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Sejin Jeung Sep 29. 2015

앤디 워홀의 통조림 무한복제

캠벨 수프가 상징하는 가공식품과 현대인 

왕가위 감독의 영화 ‘중경삼림’에는 애인이 떠나간 날부터 매일 파인애플 통조림을 하나씩 사 모으고, 그녀가 돌아오지 않자 모아둔 통조림을 한꺼번에 먹어치우는 남자가 나온다.


이 장면은 마치 통조림처럼, 자기 자신이라는 틀 속에 박제된 채 살아가는 현대인의 모습을 빗댄 명장면으로 많은 영화팬들의 인상에 남았다. 


바로 이 ‘통조림’ 하면 떠오르는 인물 한명이 있다. 바로 캠벨 수프 깡통으로 작품을 만들어낸 화가 앤디 워홀이다. 


1928년 미국 펜실베이니아 피츠버그에서 슬로바키아 이민자 가정에서 태어난 워홀은 14세의 나이로 아버지를 잃으면서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낸다. 


홀어머니 밑에서 자란 그는 아르바이트를 하며 학업을 이어갔으며, 카네기 공과대학에서 상업예술을 전공한 후 뉴욕으로 이주해 삽화와 광고 제작을 하게 됐다. 


상업 미술가로 활동하던 워홀이 방향전환을 한 것은 1960년대 초, 인기 연재 만화들을 소재로 실험적인 회화 작품을 그리기 시작하면서부터이다. 


1962년, 페루스 갤러리에서 그는 생애 첫 개인전을 가졌으며 그 유명한 캠벨 수프 깡통 시리즈 37점을 처음으로 공개한다. 


그러나 당시 추상주의가 대세를 이루고 있던 미국 미술계에서 그의 작품은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했다. 한 술 더 떠 갤러리 근처에 실제 캠벨 수프 통조림을 쌓아 놓고 ‘진짜가 단돈 29센트’라고 써 붙여 놓은 관객도 있었다고 한다. 


마치 소변기를 가져다 놓은 마르셀 뒤샹의 ‘샘’이 진짜 미술인가 아닌가 논란을 일으켰던 것처럼, 주변의 흔한 기성품과 대중문화를 차용한 소재는 평단으로부터 혹평을 받았다. 


캠벨 수프 깡통을 그린 이유에 대해 워홀은 “지난 20년간 캠벨 수프는 내 점심 메뉴에 빠지지 않았다”며 “앞으로도 똑같은 일을 되풀이할 것이기 때문에 캠벨 수프를 그린 것”이라고 설명한다. 


그가 작품을 통해 말하고 싶었던 것은 공장에서 찍어낸 물품들처럼 상실된 자아의 정체성이었을 것이다. 값싸고, 아무 곳에서나 살 수 있는 캠벨 수프 통조림은 가난했던 어린 시절의 기억이기도 하면서 평범하기 그지없는 일상의 모습을 반영하고 있다.     


후일 그는 실크 스크린을 이용해 캠벨 수프 깡통 그림을 무제한 복제한다. 이는 상품화에 대한 사람들의 무관심이 점점 커지는 것에 대한 은유로 풀이할 수 있다.  


하지만 그는 복제되는 현대 문명을 거부하거나 비난하지는 않았다. 워홀은 오히려 "나는 미술이 선택받은 소수의 사람들을 위한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미술이 일반 대중을 위한 것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며 대량 생산 시대에 예술의 패러다임도 바뀌어야 한다는 점을 역설했다. 


미술사에서 그의 공은 이처럼 ‘고급스러운’ 순수예술과 ‘저렴한’ 대중예술이라는 공식을 무너뜨린 데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대형마트 한 켠을 차지할 정도로 친숙한 캠벨 통조림은 백년도 훨씬 넘은 1898년 세상에 첫 발을 내디뎠다. 


빨간색과 흰색의 레이블 디자인은 당시 새로 바뀐 코넬 대학의 풋볼팀 유니폼 색에서 착안했다고 한다. 이 디자인은 1900년 파리 만국박람회에서 금메달을 받았으며 미국의 대표적인 장수 로고로 자리 잡게 된다. 


캠벨사에서 생산되는 통조림 수프는 크림 오브 머쉬룸, 청키 뉴 잉글랜드 클램 차우더, 치킨 누들, 미네스트로네, 토마토 등으로 매우 다양하다. 다른 제품들의 캔 디자인은 세월이 흐르면서 일부 변형됐으나 앤디 워홀 작품의 소재로 쓰였던 치킨 누들과 토마토, 크림 오브 머쉬룸의 라벨은 100년이 넘게 같은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 


통조림 수프는 직접 육수를 내서 끓인 수프와는 또 다른 맛이 난다. 마치 짜파게티가 진짜 짜장면과는 다른 매력을 지닌 것처럼 말이다. 한때는 ‘보존’이 목적이었던 통조림 식품은 세월이 흐르면서 통조림에서만 맛볼 수 있는 독특한 풍미를 갖게 됐다.  


일본 드라마 ‘심야식당’에는 손님이 통조림을 가져오면 여러 가지 안주 메뉴로 만들어주는 에피소드가 있다. 원작만화의 외전격인 ‘심야식당:한밤중에 위험한 레시피’를 보면 통조림에도 ‘제철’이 있다는 재미있는 언급도 나온다. 


한 통조림 제조사의 말에 따르면 금방 만든 것은 ‘통조림’의 맛이 나지 않는다고 한다. 가공할 때 채워 넣은 시럽이나 양념장이 잘 배어드는 데는 약 3개월 정도가 걸린다고. 절인 음식은 시간이 지나야 맛있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그럴듯한 이야기다.  


통조림은 또한 각 나라에 따라서 현지화한다. 한국에 통조림이라는 식품이 본격적으로 유입된 계기는 아마도 한국전쟁 무렵, 미군부대에서 나온 군수품들이 일반인들에게 유통되면서부터일 것이다. 


수입품이 태반이었던 통조림은 세월이 흐르면서 조금씩 국산화됐으며 그 과정에서 깻잎이나 번데기, 콩자반 같은 지극히 한국적인 재료들이 등장한다. 


틀에 갇혀 있는 것 같지만 내용물은 문화권과 시대에 따라 천차만별이며, 직접 만드는 것보다는 못하다고 취급받지만 나름의 맛과 매력을 지닌 통조림. 


이런 통조림은 마치 똑같은 얼굴에 똑같은 옷을 입고 있지만 내면에서는 개성을 갈망하는 현대인들의 모습과 닮았다. 앤디 워홀이 캠벨 수프 통조림을 통해 말하고 싶었던 것도 껍질 속에 감춰진 인간의 자유 의지가 아니었을까.

매거진의 이전글 미야자키 하야오와  '먹방'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