짚신도 짝이 있다
<데이팅 프로젝트> 매거진은 건어물녀였던 제가 적극적으로 연애하기 위해 노력했던 3개월 동안 만난 사람들과 느낀 점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데이팅을 시작한 지 두 달쯤 됐을 때부터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데에 번아웃이 왔다. 데이팅 프로젝트를 시작한 내가 제일 나쁘긴 하지만 사람을 언제든지 대체할 수 있는 ‘만나보고 서로 아님 말고’라는 태도를 가지게 되는 것도 별로였고 잘 모르는 사람들과 문자를 주고받아야 하는 것도 기가 빨렸다. 그리고 그즈음 사귀는 사람은 아직 없었지만 고정적으로 만나는 사람들이 두 세명 있었다. 그래서 더 이상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싶지 않을 무렵 프레드라는 중국계 미국인을 만났다. 프레드는 내 취향을 저격했다.
그가 특별했던 이유 (짚신도 짝이 있다)
1. 효율적이었다. 약속을 잡는 용도 외에는 문자를 전혀 하지 않았다.
나는 용건 없이 문자로 길게 이야기하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 그도 역시 문자를 서로를 알아가기 위한 도구가 아니라 단지 약속을 잡기 위한 도구로 사용했다. 마치 미용실 예약하듯 거의 첫 문자부터 2개의 시간 옵션중 택일, 그리고 3개의 장소 옵션 중 택일을 하라고 했다. (나는 이런 효율적인 제안이 너무 좋았다) 그가 제시한 3가지 장소는 모두 내가 가본 레스토랑이었고 내가 좋아하는 분위기여서 장소 선정으로 알아본 취향도 마음에 들었다.
약속을 잡은 후에는 레스토랑 예약 확인 문자와 전날 컨펌 문자 외에는 아무런 연락이 없었다. 그와의 데이트는 첫 데이트로 끝나지 않았는데 그 이후로도 그는 항상 데이트 끝에 헤어지기 전에 다음에 만날 약속을 잡고 문자는 약속을 컨펌하는 용도로만 이용했다. 중간 연락이 전혀 없었다. 1주일에 한번 꼴로 만나면서 평일에 “뭐해?” 혹은 “오늘 뭐했어?” 같은 문자는 절대 하지 않았다. 아마 호불호가 갈리는 스타일일 것 같다. 그의 문자 스타일이 좋다기보다는 나와 잘 맞았던 것 같다.
2. 정말 열정적이었다.
나에겐 금융계 종사자는 열정보다는 돈을 위해 일한다는 편견이 있었다. 내가 아는 거의 모든 금융계 종사자들은 모두 높은 연봉을 받았고 자신이 높은 연봉을 받는다는 사실을 즐겼지만 자신의 직업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경우가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프레드가 금융인이란 걸 알았을 때, “에휴, 그럼 돈만 밝히겠네. 난 그런 사람은 진짜 별론데. (You must be a douchebag. You should date someone else)”라고 했더니 웃으면서 충분히 그렇게 생각할 만 하지만 자신은 정말로 자신의 일을 사랑하고 돈을 못 번다고 해도 이 일을 할 거라고 했다.
그는 10살 때부터 주식투자를 시작했고, 중고등학교 때 전문 투자책들을 탐독했고, 전문투자자가 되기 위한 목표를 가지고 양질의 금융교육을 제공하는 NYU에 진학했고, 졸업 후에는 투자회사에 다니면서 주말에는 취미로 투자 뉴스를 보고 투자 책을 읽었다. 매우 바쁜 직장에 다니면서도 자기가 운영할 펀드를 알음알음 준비하고 있었다. 투자 오타쿠에서 투자 일을 하게 된 케이스였고 진정한 덕업 일치를 이룬 사람이었다. 자신의 직업은 매우 자랑스러워하면서 자신의 일은 사랑하지 않았던 사람들에게 지쳐있었을 때 프레드의 순수한 열정은 신선하고 매력적이었다. 나도 투자가 취미라 깊은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3. 가치관
프레드와 나는 가치관이 비슷했다. 어떻게 대화가 여기까지 흘러갔는진 모르겠지만 첫 만남에 우리는 ‘성공은 무엇인가’에 대한 이야기도 나눴다. 나는 사람의 성공은 출발점 대비 얼마나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는가로 성공을 측정해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예를 들어 대통령과 평범한 사람을 비교한다고 해도 평범한 사람이 더 성공했을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아버지가 조지 H 부시 대통령이었던 조지 W 부시가 대통령이 된 건 개인적으로 큰 성공이라고 보지 않는다. 조지 W 부시는 공부를 못했는 데도 불구하고 예일대에 들어갔으며, 이미 정계와 백악관에 자신을 밀어주고, 자신을 위해 일해줄 세력이 있었다. 그에 비해서 가난하게 태어났지만 열심히 일해서 자기 손으로 일구어 평범한 삶을 살게 된 사람이 훨씬 더 성공적인 삶을 살았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나도 내 손으로 일구는 스스로 획을 긋는 삶을 살고 싶다고 했다. 프레드는 자신의 대학 입학 에세이와 정확하게 같은 내용이라며 눈이 반짝였다.
4. 남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았다
대화가 길어진 나와의 첫 데이트에서 프레드는 레스토랑에 있는 메뉴를 전부 다 시켰다. (메뉴가 한 10~15개밖에 없긴 했다) 그 레스토랑이 꽤 고급 레스토랑이었기에 반을 낼 나도 좀 부담이 됐지만 음식도 맛있고 대화가 즐거워서 시키는 대로 두었다. 그런데 프레드는 내 카드를 마다하고 40만 원 상당의 저녁값을 혼자 치르고 모범택시 (Uber SUV)를 불러 주었다. 그는 정말 먹는걸 좋아해서 그 이후에도 만날 때마다 레스토랑 상다리가 휘어질 정도로 음식을 시켰고 항상 혼자 계산했다.
그런데 이렇게 후한 씀씀이를 보여준 그가 입고 있던 셔츠 겨드랑이에는 구멍이 뚫려 있었다. 입고 온 리바이스 청바지는 그의 몸에 비해 너무 커 보였고 낡아 보였다. 그리고 그다음에 만났을 때 입고 온 셔츠에도, 그다음에 만났을 때 입고 온 셔츠에도, 모두 다른 셔츠였지만 역시 구멍이 뚫려 있었다. 하의는 항상 그 지나치게 크고 낡은 리바이스 청바지였고 신발은 항상 첫날 신었던 갈색 구두를 신었다. (그는 구두가 한 켤레 뿐이었다!) 그는 남에게 외적으로 잘 보이는 것에 아무 관심이 없었다. 사실 나는 특이하게도 옷을 잘 못 입는 사람이 취향이라 옷의 구멍이 마음에 들었다. 그리고 돈을 쓰는 패턴이 남의 시선에 맞춰져 있지 않고 자기 소신대로 인걸 보고 자신만의 철학이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5. 정중했다. (TMI 주의)
나는 프레드와 정기적으로 데이트 하기 시작했다. 세 번째 데이트 날 라이브 재즈바에서 그가 키스해도 되냐고 물었다. (나중에 알았지만 자신도 그렇게 물어본 건 처음인데 나한텐 물어보지 않고 하면 뺨을 맞을 것 같았다고 했다.) 나는 잠시 생각한 후에 좋다고 했다. 마음의 준비를 할 시간을 준 게 고마웠다.
그리고 네다섯 번째 데이트 때 자기 집에 같이 가겠냐고 물어봤다. 나는 “좋은 시도였어. 그렇지만 싫어. (Nice try, but no)”라고 한 뒤 친구에게 배운 세련된 거절 스킬 “다음에 (maybe later)”를 시전 했다. 그는 “알겠어. 그래도 시도해 볼 만한 가치가 있었어 (It was worth a try)” 라며 대수롭지 않게 받아들이고 다음 약속을 잡았다. 제안과 거절, 인정 모두 정말 자연스러웠다. 내 페이스대로 기다려 주고 거절당해도 대수롭지 않아 하는 게 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