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탕과 함께해온 인류의 역사
'슈가보이' 백종원의 레시피가 연일 화제다. 네티즌들은 음식마다 설탕을 듬뿍 집어넣는 장면을 폭포수 사진으로 패러디하는가 하면 깨알같은 드립으로 백주부의 설탕 사랑을 재미있어하며 웃는다. 하지만 그가 음식에 쓰는 설탕의 양이 맛집으로 이름난 식당과 비슷하거나 오히려 적은 편이라고 하면 이들의 반응은 조금 달라질 것 같다. 가령 캔으로 나오는 아이스티만 해도 집에서 같은 맛을 내려면 엄청난 설탕이 들어가야 한다.
식당에서 파는 한식 메뉴에 단맛이 조금씩 강해졌다는 것은 어르신들이나 오랫동안 요리를 해온 사람들이라면 대부분이 아는 사실이다. 특히 불고기를 보면 그렇다. 일제시대 일본식 야끼니꾸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요즘의 야끼니꾸는 고기를 그대로 구워 소스에 찍는 방식으로 단맛을 조절하는 반면 우리나라의 불고기는 왜간장에 설탕을 듬뿍 넣어 '들척지근'한 맛을 낸다.
인간이 단맛을 좋아하는 것은 에너지를 보충하기 위한 본능적 행위라고 한다. 단맛은 또한 부의 상징이기도 했다. 유럽의 귀족들은 설탕공예 감상을 즐기며 부를 과시했다. 우리나라에서도 꿀과 기름이 듬뿍 들어간 유밀과는 왕실에서나 맛볼 수 있는 사치품이었다고 한다. 제국주의 시절, 서구 열강은 플랜테이션 농업을 통해 사탕수수 재배를 확장했다. 하와이의 한인 이민 1세대도 사탕수수 농장의 노동자들이 대다수였다.
그러나 값싼 사탕무 재배가 보급되고 설탕 만드는 기술이 발전하면서 그 귀하던 설탕의 몸값은 떨어지고 만다. 과거에 흰 보석처럼 대우받던 설탕은 이제 건강의 적으로까지 불릴 정도로 위상이 추락했다. 사실 적당량만을 섭취한다면 설탕은 두뇌활동을 촉진하고 피로를 덜어 주는 등 긍정적인 역할을 하는 식품이다. 중국에서는 생리통이 심한 여성이나 산모에게 민간요법으로 더운물에 탄 흑설탕을 주기도 한다. 문제는 이 설탕이 들어갈 음식, 안 들어갈 음식에 남용된다는 것이다. 신맛을 조절해 주고 어떤 음식이든 입에 짝짝 붙게 하는 설탕의 유혹을 많은 식당 주인들은 뿌리치지 못한다.
한편 설탕 재료로 선호되는 농작물은 사탕수수, 사탕무, 메이플 시럽 등이다. 과거 중동 지방에서는 단맛이 강한 대추야자에서 설탕을 뽑아 쓰기도 했다고 한다. 우리 주위에 가장 흔한 설탕은 순수하게 자당만을 추출해 만든 백설탕으로, 소금으로 친다면 불순물을 제거한 정제염과 비슷하다고 볼 수 있다. 그밖에 황설탕, 흑설탕, 그래뉴당 등이 용도에 따라 다양하게 이용되고 있다. 시중에선 드문 설탕 종류로 얼음설탕이 있는데, 이 설탕은 물에 용해되는 속도가 매우 느리기 때문에 과실주를 담글때 아직 즙이 충분히 우러나지 않은 과일들이 떠오르는 것을 막아준다.
필자는 중국에 있을 때 가공하지 않은 사탕수수를 종종 사먹곤 했다. 비주얼은 자주색 대나무처럼 생겼으며, 칼로 잘라 주면 쪽쪽 빨거나 씹어서 단물을 마시는 것이다. 그런데 질감이 상당히 거칠어서 마치 생나무를 씹고 있는 기분과 함께, 고작 이거 먹자고 내가 왜 이런 고생을 해야 하냐는 생각이 든다. 먹고 난 뒤에 남는 끈적한 설탕물도 문제고. 그래도 최근에는 길거리에서 직접 짜낸 사탕수수를 음료로 팔기 때문에 훨씬 편하게 즐길 수 있게 됐다. 설탕 정제 과정에서 파괴되는 다양한 영양소가 풍부하다고는 하지만 어차피 그래봤자 설탕물이니 큰 약효는 기대하지 말자.
설탕 소비량이 엄청난 지역으로는 중동을 들 수 있다. 술을 금지하기 때문인지 이곳 사람들은 정말 '무식하게' 단 것을 좋아한다. '터키쉬 딜라이트'라고도 불리는 젤리 '로쿰'은 한 입 넣으면 설탕이 입 안에서 폭발하는 느낌이 들 정도로 단맛이 강하다. 얇디 얇은 페이스트리에 설탕물을 흠뻑 적신 '바클라바'라는 터키식 과자 역시 단 것을 아무리 좋아하는 사람도 두 개 이상 먹기 힘들다. 더구나 히잡으로 온 몸을 가리고 다니는 이 지역 여성들은 몸매 관리에 영 신경을 쓰지 않으니, 비만이 은근 문제가 되고 있다고 한다. (이태원 이슬람사원 가는 길목에 터키 과자 전문점이 있으니 궁금한 분은 한번 드셔 보시길...)
설탕의 맛을 제대로 살린 요리로는 '크렘 브륄레'를 꼽을 수 있다. 영화 '아멜리에'에서 주인공이 스푼으로 톡톡 두드리던 바로 그 디저트 말이다. 크렘 브륄레를 만들 때는 부드럽고 말캉한 푸딩 위에 설탕을 뿌린 후 토치로 지져준다. 살짝 태운 설탕의 맛이 어릴 적 즐겨 먹던 '달고나'와도 비슷해서 왠지 친근감이 든다. 지나치지만 않는다면, 설탕은 일상의 작은 활력소가 되는 음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