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보라색 히비스커스』 속 아프리카 여인들의 삶
LGBT 사회운동을 상징하는 무지개 깃발은 빨강, 주황, 노랑, 초록, 파랑, 보라색으로 성적 지향의 다양성을 존중하자는 의미를 담고 있다. 인류가 추구하는 가치는 무지개처럼 서로 다른 빛깔을 지닐 수 있다는 것이다. 나이지리아 출신의 작가 치마만다 은고지 아다치에Chimamanda Ngozi Adichie는 2003년 출간된 첫 장편 『보라색 히비스커스』를 통해 자신만의 색깔을 찾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한 소녀의 이야기를 담아냈다.
작품의 배경은 나이지리아의 한 상류층 가정이다. 주인공 남매, 자자와 캄빌리는 겉으로 보기에는 나무랄 데 없는 환경에서 살아가고 있다. 진보 성향의 언론사와 몇 개의 공장을 갖고 있는 아버지 유진은 가난과 인종차별을 딛고 자수성가해 많은 이들의 존경을 받는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정치, 경제적 이유로 혼란을 겪는 주변 사람들과 달리 두 아이는 부족함 없는 금수저로 자라난다.
하지만 이들 가족의 평화는 어디까지나 껍데기에 불과하다. 어머니는 남편의 지속적인 폭력으로 아이를 유산하고, 자자와 캄빌리는 아버지가 정해 놓은 틀 안에 갇힌 채 순종만을 강요받는다. 교회와 지역사회에서 성자처럼 떠 받들어지는 유진이지만, 집 안에서 그는 무자비한 폭군이며 자신과 다른 목소리를 철저히 외면하는 이중성을 갖고 있다. 그러던 어느 날, 침묵하던 캄빌리 남매는 가난하지만 자유로운 영혼을 지닌 이페오마 고모 가족과 지내며 아버지가 지배하던 굳건한 세계에 작은 균열을 내기 시작한다.
두 집안의 환경 차이를 나타내주는 소재로 작가는 음식을 자주 활용한다. 크리스마스를 맞아 캄빌리 가족은 두세 대나 되는 외제차에 참마와 쌀, 플랜틴 바나나 같은 식료품에 값비싼 양주 등을 싣고 길을 나선다. 시장에서 간식거리를 파는 행상인들과 고향 마을 저택을 찾은 사람들에게 아버지는 돈과 음식을 아낌없이 베푼다. ‘오멜로라(고장을 위해 일하는 자)’라는 존칭을 가진 아버지 유진의 모습은 이들에게 마치 빛나는 태양처럼 보였을 것이다.
그러나 가톨릭으로의 개종을 거부한 남매의 할아버지, 파파은누쿠를 대하는 유진의 태도는 얼음장보다 더 싸늘하다. 전통 신앙을 존중하는 부친의 존재는 그에게 ‘불경한 이교도’에 불과하며 혹시라도 아버지가 자신의 두 아이에게 영향을 미칠까 유진은 극도로 경계하는 모습을 보인다. 이에 대학교수인 고모 이페오마는 성모 발현지를 보여주겠다며 오빠를 어렵게 설득, 자자와 캄빌리를 자신의 집으로 데려간다.
남매가 지내던 호화로운 대저택에 비해 소도시에 있는 고모의 집은 어수선하고 복잡하다. 전기, 가스 사용도 불편한데다 온 가족이 다 함께 나서서 집안일을 거들어야 한다. 고기가 식탁에 오르는 일은 많지 않으며, 본가에서는 간식으로나 먹던 메뉴가 이곳에서는 한 끼 식사가 된다. 그럼에도 자유롭게 의사를 표현할 수 있고, 규율에 얽매이지 않는 사촌들의 생활은 어린 캄빌리에게 낯설고도 부럽다. 이들은 아버지의 명을 거역하고 파파은누쿠와 즐거운 시간을 보내지만 찰나의 행복은 생각지 않은 결과를 가져온다.
나이지리아에서 태어나고 자라 미국에서 학업을 마친 저자 아디치에는 본인의 어린 시절을 반영한 듯한 서아프리카 가정식 메뉴를 소설에서 상세하게 묘사한다. 요루바족과 함께 나이지리아 국민의 5분의 1 가량을 차지하는 이보족의 대표 주식은 카사바나 옥수수전분으로 만든 ‘푸푸fufu’이다. 겉모습은 쌀가루를 쪄낸 떡처럼 생겼지만 보다 찐덕한 식감이며 그 자체로는 아무 맛이 나지 않고 수프를 찍어 삼키듯 먹는다. 타피오카의 재료가 되는 카사바 덩이줄기 가루를 발효시켜 익힌 낟알 모양의 ‘가리’는 재료와 발효 여부에 따라 맛이 조금씩 다르다.
쌀은 ‘얌’이라고도 불리는 참마, 카사바에 비해 조금 더 고급스러운 식재료다. 길쭉하고 푸석한 아프리카 쌀은 그냥 익히기보다는 코코넛 밀크 같은 부재료를 넣어 맛을 낸다. 토마토와 채소, 고기 등을 넣은 ‘졸로프 라이스’는 우리나라 사람들에게도 비교적 친숙한 메뉴로 매콤한 양념이 한국인의 입맛에도 잘 맞는다. 대량으로 지은 졸로프 라이스는 결혼식이나 잔칫상에서 흔히 볼 수 있다.
주식에 곁들여 먹는 수프 종류가 발달한 것도 나이지리아 요리의 특징이다. 캄빌리 가족은 끈적한 푸푸에 멜론 계통의 씨앗인 에구시와 토마토, 시금치, 오크라를 넣은 ‘오베 에구시’를 찍어 먹는다. 약간 매운맛이 나는 에구시는 외국인들도 쉽게 친해질 수 있는 음식으로 꼽힌다. 쓴맛이 강한 오누그부(영어로 bitterleaf) 잎을 듬뿍 넣은 ‘오페 오누그부’, 메기에 참마, 호박잎과 비슷한 우타지 잎, 말린 가재 가루가 들어간 ‘오페 은살라’ 외에 다이어트식으로 최근 각광받는 오그보노(wild mango), 오크라 등이 수프에 자주 쓰이는 재료들이다.
여성의 손가락을 닮았다고 해서 ‘레이디핑거ladyfinger’라는 별명을 가진 오크라는 일본인들도 즐겨 먹는데, 각종 국물 요리에 끈적한 점성을 더해준다. 바나나의 일종인 ‘플랜틴’은 잠시 이마트에서 판매된 적이 있으며, 단맛이 적고 단단해 다른 과일처럼 생으로 먹기보다는 굽거나 튀겨서 채소처럼 먹는다. 얌이나 카사바를 비롯한 이들 식재료는 서아프리카에서 미국으로 건너가 이른바 ‘소울 푸드’의 재료가 됐으며, 북미뿐 아니라 멕시코나 브라질 등 각 지역의 음식 문화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간식류나 별식으로는 작품의 배경이 되는 에누구주 나인스마일의 특산품 ‘옥파’를 들 수 있다. 옥파는 낙화생 완두콩이라고도 불리는 밤바라땅콩 가루에 야자유, 잘게 썬 빨간 피망을 넣고 뜨거운 물에 개어, 바나나 잎으로 만든 주머니에 붓고 삶아 만든 빵이다. 100g 당 367kcal 이상으로 열량이 높은 밤바라땅콩은 열대 아프리카의 식생활과 경제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옥수수 전분을 발효시켜 물에 붓고 끓였다 식힌 ‘아가디’ 역시 바나나 잎으로 싼 간식이다.
캄빌라의 어머니가 성당 사람들에게 대접하는 ‘모이모이’는 동부콩과 고추, 양파, 육두구, 잔새우에 물을 붓고 곱게 갈아 비닐봉지에 담은 다음 잘게 다진 훈제 생선이나 삶은 달걀 등의 건더기를 넣고 찐 것이다. 가벼운 스낵의 일종인 ‘친친’은 밀가루에 달걀을 넣고 반죽해 정사각형으로 잘라 튀긴 달콤한 과자를 말한다.
꼬치요리인 ‘수야’와 ‘아카라’는 나이지리아의 대표적인 길거리 간식이다. 수야는 쇠고기나 생선, 또는 닭고기를 양념해 굽는다. 동부콩 반죽을 공 모양으로 빚어 코코넛 오일에 튀긴 후 반으로 갈라, 새우와 토마토 등으로 만든 매콤한 페이스트를 발라 먹는 아카라도 별미로 꼽힌다. 우리나라에서는 이태원 일부 식당에서 서아프리카 음식을 취급하고 있다. 하지만 재료 수급이 쉽지 않은 탓에 본국에 비해 가격은 비싼 반면 맛은 떨어진다고 한다.
작품의 제목이기도 한 히비스커스는 무궁화와 비슷한 모양의 꽃으로 미국 하와이주의 주화州花이다. 히비스커스는 대부분 루비색에 가까운 새빨간 빛깔로 말려서 차로 우려내면 고운 빛깔이 솟아난다. 설탕이나 시럽을 첨가하지 않아도 은은한 단맛이 나는데, 최근에는 다이어트와 피부 미용 등에 좋다고 해서 대형마트나 커피전문점에서 흔히 볼 수 있다. 캄빌라 남매가 키워내는 보라색 히비스커스는 이전과는 다른 삶에 대한 동경을 상징하는 소재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아이들이 아버지 몰래 가져온 히비스커스 꽃처럼 변화와 균열은 사소한 일상의 흔들림에서 시작된다. 오빠 자자는 성체를 거부함으로써 가톨릭 근본주의자인 아버지의 권위에 맞서고, 그저 무력하게 폭력에 당하고만 있는 줄 알았던 어머니 역시 남모르게 반란을 준비하고 있었다. 다소 비극적인 방식이기는 하지만, 세 사람은 어렵게 자유를 찾게 되며 희망과 두려움이 뒤섞인 내일을 준비한다. 저자인 아디치에는 이 이야기를 통해 아직도 세계 곳곳에서 진행 중인 여성에 대한 폭력을 고발하는 동시에, 고난 속에서도 포기할 수 없는 가치들을 역설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