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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ejin Jeung May 01. 2016

고독한 미식가 카트린 메디치

카트린 왕비가 프랑스 음식문화에 끼친 영향

영화 '광해'에서 얼떨결에 임금 노릇을 하게 된 주인공 하선은 12첩 수라가 1인분(!)이라고 착각해 죄다 먹어 치운다. 나중에야 그는 궁녀들이 왕이 남긴 음식으로 식사를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그 이후부터 자신은 팥죽 한 그릇으로 끼니를 때우고 나머지는 궁녀들을 위해 양보하기 시작했다. 


보통 사람이라면 반도 못 먹을 양의 수라를 끼니마다 차려 내는 것은 왕의 권위를 나타내기 위한 일이기도 했다. 그러니 죄다 먹어 치우지도, 남은 것을 주지도 않고 오롯이 아랫사람을 위해 양보하는 왕의 모습은 낯설고도 신기했을 것이다. 이런 측은지심에 감복해 궁녀 사월은 목숨을 버려 가며 그를 지켰으며 허균과 호위무사 역시 하선을 진정한 왕으로 대접한다.


문화권을 막론하고 높은 지위에 있는 제왕이나 귀족들은 자신이 평범한 백성과 다르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애썼다. '벌거벗은 임금님'처럼 화려한 옷에 탐닉하기도 하고, 중세 아랍의 술탄처럼 수많은 미녀를 거느리기도 했다. 귀하고 맛있는 산해진미를 마음껏 먹는 것 역시 자기과시의 일종이었다. 


우리나라 삼국시대의 태종무열왕, 김춘추만 해도 하루 식사로 쌀 6말(108리터), 꿩 10마리, 술 6말을 먹어치웠다고 한다. 이 엄청난 양을 실제로 먹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인류의 역사에서 대식 혹은 미식은 분명 권력과 어느 정도의 상관관계가 있어 보인다. 


식량이 부족하던 시절에 남들보다 많이 먹는다는 것은 사치인 동시에 지탄받을 일이기도 했다. 조지 오웰의 소설 '동물농장'에서 혁명을 일으켜 인간들을 몰아낸 후, 다른 동물들을 지배하고 억압하는 존재는 돼지들이다. 대부분의 나라에서 뚱뚱한 돼지는 욕으로 쓰이며, 똘이장군 만화에서 만악의 근원으로 묘사되는 공산당의 수장 역시 돼지 캐릭터이다. '게걸스럽게' 음식을 탐하는 돼지는 늘 식량이 부족했던 농민들에게 있어 자신들의 고혈을 빠는 권력자와 비슷한 이미지였을 것이다. 오늘날 사람들이 날씬한 것을 선호하고 뚱뚱한 사람을 혐오하게 된 근원도 여기에 있지 않을까 싶다.  


서양음식의 역사에서 대식과 미식을 구별짓고, '많이 먹는 문화' 대신 '우아하게 먹는 문화'를 태어나게 한 장본인은 이탈리아 출신의 한 여인이었다. 바로 프랑스 발루아 왕조 앙리 2세의 아내 카트린 드 메디치이다. 13세의 나이로 이탈리아에서 프랑스로 시집 온 그녀는 자신의 결혼식 날, 당시로서는 파격적이었던 하이힐을 신을 정도로 멋과 유행에 민감했다고 한다. 카트린은 포크 사용법도 몰랐던 프랑스인들에게 이탈리아의 음식문화를 전파했으며, 발레를 들여 오고 최초의 향수 판매점을 열기도 한다.

 

그녀가 전파한 음식 중에서 가장 인기를 끌었던 것은 결혼 피로연에서 대접한 셔벗으로, 지금도 프랑스의 고급 레스토랑에 가면 식사 중간의 입가심으로 셔벗을 내준다. 또한 어린시절 수녀원에서 배웠던 콩피즈리(사탕과 캬라멜, 누가 같은 캔디류) 만드는 법을 선보였다. 아몬드 크림이 들어간 타르트나 머랭을 사용한 마카롱도 그녀가 들여온 것이다. 프랑스 왕실은 이전에 맛보지 못했던 귀하고 달콤한 과자 맛에 금방 빠져들었다. 


한편 카트린 메디치 자신이 좋아했던 음식은 수탉의 볏과 신장, 아티초크의 심 등이었다고 전해진다. 정력에 좋다는 속설이 있는 닭벼슬은 젤리처럼 쫀득한 질감에 개구리 다리와 비슷한 맛을 낸다고 서양의 미식가들은 말한다. 향미 야채를 넣고 푹 삶아 먹는 것이 일반적이며 이탈리아 피아몬테 지방에는 역사가 200년이나 된 닭벼슬 스튜 '피난지에라'라는 요리가 유명하다. 


최근 TV에서 건강식품이라고 소개되기도 했던 아티초크는 엉겅퀴과 식물의 꽃봉오리이며, 삶아서 잎을 한 장씩 떼어 도톰한 아랫부분을 갉아 먹는다. 심 부분은 그대로 먹거나 각종 요리에 쓰이고 백화점 수입식품 코너에 가면 올리브오일에 담가 병조림으로 파는 것을 볼 수 있다. 껍질 때문에 크기에 비해 먹을 수 있는 양이 적다는 것, 부드럽고 담백한 식감이 여러 모로 봄철 별미 죽순과 닮았다. 왕비가 즐긴 섬세한 맛의 아티초크는 곧 프랑스인들의 마음을 사로잡았고 요즘도 고급 식재료로 불린다. 


화려한 일상생활과 달리 카트린 메디치의 삶은 고독하기만 했다. 남편인 앙리 2세는 결혼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19세 연상인 디안 드 푸아티에 후작부인과 사랑에 빠진다. 여기에 카트린을 총애하던 시아버지 프랑소아 1세가 사망하자 그녀는 '이탈리아 장사꾼 딸내미' 등의 모욕을 받으며 푸아티에 후작부인이 주는 수모를 견뎌야 했다고 한다.    


상황이 역전된 것은 앙리 2세가 마상시합 도중 죽고 아들 프랑수아 2세를 섭정하면서부터이다. 발루아 왕조의 왕권이 기즈 가문에 의해 흔들리자 카트린은 이 같은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신교도와 구교도의 갈등을 이용한다. 프랑수아 2세가 죽고 신교도에게 호의적인 차남 샤를 9세가 집권하자 그녀는 신교도를 암살할 계획을 세우는데 그것이 바로 '성 바르톨로메오 축일의 학살'이다. 


카트린 메디치가 희대의 악녀로 불리게 된 것은 이 사건이 계기이나, 한편으로 그녀는 자신의 딸 마고와 위그노인 앙리 나바르(앙리 4세)를 혼인시켜 신교와 구교의 화합을 꾀하기도 했다. 당시 역사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이자벨 아자니 주연의 영화 '여왕 마고'를 보면 알 수 있다. 


샤를 2세 이후 집권한 앙리 3세는 좀처럼 카트린의 뜻에 따라 주지 않는 아들이었다. 그는 기즈 공작을 암살하고 어머니의 조언자들을 해고했으며, 결국 황태후인 카트린을 정치에서 배제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가톨릭 세력의 구심점이었던 기즈 공작의 사망으로 앙리 3세는 지지기반을 잃게 된다. 후일 그는 나바르의 앙리와 친하게 지내며 위그노에게 관대한 정책을 폈으나 후손 없이 세상을 떠나 발루아 왕조는 대가 끊기게 된다.  


많은 예술작품에서 카트린 메디치는 권력에 사로잡힌 비정한 여인으로 묘사된다. 그러나 젊은 시절에는 남편의 사랑을 받지 못했고, 세 아들들이 권력투쟁 속에 단명하고 만 그녀의 일생은 알고 보면 불행의 연속이었다고 할 수 있다. 카트린 왕비는 쇠퇴해가는 발루아 왕조를 지키기 위해 몸을 바쳤으나 궁궐 내에서나 백성들에게나 외면당하며 살아야 했다.

 

카트린 메디치가 궁중 문화와 세련된 음식에 탐닉한 것은 한 여인으로서의 행복을 누리지 못한 것에 대한 대리만족이었는지도 모른다. 아티초크와 닭내장, 마카롱 등 온갖 산해진미가 차려진 그녀의 식탁은 아마도 겉보기에는 화려하지만 고독했을 것이다. 만약 카트린 왕비에게 음식을 나눠 먹을 누군가가 있었다면 그녀의 삶은 조금 달라지지 않았을까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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