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 작품을 실사 영화나 애니메이션으로 옮기는 작업에는 일장일단이 존재한다. 장점은 가독성이 떨어지거나 분량이 방대한 작품의 내용을 보다 쉽게 전달할 수 있다는 것이다. 단점이라면 사람들이 실사 작품만을 기억하고 원작의 메시지를 받아들이지 못할 가능성이 있다. 루시 모드 몽고메리의 『빨강 머리 앤』은 그 장단점을 함께 지닌 예라고 할 만하다.
1908년 첫 발간된 이 소설은 원작보다 1979년 일본 후지TV에서 제작된 애니메이션이 아시아권에서는 더 친숙하다.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으로 유명한 거장 미야자키 하야오도 제작에 참여한 바 있다. 그런데 만화가 지나치게 유명한 탓인지 1권인 『그린 게이블즈의 앤』 이후의 내용은 모르는 독자들이 많다.
또한 원작은 성경 구절과 고전 문학을 인용하는 등 상당한 깊이가 있는 반면 애니메이션에 익숙한 이들에게는 가벼운 청소년 소설로 오해받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나중에 원작을 읽어 보면 입센의 『인형의 집』이나 샬럿 브론테의 『제인 에어』와 견줄 만큼 페미니즘적 메시지가 강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다만 1979년작 애니메이션이 지금도 사랑받고 있는 데는 이유가 있다. 앤의 상상 속에 존재했을 법한 아름다운 풍경과 살아 숨 쉬는 듯한 묘사가 책에서는 만날 수 없는 재미를 주기 때문이다. 특히 작품 곳곳에 등장하는 음식들은 실물보다 먹음직스러운, 먹방의 정수를 보여준다.
2018년 한국에도 출간된 『빨강 머리앤 레시피북』은 몽고메리의 손녀인 케이트 맥도널드가 쓴 책이다. 현재 토론토에 거주하고 있는 그녀는 작품 속에 등장하는 초콜릿 캐러멜을 비롯해 딸기 주스, 레이어 케이크, 각종 티 푸드 같은 음식을 소개한다. 이 음식들의 뿌리는 루시 몽고메리의 조부모가 태어난 스코틀랜드에서 찾을 수 있다. 캐나다에 이주한 스코틀랜드인들은 노바스코샤주에 많이 살았으며, 이곳은 소설 속 앤이 출생한 곳이기도 하다.
유년기 앤의 성장 배경은 실제 몽고메리의 삶과 꽤 비슷한 부분이 많다. 작품의 무대가 되는 프린스에드워드섬에서 태어난 그는 생후 21개월 만에 어머니를 잃고 캐번디시에서 우체국을 경영하는 외조부모 밑에서 자랐다. 몽고메리를 길러준 할아버지와 친척들은 독실한 장로교 신자로 엄격하고 검소한 생활 방식을 이어갔다고 한다. 『빨강 머리 앤』에서 사치를 극도로 경계하고 깐깐한 성격의 마릴라는 아마도 그의 조부모와 비슷한 모습이었던 듯 하다.
작품에도 나오지만 스코틀랜드계 이민자들은 영국식 차 문화를 아메리카대륙에 가져왔다. 몇몇 중요한 장면에는 티 푸드가 어김없이 등장하는데 대표적인 예가 바로 다이애나를 취하게 만든 산딸기 주스다. 원래 앤이 대접하려고 한 음료는 산딸기, 즉 라즈베리로 만든 코디얼로 우리나라의 과일청과 비슷하다. 코디얼은 냉장 시설이 발달하지 않았던 시절 각종 과일류를 저장하는 방법 중 하나였다. 진한 시럽인 코디얼은 그대로 마실 수도 있지만 물이나 소다수를 섞으면 가볍게 즐기기 좋은 음료가 된다.
차와 곁들여 먹기 좋은 음식으로는 앤이 실수로 진통제를 넣었던, 젤리를 끼워넣은 레이어드 케이크가 있다. 마릴라가 만드는 자두 푸딩이며 후반부 등장하는 쇼트브레드도 티푸드로 좋다. 특히 쇼트브레드는 스코틀랜드의 전통 과자이기도 하다. 사블레 비스킷과 비슷한 맛이 나며 버터를 듬뿍 넣어 만든다. 크리스마스나 새해에 먹는 간식으로, 원래는 귀리 가루로 만들었으나 오늘날에는 밀가루로 만든다.
1736년 스코틀랜드 최초의 요리책인 맥클린톡 부인의 『요리와 패스트리를 위한 레시피Recipes for Cookery and Pastry-work』를 보면 밀가루와 버터, 이스트를 사용한다. 약간 푸석한 질감에 버터의 풍미가 인상적이다. 가장 원조에 가까운, 둥근 형태의 ‘페티코트 테일petticoat tails’은 캐러웨이 씨앗으로 향을 낸다.
좀 더 고급스럽게 만들려면 레몬이나 오렌지 껍질 또는 아몬드로 장식하기도 한다. 동그랗고 납작한 모양에 중앙에서 바깥을 향해 방사형으로 홈이 팬 이 과자는 홈이 난 선을 따라 삼각형으로 쉽게 쪼개어 먹을 수 있다. 이것은 태양을 상징하는 모양으로, 새로운 시작을 축하하며 즐겨 먹는 이 오래된 과자의 의미를 잘 보여주고 있다.
소녀 시절의 앤은 다른 또래의 아이들처럼 달콤한 디저트류를 좋아한다. 매튜 아저씨가 읍내로 나가 사 온 초콜릿 캐러멜은 마릴라의 잔소리를 불러오지만, 다음날 다이애나와의 소꿉놀이에서 소중한 우정의 징표가 된다. 오해로 인해 소풍을 가지 못하게 된 앤은 무엇보다도 처음 맛보게 된 바닐라 아이스크림을 아쉬워한다.
20세기 초의 아이스크림은 소프트크림에 가까웠다고 하며 1904년 미국 세인트루이스 박람회에서 와플로 된 콘이 탄생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그런가 하면 심통이 난 앤에게 화해를 시도하려는 길버트가 건넨 핑크색 하트 캔디도 인상적인 음식이다. 어린 시절의 앤은 사탕을 발로 밟아 버리지만, 후일 길버트는 졸업 선물로 비슷한 모양의 목걸이를 선물하며 그때의 기억을 떠올리게 한다.
애니메이션으로 빨강 머리 앤을 접한 이들은 가장 기억에 남는 레시피로 브라우니를 꼽는다. 앤이 그린 게이블즈에 입양된 후 처음으로 매튜와 마릴라에게 대접하는 음식이 바로 브라우니이다. 평소에 덜렁대는 앤이지만 브라우니를 만들 때만큼은 누구보다 진지하고 침착하다. 진한 초콜릿 반죽에 견과류가 콕콕 박힌 브라우니를 앤은 매튜 아저씨에게 권하고, 다음날 다이애너와 함께 나눠 먹는다.
바로 이 브라우니에서도 작가의 성장 배경을 읽을 수 있다. 브라우니는 원래 스코틀랜드 전설에서 밤에 나타나서 몰래 농가의 일을 도와준다는 작은 요정을 가리키는 말이다. 작고 부지런한 요정 혹은 꼬마 도깨비로, 해리포터 시리즈의 꼬마 집 요정 ‘도비’의 모델이기도 하다.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게 집이나 헛간에 살면서 밤중에 청소나 집안일을 한다. 간혹 장난을 치느라 방을 어지럽히기도 하며, 붕붕거리는 벌떼들을 조용히 시키기도 한다.
브라우니는 크림이나 빵·우유 등을 좋아해서 브라우니와 함께 사는 인간들은 이것들을 브라우니의 몫으로 남겨두어야 했다. 대신 다른 선물은 좋아하지 않는데, 가령 브라우니에게 옷이 생기면 그것을 입고 사라져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다고 알려져 있다.
과자 브라우니는 각 형태로 잘린 진한 초콜릿 케이크이다. 밀가루 분량이 보통 케이크보다 적어 퍼지나 캐러멜 같은 농후한 식감이 특징이다. 1979년에 출판된 「베티 크로커의 제빵 기본Betty Crocker’s Baking Classics cookbook」에 따르면 브라우니는 메인주에서 초콜릿 케이크를 만들려다 실패해서 우연히 개발된 것이라고 한다. 실수로 베이킹파우더를 넣지 않아 부풀지 않은 케이크가 완성되었는데, 이를 맛본 사람들이 특유의 쫀득한 느낌에 의외로 호감을 나타내어 지금과 같은 브라우니로 알려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한편 메인 메뉴로 등장하는 음식들은 캐나다가 영국계 이민자들이 세운 국가인 만큼 영국풍 레시피가 많다. 스테이시 선생님의 마카로니는 오늘날 영미권의 소울 푸드로 알려진 ‘맥 앤 치즈’를 떠올리게 한다. 마치 한국의 라면처럼 자취생들이 간단하게 해 먹는 음식이라는 인상이 강하다. 그밖에 그라탱과 로스트 치킨, 샌드위치 같은 음식들이 앤 시리즈에 등장한다.
오늘날 『빨강 머리 앤』의 레시피를 재현해 보면 어린 시절 군침을 흘리던 그 맛은 아닐지도 모르겠다. 식재료가 풍부한 시대가 아니었던 만큼 현대의 기준에서는 다소 밋밋할 수도 있다. 하지만 앤의 상상력이 담긴 듯한 추억의 맛은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