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Sejin Jeung Apr 02. 2016

현진건과 함께한 1930년대 뒷골목

식민지 시대 서민의 술안주 내장요리 

“이 사회란 것이 내게 술을 권한다오. 이 조선 사회란 것이 내게 술을 권한다오. 알았소? 팔자가 좋아서 조선에 태어났지, 딴 나라에서 났다면 술이나 얻어먹을 수 있나...”


매일 밤 술에 절어 들어오는 무력한 ‘지식인’ 남편의 모습에 술맛도, 세상 물정도 알지 못하는 아내의 마음은 실패를 통 잡지 못하는 손가락마냥 답답하기만 했을 것이다. 


무늬는 일본 유학 출신 엘리트, 실상은 고학력 백수로 세월을 보내야 했던 식민지 시대 지식인들의 모습은 오늘날 ‘N포 세대’와도 닮아 있어 씁쓸함을 더한다. 


이상이나 현진건의 작품에 나오는 ‘룸펜’이 실제 시대상을 반영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문화인류학 수업 때 읽은 ‘서울에 딴스홀을 허하라’라는 책을 읽으면서이다. 


새로운 세상에 대한 동경과 열망으로 고등교육을 받았던 1930년경 당시 지식인들의 현실은 참담했다. 학교에서 배운 이상을 빼앗긴 조국에서 실현할 기회는 주어지지 않았다. 남들이 말하는 ‘번듯한 지위’를 가지려면 일제에 부역하는 것 밖에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소설가이면서 기자였던 현진건은 ‘빈처’, ‘술 권하는 사회’ 등의 단편을 통해 자조 섞인 목소리로 희망 없는 시절을 묘사했다. 작가 본인의 모습이 담긴 지식인 남성은 술독에 빠져 재산을 탕진하거나, 돈이 되지 않는 글에 매달리며 주변 사람들로부터 ‘루저’ 취급을 당한다.  


현진건처럼 시대에 떠밀려 부유하던 청춘들은 쓰디쓴 술을 마셔가며 절망을 달랬다. 김동인과 같은 친일 문인들은 요릿집에 드나들며 고급 술을 마셨지만 가난한 룸펜들은 주로 막걸리를 대포로 마시는 선술집을 단골로 삼았다고 한다.   


1930년대의 선술집 풍경은 어땠을까. 소설 ‘삼대’에서 친구 김병화에 이끌려 ‘바커스’를 찾은 조덕기는 안주로 나오는 오뎅과 싸구려로 보이는 노란 술에 눈살을 찌푸린다. 부잣집 도련님의 취미에 맞지 않았다는 언급으로 미루어 그다지 점잖은 장소는 아니었던 모양이다. 


조금 더 자세히 들어가 보면 1938년도에 김해송이라는 가수가 음반으로 취입한 ‘선술집 풍경’이라는 노래가 있다. 이 노래 가사에는 당시 서울 뒷골목에 옹기종기 자리 잡은 허름한 술집의 모습이 생생하게 묘사돼 있다. 


“모여 든다 모여들어 어중이 떠중이 모여들어/ 홀태바지 두루마기 온갖 잡탕이 모여 든다/ 얘 산월아 술 한 잔 더 부어라/ 술 한 잔 붓되 곱빼기로 붓고/ 곱창 회깟 너버니(너비아니) 등속 있는 대로 다 구우렷다/ 크윽 어 술맛 좋다(꺽) 좋아(꺽) 좋아(꺽)/ 선술집은 우리들의 파라다이스”


‘곱창, 회깟, 너버니, 추탕, 선지국, 매운탕’이라는 대목에서 그 시절 술꾼들이 즐기던 안주가 어떤 것이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오늘날에도 소주 안주로 인기 있는 곱창에, 이름도 낯선 회깟은 간과 천엽, 양, 콩팥 등의 내장을 회로 먹는 것이었다고 한다. 


대부분이 값싼 재료인 가운데 유독 ‘내장요리’가 많은 것이 눈에 띈다. 지금보다 고기가 귀하던 시절, 양질의 살코기를 먹을 수 없던 서민들에게 내장은 귀중한 단백질 공급원 싼 값에 영양을 섭취할 수 있는 식품이었다. 


그러고 보니 ‘운수 좋은 날’에 나오는, 뼈를 푹 고아낸 설렁탕도 당시 서민들이 선택할 수 있는 가장 사치스러운 메뉴 중 하나였을 것이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동물의 내장은 거의 대부분이 하층민의 식품이었다. 있는 사람들은 먹지 않는, 피비린내와 잡내가 나는 내장을 먹을 만한 것으로 가공하는 데에는 적지 않은 수고가 필요했다.    


대표적인 내장 음식인 곱창만 해도 밀가루를 뿌리고 속을 뒤집어 빨래하듯 뽀득뽀득 씻어내야 먹을 수 있는 것이 된다. 마장동 우시장에 가면 1킬로에 5000원이면 살 수 있는 곱창이 전문점에서 몇 배로 비싸지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한편 미국의 흑인노예들이 먹던 소울푸드, ‘칠링’이라는 음식은 냄새가 훨씬 심한 돼지 내장이 재료이다 보니 요리하기가 더욱 까다롭다고 한다. (단 한번, 정육점에서 싸게 파는 돼지 신장을 가지고 요리해 보려던 적이 있었다. 실처럼 가는 요선을 일일이 제거해야 하는 이 재료는 나를 GG치게 만든 몇 안되는 식재료가 됐다.)


이들이 내장 냄새를 없애기 위해 쓰는 방법은 향이 강한 허브를 넣고 푹 삶는 것이다. 월계수잎과 양파, 정향 외에 때로는 샤프란 같은 고급 향신료가 쓰이기도 한다. 삶을 때 나오는 엄청난 기름을 제거하는 것도 필수 과정이다.         


이탈리아 피렌체의 길거리 음식 중에도 소내장에 각종 향미 야채를 넣고 삶아내 매콤한 소스를 뿌리고 빵에 끼운 샌드위치가 있다. 다만 현지 사람들에게는 조금 마이너한 음식으로 알려졌다고 한다. 이 요리는 ‘셰프끼리’에서 오세득 셰프가 사먹는 모습이 전파를 타기도 했는데, 한국인 관광객들이 잘 먹다보니 아예 한국어 팻말을 걸고 장사하는 곳들도 있다고.   


콜레스테롤 함량이 많은 내장은 술안주로 썩 좋은 식품은 아니다. 그러나 씁쓸한 현실을 독한 술로 지워야 했던 식민지 시대의 청춘들에게 내장은 싼 값에 영양을 보충하고 술맛을 돋우는 친구와도 같은 존재였다. 


가난과 병마 속에서도 끝까지 일제에 투항하지 않은 채 불우한 짧은 삶을 살다 간 문인 현진건. 왁자지껄한 그 시절의 뒷골목 선술집 한 켠에는 술 권하는 사회에 울분을 삼키던 그의 흔적이 남아 있다. 

매거진의 이전글 고통을 이겨낸 예술가의 레시피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