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야베 미유키 『맏물 이야기』와 일본 음식문화
한식 붐을 일으킨 드라마 〈대장금〉에는 고춧가루로 빨갛게 물든 김치가 나오지 않는다. 오늘날 흔하디흔한 감자나 당근도 작품의 배경이 되는 16세기에는 없었고, 심지어 배추도 드문 식재료였다. 음식 감수를 맡았던 궁중요리 전문가 한복려 선생은 이 때문에 옛 문헌을 참고해 맨드라미나 호박꽃, 석류알 등으로 색감을 살렸다고 한다.
지금보다 식량 사정이 좋지 않았던 시절, 고증에만 충실해 옛날의 식탁을 재현한다면 아무래도 단출하고 밋밋해 보일지 모르겠다. 하지만 옛사람들은 경험과 상상력을 동원해 자연에서 찾아낸 온갖 식재료로 맛과 영양을 더했다. 우리 선조들이 비교적 검소하면서 실속 있는 밥상을 선호했다면, 일본인들은 상대적으로 멋과 운치를 중시하는 경향이 있다. 계절감과 시각적 요소를 중시하는 일식의 특징은 오랜 육식 금지로 인해 사용할 수 있는 식재료가 제한됐던 영향도 크다. 특히 ‘맏물’이라고 불리는, 계절이 바뀔 때 처음으로 나는 채소나 과일, 생선 등은 먹으면 수명이 75일씩 길어진다고 해서 귀하게 여겨졌다.
‘미미 여사’라는 별명으로 한국 팬들에게 친숙한 추리소설 작가 미야베 미유키는 맏물 식재료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각종 사건들과 먹음직스러운 요리들을 함께 선보인다. 2015년 출간된 『맏물 이야기』는 에도 말기 서민 거리로 불리던 후카가와(오늘날 고코 구)의 상점가를 무대 삼아 펼쳐진다. 주인공 모시치는 이 구역의 치안을 담당하는 오캇피키(관할서 경찰에 해당하는 하급무사 도신의 수하)로, 계절이 바뀌는 동안 다양한 사건들을 해결해 간다.
첫 번째 에피소드 「오세이 살해사건」은 새해 첫날 한 여성이 차가운 강물의 시체로 떠오르면서 시작된다. 유력한 용의자에게는 확실한 알리바이가 있었고, 고심하던 모시치는 정체 모를 유부초밥 노점상에게 순뭇국과 된장 수제비를 얻어먹으면서 사건의 실마리를 찾아낸다.
단편집에는 오세이 살해사건 외에도 총 아홉 편의 에피소드가 실려 있다. 천 냥이나 되는 돈을 내고 가난한 생선 장수에게 가다랑어를 사겠다는 어느 포목상, 신사에 바친 공물을 먹고 독살당한 아이들, 돈을 빌리러 온 형에게 살해당한 방물상 종업원, 수상쩍은 기운을 풍기는 대지주 일가 등의 이야기가 차례차례 등장한다. 등장인물 대부분은 상인이나 직공들로, 수공업과 상업이 발달했던 에도 시대의 생활상이 흥미진진하게 펼쳐진다.
200여 년 전을 배경으로 이렇게 다양한 음식들이 등장하는 것은 당시의 시대적 상황에서 기인한다. 17~18세기 일본에서는 에도를 비롯한 대도시들이 빠르게 발전했고, 지방에서 올라온 청년들이나 하급 무사 등 여러 계층의 사람들이 공존하게 됐다. 이들 중에는 독신 남성들이 많다 보니 간편하게 사 먹을 수 있는 요식업이 크게 발달한 것이다.
에도의 시장에서는 텐푸라를 비롯해 유부초밥이나 오뎅, 우동, 소바 같은 다양한 음식들을 맛볼 수 있었다. 시간에 쫓기는 짐꾼이나 종업원, 혹은 요시와라의 유녀들은 야타이(노점상)에서 끼니를 해결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겨울철 뜨끈한 포장마차 어묵을 먹듯, 그 시절 일본인들은 어묵과 무, 달걀 등이 들어간 오뎅으로 속을 든든하게 했다. 요즘은 고급 음식의 대명사가 된 초밥도 에도 시대에는 간단하게 먹을 수 있는 패스트푸드였다.
계절이 바뀌면서 이야기가 진행되는 만큼, 우리와 비슷하면서 다른 일본의 다양한 세시풍속을 엿볼 수 있다는 것도 『맏물 이야기』의 또 다른 재미 포인트다. 새해 첫날 먹는 ‘오세치 요리’는 전날 미리 만들어 두며, 설 당일에는 불을 쓰는 요리를 하지 않는 것이 원칙이다. 온 가족이 느긋하게 설을 즐길 수 있도록 하자는 의미지만 한편으로는 건조한 날씨에 화재를 막기 위한 이유도 있는 것으로 보인다.
오세치 요리로는 떡국 재료인 네모난 찹쌀떡 외에 농사 풍년을 기원하는 멸치볶음(멸치볶음을 뜻하는 ‘たづくり’는 ‘밭을 만든다’는 뜻)과 재물을 뜻하는 샛노란 쿠리킨톤(밤조림), 축하를 의미하는 도미 등이 차려진다. 여러 가지 음식에 모양을 낼 때는 경사스러움을 나타내는 송죽매松竹梅 문양을 많이 사용한다. 검은콩, 연근, 홍백 어묵, 새우, 청어알도 단골 메뉴다.
정월 7일째 되는 날에는 설 장식을 치우고 일곱 가지 나물죽을 먹는다. 일곱 가지 재료는 냉이, 쇠별꽃, 순무, 무, 미나리, 광대나물, 개똥쑥 등으로 냉이나 미나리 정도는 우리에게도 친숙하지만 나머지 나물들은 한국에 그리 흔하지 않은데, 서로 다른 기후 혹은 한국인과 일본인의 식습관 차이에 의한 것으로 추측된다. 겨울철 영양가 보충을 위해 먹는다고 하며 모양새는 좀 다르지만 우리나라에서 정월대보름에 묵은 나물을 먹는 풍습과도 비슷해 보인다. 벚꽃이 피는 시기에 맞춰 꽃놀이를 즐기는 풍속은 현대에도 남아 있다. 지역마다 벚꽃놀이 시즌은 달라지며, 풍류를 즐기는 행사인 만큼 맛있는 음식이 빠질 수 없다. 꽃놀이 때는 소금에 절인 벚꽃을 뜨거운 물에 띄워 차로 마신다. 이 시기 계절감을 살린 대표 간식으로는 연분홍 찹쌀 반죽에 단팥 소를 넣고 벚꽃잎 장아찌로 감싼 사쿠라모찌가 있다. 관서 지역에서는 반죽 대신 분홍빛이 나는 찹쌀밥을 사용한다.
에도시대까지 일본인들은 육식을 금했다고 알려졌으나 예외는 있었다. 오리고기는 물갈퀴가 있기 때문에 물고기로 분류됐고, 소설 속 요리점 ‘호리센’에서도 기름진 음식을 좋아하는 손님의 환갑잔치에 오리고기를 내놓는다. 다만 이렇게 호화스러운 식재료를 먹을 수 있는 계층은 한정돼 있었으며 사건 수사를 위해 요리점 음식을 맛본 모키치 일행은 엄청난 가격에 기절초풍한다. 또 다른 단편 「다로 감, 지로 감」을 보면 에도에서 떨어진 시골 농민들은 여전히 제대로 끼니를 잇지 못하는 현실이 묘사되며, 굶주린 농부 형은 돈 대신 정교하게 세공한 과자를 내미는 동생에게 분노한다.
한편 소설 속에서 심야까지 운영하는 노점상 주인은 우동을 넣어 한 끼 식사도 되는 달걀찜이나 제철 생선구이 등 간단하면서도 맛있는 음식을 제공한다. 그는 매번 주인공 모시치에게 사건의 힌트를 주지만 어쩐 일인지 그 정체가 끝끝내 밝혀지지 않는다. (편집 후기를 읽어보면 그 비하인드스토리가 나오는데 작가가 다음 시리즈를 쓴다면 혹시 알 수 있을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