭어), 민어, 농어, 쟝어(장어), 병어, 쥰치(준치), 방어, 문어, 자가살이(감어), 도미, 모못치(모래무지), 망동이, 자라, 강다리, 고지, 모장어, 볼거지, 이(밴댕이), 송살이, 밋구리(미꾸라지), 샴(해삼), 홍합, 대합, 소라, 고동, 우렁이, 오(새우), 둑이(꼴뚜기), 죠(조개), 방게, 리어(잉어), 감을치(가물치), 법게, 대구, 봉어, 위어(웅어) 등이 등장한다.  


또한 가마윤긔탕, 가미디황탕, 오약슌긔탕, 시호방풍탕, 자음강화탕, 십젼대보탕 같은 약재 음료가 언급되는 것도 특징이다. 고려 중기 이후 인삼을 비롯한 약재에 대한 활발한 연구와, 의학제도 정비를 통한 의학장려의 결과로 볼 수 있다. 


끝으로 〈적벽가〉는 다른 판소리 작품과 달리 중국이 배경이기 때문에 음식 묘사가 많이 등장하지는 않는다. 다만 술과 떡, 고기로 출전하는 병사들의 사기를 돋우는 장면이 인상적이다. 술은 단순한 기호음료가 아니라 풍류의 상징이었으며 우의를 다지고 조상에게 예를 표할 때 빠질 수 없는 매개체로서 중요성을 갖는다. 조선 후기 이규경의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 같은 문헌을 보면 당시 사람들이 ‘청명주淸明酒’, 평양의 “감홍로주 甘紅露酒’, 한산의 ’소국주小菊酒’, 홍천의‘백주白酒’, 여산의 ‘호산춘주 壺山春酒’ 등을 명주로 꼽았음을 알 수 있다. 


옛사람들이 즐긴 전통 예술은 비록 다양성 면에서는 현대에 비해 뒤질지언정 한정된 소재 내에서 모두가 흥을 누릴 수 있는 공동체성이 있었다. 또 그 시절의 음식문화는 오늘날에 비해 그 양이 풍족하지는 못하지만 훨씬 다채로운 재료와 아이디어가 숨어 있다. 이는 어떻게든 먹을 만한 것을 찾아내기 위한 필사의 노력의 결과라고 할 수 있겠다. 다만 이런 문화유산들이 식민지와 전쟁이라는 격변기, 과속 수준으로 이뤄진 산업화 탓에 제대로 전해지지 못하고 있는 것은 큰 손실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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