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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ejin Jeung Sep 28. 2021

『혼불』에 묘사된 남도음식의 세계

관혼상제, 사람의 일생과 함께하는 음식

먼 옛날 우리 조상들은 푸르스름한 혼불이 보이면 두 손을 모아 망자의 명복을 빌었다고 전해진다. 사람의 혼을 이루는 바탕인 ‘혼불’을 주제로 소설가 최명희는 우리 민족의 가장 어두운 시기였던 1930년대, 고통 속에서도 처연한 삶을 이어간 이들의 군상을 담았다. 

이 작품은 양반가 삼대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는 점, 일제 강점기를 배경으로 한다는 점 등에서 박경리의 『토지』와 자주 비교된다. 하지만 다양한 사건들이 복잡하게 얽히며 전개되는 토지와 달리 ‘혼불’에서는 마치 세밀하면서도 거대한 민속화처럼 등장인물들이 태어나고, 사랑하며, 죽어가는 모습들을 담담하게 그려낸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삼신할머니께 감사를 올리려 차리는 ‘삼신상’ (사진 출처: yeoju.go.kr)


최명희 작가는 관혼상제를 비롯해 삶의 주기에 따른 양반가의 풍속 묘사에 많은 부분을 할애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빼놓을 수 없는 존재가 바로 생존과 직결되는 ‘음식’이다. 더구나 오늘날에도 맛의 고장으로 불리는 전라도를 무대로 하고 있는 만큼, 책장을 넘기다 보면 호화로운 잔칫상을 대하는 듯한 기분에 빠져들게 된다.  

삶의 첫 단계, 탄생의 순간에 등장하는 인물은 가련한 운명을 타고난 여인 강실이다. 오류골댁이 그녀를 출산하자 삼신상에는 흰쌀밥 세 그릇과 미역국, 시루떡 그리고 정갈한 정화수가 차려진다. 산달이 되면 흰쌀과 미역을 미리 윗목에 두어 순산을 기원하며, 아기가 태어나면 바로 그 쌀로 밥을 짓고 미역국을 끓여 삼신할머니께 감사를 올리는 풍습이다. 

산모가 먹을 미역은 그 값을 깎지 않으며 꺾지 않고 새끼줄로 묶어야 한다는 금기도 있었다. 미역값을 깎거나 줄기를 꺾어 버리면 태어날 아이의 팔자가 박복해진다는 이유에서다. 또한 시루떡을 올리는 이유는 붉은 팥이 부정한 기운을 쫓아낸다는 믿음에 바탕을 두고 있다.   

이렇게 태어난 아이가 첫돌을 맞으면 무병장수를 기원하는 돌상을 차린다. 귀한 종손 이강모의 돌상에 매안 이씨 집안 사람들은 흰밥과 미역국, 푸른나물, 백설기. 붉은 팥을 묻힌 수수경단, 오색 송편을 준비한다. 돌잡이 음식으로는 과일, 국수, 쌀, 떡 등이 차려지는데, 과일은 자손번창을, 국수는 장수를, 쌀은 부귀를 의미한다고. 눈처럼 하얗고 쉽게 상하지 않는 백설기는 아기가 병 없이 무탈하게 자라기를 기원하는 뜻으로 돌상과 백일상에 오르는 떡이다. 찰수수가루로 빚어 삶은 뒤 붉은 팥고물을 묻힌 수수팥떡도 아기의 백일이나 돌날에 만들어 이웃과 나눠 먹는다. 

소설 『혼불』은 강모와 효원의 왁자지껄한 혼례로 그 시작을 알린다. 효원의 친정 대실에서는 “연한 살코기를 자근자근 칼질하여 갖가지 양념을 넣고 고루 간이 잘 밴 쇠고기를 꼬챙이에 꿰어 석쇠에 굽는 냄새, 같은 쇠고기가 들어가는 음식이라도 도라지가 들어가 참기름에 섞이는 냄새”가 이른 아침부터 코를 찌른다. 부엌 찬모 콩심어미는 뜨거운 솥뚜껑에 연방 기름을 둘러가며 전유어를 지지고, 딸 콩심이는 부서진 떡이며 적 조각을 눈치껏 얻어먹기 바쁘다. 그 옆에서 서저울네는 생도라지를 소금물에 간간하게 삶으며 후춧가루, 소금, 깨소금, 파, 마늘을 언뜻 언뜻 챙긴다. 갖은양념을 한 쇠고기와 도라지, 각종 채소에 잣가루로 장식한 화양적이 순식간에 만들어진다.  

초례가 끝나고 신랑 신부만이 남은 신방에는 다산의 상징인 밤과 대추가 수북하게 놓여 있다. 부부의 금슬을 좋게 한다는 합환주에는 자귀나무 꽃이 사용된다. 하지만 신부의 화려한 옷과 치장도, 자귀나무 향도 어린 신랑 강모에게는 버겁게 느껴질 뿐이다. 이렇게 종부 효원의 고독한 시집살이는 시작된다.  

그런 효원에게 유일하게 의지가 되었던 이가 바로 시할머니 청암부인이다. 신행도 오기 전 신랑을 잃고 매안 이씨 종가에 들어선 그녀는 주어진 운명에 순응하며 가문을 지키는 정신적 지주로 살아간다. 쓸쓸한 삶을 마친 청암부인의 장례는 아이러니하게도 잔치를 연상시킬 만큼 성대하다. 상을 당했을 때 소나 돼지를 잡아 문상객들을 극진히 대접하는 대목에서는 슬픔을 함께 나누자는 공동체 사회의 단면을 엿볼 수 있다. 

이때 대접하는 ‘손님’ 중에는 저승사자도 포함된다. 저승사자들을 잘 대접하면 저승길이 편할 수도 있고, 영혼을 데려가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이 옛사람들의 믿음이었다. 세 사람의 저승사자를 위해 밥과 술, 짚신, 돈 등을 모두 셋씩 차리며, 반찬으로는 간장이나 된장만 올린다. 간장을 올리는 의미가 재미있는데 사자들이 짠 간장 때문에 목이 말라 자주 쉬거나 물을 마시러 되돌아올 것을 기대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고인을 위해서는 살아생전 쓰던 그릇에 미음과 과일을 담고 술을 따라 시신의 동쪽 어깨 닿는 곳에 상을 올린다. 양아들이자 상주인 이기채는 버드나무로 깎은 수저를 들어, 물에 불린 쌀을 입에 넣어주며 어머니의 명복을 기원한다. 제사상에 빠질 수 없는 또 다른 음식이 간납과 탕이다. 간납은 쇠간이나 처녑 그리고 쇠고기와 생선들을 얇게 저미거나 곱게 다져서 밀가루를 입히고 달걀을 씌워 기름에 부친 저냐를 가리킨다. 탕은 쇠고기를 진진히 우러나게 고다가 다시마와 건문어·두부를 함께 넣고 끓이어 건더기는 각각 다른 그릇에 떠서 육찬 어탕 소탕으로 하고 국물은 ‘갱’이라고 해서 따로 국그릇에 하나만 떠놓는다. 그밖에 육포·어포· 건문어·북어포 등 포 종류와 고사리·도라지·삼색 나물과 김치, 떡을 찍어 먹을 꿀이며 간장 초간장이 제사상에 차려진다. 

제수 음식은 굳이 형식에 얽매이지 않고 고인이 생전에 좋아했던 음식을 올리기도 했다. 오늘날 종묘 제의에는 잡곡과 쌀, 고기를 날것으로 진설하고 ‘현주玄酒’라 하여 맹물을 올리는 전통이 아직까지 남아 있다. 

청암부인의 유언은 다음과 같았다. “이제 나 죽고 나서 제사가 돌아오거든 모쪼록 음식을 걸게 하여 아끼지 말고, 술도 많이 빚고, 떡도 많이 허고, 도야지도 잡어서, 그 하루 너나없이 온 동네가 다 재미나고 풍족하게 노나 먹도록 해 주어라. 슬피 울어 곡소리 진동허게 허는 대신, 내 제삿날이 흥겹고 좋은 날이 되도록 부디 성심을 기울여 다오.”

소설을 다 끝맺지 못하고 생을 달리한 최명희 작가도 이와 비슷한 유언을 남겼다. “혼불 하나면 됩니다. 아름다운 세상입니다. 참 잘 살다 갑니다.” 나라도 정체성도 빼잇긴 시절, 등장인물 군상의 옛 가치를 지켜내려는 노력은 마치 떠나가는 혼불을 잡으려는 움직임처럼 공허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생을 마치는 순간까지도 넉넉한 마음을 잃지 않았던 청암부인이나 가련한 강실을 보듬고 감싸 안는 효원의 모습에서 독자들은 오래된 존재만이 지닌 아름다움을 간접 체험할 수 있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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