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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ejin Jeung Sep 28. 2015

미야자키 하야오와  '먹방'

애니메이션 거장의 식탐 엿보기

웹툰 ‘역전, 야매요리’로 인기를 끌었던 정다정 작가가 연재를 잠정 종료하며 소개한 레시피가 다름 아닌 ‘만화고기’다.    


“고기면 고기지 만화고기라니...?’”고 생각할 독자들을 위해 설명을 덧붙인다. 만화고기란 주로 원시시대나 험한 자연환경이 배경인 만화에서 자주 등장하는, 길쭉한 뼈다귀에 몽둥이(!) 형상으로 살코기가 붙어 있는 고기를 말한다. 


만화 속 주인공들은 살이 없는 뼈 부분을 손잡이 삼아 고기를 뜯어먹는다. 이 만화고기의 역사는 생각보다 길어서 80년대 TV 시리즈로 방영된 ‘미래소년 코난’을 비롯한 여러 작품들에 등장해왔다. 


애니메이션에서 만화고기가 주는 잔재미는 ‘현실에선 똑같은 존재를 찾아보기 힘든데 왠지 먹음직스러운’ 모호함에 있다. 


가령, 우리가 빵집에서 구입하는 식빵을 있는 그대로의 모양으로 만화에 등장시킨다면 뭔가 밋밋한 느낌이 들 것이다. 만화에 나오는 식빵은 실제 식빵에 비해 불룩한 윗부분을 과장해서 표현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이처럼 실제와 다른 만화적 과장은 아이러니하게도, 만화 속에서 묘사되는 음식물들을 더 맛있어 보이도록 만든다.   


그렇다면 요즘 유행하는 ‘쿡방’ 이며 ‘먹방’에 더 적합한 장르는 실사 영화나 방송이 아닌 애니메이션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실사보다 더 맛있어 보이는 만화 속 메뉴의 선두주자로, 나는 주저 없이 일본 지브리 스튜디오의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을 들고 싶다. 그가 작품 속에서 묘사하는 다양한 음식들은, 분명히 과장된 모습인데도 군침이 돌게 만든다.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서 낯선 동굴 속으로 들어간 치히로의 부모는 아무도 없는 가게에 차려진 음식들을 게걸스럽게 먹더니 돼지로 변해 버린다. 


이 장면에 나온 음식들은 굵은 돼지 다리며 두툼한 고깃점 등 왠지 제사상에 오를 것 같은 비주얼을 하고 있다. 산 자가 아닌 신에게 바치는 공물들이었으니, 먹은 사람이 무사하지 못할 것은 당연한 이치다. 


신들의 세계로 엉겁결에 들어선 치히로. 제대로 식사도 하지 못한 치히로에게 하쿠는 큼직한 주먹밥 세 개를 주면서 용기를 내라며 다독인다. 허겁지겁 주먹밥을 먹던 치히로, 아니 센은 엉엉 울며 곁에 없는 엄마를 그리워한다. 


다른 작품들에서도 미야자키 하야오의 먹방은 이어진다. ‘이웃집 토토로’에서 사츠키가 우메보시며 생선 등을 올려 정성스레 만드는 도시락은 심플하지만 애정이 느껴지는 메뉴다. 


비교적 최근작인 ‘벼랑 위의 포뇨’를 보면 물고기 모습의 포뇨가 샌드위치 속 햄을 낼름 먹어치우는 모습이 꽤 인상적이다. 또 폭풍우로 전기가 끊긴 날 소스케 엄마는 두 아이를 위해 컵라면에 맛있는 햄을 넣는 ‘센스’를 발휘해 주신다. 


아버지에게 다시 잡혀온 포뇨가 브룬힐데라는 자신의 본명을 거부하듯, 물고기의 음식을 거부하고 햄을 찾는 것은 주어진 운명을 벗어나 스스로의 삶을 찾겠다는 의지로 읽히기도 한다. 


빵을 사랑하는 이들이라면 ‘천공의 성 라퓨타’를 잊지 못할 것이다. 이 작품에는 당시 한국에서는 낯설었던 적양파와 에멘탈 치즈로 샌드위치를 만드는 장면이 나온다. 또 두 주인공 파즈와 쉬타가 빵을 먹기도 전에 달걀 프라이부터 홀라당 먹어치우는 모습은 마치 어린아이들 같아서 웃음을 준다.   

미야자키의 먹방 중에서도 압권은 ‘하울의 움직이는 성’이다. 요리는 하지 않겠다는 캘시퍼를 어렵게 설득해 달걀 프라이를 만들고 있던 소피. 이때 나타난 하울은 두툼한 베이컨을 굽고 완벽한 서니 사이드 업을 만드는 솜씨를 보여주며 여심을 훔쳤다.      


미야자키 하야오가 이처럼 작품 속 음식 묘사에 공을 들인 이유는 무엇일까. 


1941년생인 그는 비행기를 생산하는 군수공장 공장장이었던 아버지 덕분에 비교적 유복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고 한다. 


미야자키의 어머니는 결핵균이 척추에 침입해 생기는 카리에스병으로 오랫동안 투병했으며, 어린 그를 거의 돌봐주지 못했다. ‘이웃집 토토로’의 두 자매, 사츠키와 메이의 어머니가 결핵 요양소에 입원했다는 설정은 아마도 자신의 경험을 투영한 것으로 보인다.


어머니가 부재한 상황에서 미야자키 일가의 형제들은 스스로 청소며 요리 등 살림을 익히는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또한 그가 소년기와 사춘기를 맞을 당시 일본에서는 도쿄를 비롯한 대도시를 중심으로 양식이 빠르게 자리 잡고 있었다. 


미야자키 하야오는 가장 좋아하는 음식으로 돈카츠와 쇠고기 튀김, 쿠사야를 꼽고 있다. 미야자키 가에서만 전해진다는 쇠고기 튀김이나, 생선발효액으로 조리한 쿠사야를 제외한다면 제일 무난한 것이 돈카츠이다. 


돈카츠 하면 자연스럽게 양식이 떠오른다. 당시 양식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고기와 빵, 수프라는 조합을 생각하면 하야오의 음식 표현이 어디서 비롯됐는지를 쉽게 유추할 수 있다.      


미야자키 하야오 작품 속 서양식 메뉴들은 미야자키 하야오가 유년시절 그리워했던 어머니를 연상시키는 요리인 동시에, 작품의 배경이 되는 유럽의 정취를 살릴 수 있는 훌륭한 디테일이었을 것이다.        


‘추억의 마니’를 마지막으로 지브리 스튜디오는 역사 속으로 사라진다고 한다. 그러나 그가 만화를 통해 남긴 아름다운 꿈의 세계와 달콤한 맛의 기억은 언제까지나 사라지지 않으리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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