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톤 체호프 단편소설 속 러시아 서민 음식문화
아무리 산해진미로 배를 채웠어도 다음날이면 집밥을 찾는 게 사람들의 심리라고 한다. 따라 하기 쉽고 친숙한 맛을 내는 백종원의 레시피가 대중들에게 인기를 끄는 이유도 같은 맥락일 것이다. 이런 심리는 삶을 그려내는 문학작품에도 적용되는 듯하다. 가령 안톤 체호프Anton Pavlovich Chekhov의 단편은 특별할 게 없는 일상을 담고 있으면서도 오늘날까지 사랑받는 명작으로 꼽힌다.
담담한 듯 진한 여운을 남기는 안톤 체호프의 문학세계는 그의 성장 배경에서 그 근원을 찾을 수 있다. 러시아 남부 항구도시 타간로크에서 태어난 그는, 농노 신분이었다가 자수성가한 조부를 두었으며 부친은 잡화상을 운영했다. 청소년 시기에 아버지가 파산하자 체호프는 고학으로 의대에 진학한다. 그 시절 대학, 더구나 의대를 가난한 농노의 자손이 다닌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운 일었다. 게다가 문학이 귀족 계급의 전유물이었던 시대 상황을 볼 때 체호프의 이력은 극히 이례적이다.
체호프가 글을 쓰게 된 계기도 사실은 생계 때문이다. 학비와 가족의 생활비를 해결하기 위해 단편소설을 대중잡지에 기고하게 됐으며 녹록지 않은 창작 환경에서도 「관리의 죽음」, 「카멜레온」, 「하사관 프리시베예프」 등 위트와 감동이 담긴 작품들을 써낸다. 그의 작품을 읽은 작가 D.V.그리고로비치Dmitrii vasilievich Grigoro´vich는 1886년 “재능을 낭비하지 말라”는 충고를 했고, 이는 체호프가 작가로서 본격적으로 활동하는 계기가 된다.
그의 작품에는 소소한 일상을 묘사하는 소재로 음식이 흔히 사용된다. 실제로 미식가였다는 체호프는 지식 계급인 인텔리겐차들이 주로 먹던 메뉴를 작품에 자주 등장시켰는데, 특히 「어리석인 프랑스인」이라는 단편에서는 당시 러시아인들의 식생활과 그에 대한 체호프의 자부심을 읽을 수 있다.
화자로 등장하는 프랑스 서커스 단원 앙리 푸르쿠아는 공연여행 중 아침식사를 해결하기 위해 모스크바 외곽의 한 허름한 레스토랑을 찾는다. 가벼운 수프 한 그릇을 주문하고 기다리는데 그의 옆에는 단정한 신사가 버터와 캐비아를 바른 뜨거운 블리니를 순식간에 먹어치우고, 이도 모자란다며 말린 생선인 발리크와 연어를 추가로 주문한다. 보드카와 함께 그 많은 음식을 즐기는 신사를 보고 앙리는 그가 어딘가 아픈 건 아닌지 걱정한다.
오늘날 프랑스는 미식의 본고장으로 유명하지만 사실 프랑스 음식문화도 다양한 주변국들의 영향을 받아 변화돼 왔으며, 그중에는 러시아도 포함된다. 러시아의 영향을 받은 대표적인 예로는 코스 요리를 들 수 있다. 과거 왕궁이나 귀족들의 식탁은 다양한 음식을 한 상에 차려 먹는 것이 기본이었다. 하지만 날씨가 추운 러시아에서는 음식이 빨리 식어 버리기 때문에 차례로 만들어서 하나씩 가져오는 방식을 택했고, 이 방식은 갓 만든 음식의 맛을 즐길 수 있다는 이유로 프랑스에까지 전파됐다.
식당을 겸한 선술집 ‘비스트로bistro’도 나폴레옹 전쟁 이후 러시아 군인들에게서 유래했다. ‘비스트로’는 러시아어로 ‘빨리빨리’를 뜻하며, 군인들이 음식을 재촉하면서 자주 썼던 단어가 식당을 가리키는 말이 된 것이다. 비스트로는 레스토랑에 비해 가벼운 식사가 제공되며 좀 더 캐주얼한 분위기에서 음식과 술을 즐길 수 있는 장소다.
참고로 프랑스 정부는 예술가들의 회합의 장소이자 사교의 장으로서 역할을 해 온 비스트로의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 등재를 추진하고 있다. 이런 사실들로 미뤄보면 「어리석은 프랑스인」이라는 단편의 제목은 러시아 음식문화에 대한 체호프의 자부심을 담은 게 아닌가 짐작되기도 한다.
작품에 등장하는 블리니와 캐비아는 러시아의 국민 메뉴라 해도 과장이 아닐 만큼 많은 이들이 즐겨 먹는 음식이다. 기온이 서늘하고 토지가 척박한 러시아에서는 밀을 대체하기 위한 작물로 메밀이 많이 쓰였다. 블리니는 막 구워 따끈할 때 그대로 먹기도 하지만 여러 가지 다양한 토핑을 얹어 메인 메뉴, 혹은 디저트로도 즐긴다.
철갑상어 알을 소금에 절인 캐비아는 세계에서 가장 비싼 식재료로도 알려졌는데, 반드시 철갑상어 알만을 사용하는 것은 아니고 같은 철갑상어라도 종류에 따라 가격 차이가 상당하다. 상급에 속하는 철갑상어는 알 하나하나가 또렷하고 회색빛을 띄며, 짠맛보다는 감칠맛이 돈다. 러시아인들은 작게 만든 블리니에 사워크림인 스메타나를 얹고 캐비아를 올려 카나페처럼 먹는다. 여기에 시원한 보드카를 곁들이면 최고의 술안주가 된다.
추운 지역인 만큼 수프 같은 국물 요리도 발달했다. 우리나라 사람들도 한 번쯤 이름은 들어 보았을 보르시는 우크라이나 향토 요리에서 비롯된 대표적인 수프 메뉴다. 중세 우크라이나의 가난한 농민들은 ‘호그위드’라는 식물의 뿌리로 수프를 만들었는데 아린 맛을 없애기 위해 그때그때 구할 수 있는 소의 잡뼈나 다른 채소류, 버섯 등을 넣고 장시간 푹 끓였다. 오늘날 가장 유명한 형태의 보르시는 비트를 넣어 붉은빛이 난다. 여기에 거의 모든 음식에 곁들여지는 스메타나를 넣으면 핑크색의 국물이 뽀얀 수프가 된다.
러시아 하면 차 문화도 빼놓을 수 없다. 단편 「이반 마트베이치」에는 한 학자의 대필 일을 하는 젊은이가 등장한다. 학자가 옆에서 끊임없이 잔소리를 하는데도 청년은 하녀가 가져온 뜨겁고 달콤한 차와 유지가 들어간 비스킷에 마음이 쏠려 있다.
러시아의 차 문화는 1638년 몽골 사절단이 차르 미하일 로마노프에게 선물한 차 200봉지에서 비롯됐다. 네르친스크 조약 이후 중국차가 수입되면서 러시아식 사모바르의 사용도 보편화됐다. 러시아인들은 진하게 장시간 우려낸 홍차를 즐기는데 아무래도 쓰고 떫은맛이 강해지므로 설탕 덩어리나 잼을 입에 물고 차를 흘려보낸다. 함께 먹는 티푸드로는 꿀과 크림을 층층이 넣은 메도빅, 밀피유의 일종인 나폴레옹, 사과를 이용해 만든 당과 빠스찔라 등이 대표적이다. 한러 수교 이후에는 우리나라의 초코파이가 저렴하면서 실속 있는 티푸드로 각광받고 있다.
강과 호수, 숲이 많은 지역적 특성으로 러시아 음식 중에는 각종 베리류와 버섯 등을 재료로 하는 것이 많다. 러시아인들의 베리류 사랑은 체호프의 단편 「구스베리」에서도 엿볼 수 있다. 주식으로는 죽의 일종인 까샤와 거칠고 시큼한 맛의 호밀빵을 즐겨 먹는다. 만두와 비슷한 펠메니도 대중적인 음식 중 하나이다. 추운 기후 탓에 야채는 종류가 적은 편인데 순무, 양배추, 래디시, 오이 등 서늘한 곳에서도 잘 자라는 채소들이 주로 사용된다. 한 TV 예능 프로그램을 통해 알려진 ‘한국 당근’이라는 메뉴는 김치 재료를 구하기 어려웠던 고려인들이 당근으로 만든 절임 요리이다.
한편 체호프의 작품들은 어떤 거대담론이나 철학을 담기보다는 사실을 객관적으로 묘사하는 자연주의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1880년대에 쓰인 「지루한 이야기」에서 화자인 노교수는 반제정 투쟁에 뛰어든 젊은 세대에게 “나에게는 사상이나 감정을 통일하는 공통 이념이 없다”고 대답하는데 이는 체호프 자신의 목소리이기도 하다.
다만 그가 시대정신을 외면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1890년 체호프는 폐결핵이 악화되고 있음에도 죄수들의 유형지인 극동의 사할린섬으로 건너가 제정 러시아의 감옥 제도의 실태를 파헤쳤다. 르포르타주 「사할린섬」과 「유형지에서」, 「6호실」 같은 작품들은 인간 본연의 자유를 해방시키고자 했던 체호프의 의지를 보여준다.
후기작인 「바냐 아저씨」나 「벚꽃동산」에서 체호프는 인민의 평등을 추구하는 마르크스주의 나로드니키와 조금씩 끝을 향해 가고 있는 제정 러시아 사회의 붕괴를 담담하게 그려내고 있다. 의사이기도 했던 그는 농민들을 무료로 진료해 주기도 하고 기근과 콜레라에 대한 대책을 세우며, 학교 건립 ·교량 및 도로 건설 같은 각종 사회사업에도 힘썼다.
러시아 민중에 대한 그의 애정은 소박함 속에 일상의 달고 쓴맛들을 녹여낸 단편 작품들과 그 행간에 묘사된 서민 음식을 통해 오늘날까지도 생생하게 전해지고 있다. 체호프 작품 속 음식 이름들은 분명 우리에게 낯설지만, 일상다반사를 소재로 한 인간의 보편적 정서는 시대와 문화권을 초월해 많은 이들에게 감동을 준다.
*위 글은 북이오 저널(https://prism.buk.io/102.0.14.194)에서도 보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