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는 사람의 시간은 느리게 흘러간다
회사에서 가장 존경하는 사람은 부사장님이다. 원래 우리 회사에서 외부 컨설턴트로 일하다 너무 경영을 잘해서 사장님이 부사장으로 모신 후 일하는 동안 조직에 큰 변화를 가져오신 분이다. 회사에서 너무 중요한 분이다 보니 부사장님과 대화하는 빈도가 권력이고 자랑거리일 정도다. 나는 부사장님과 취미가 같아서 (투자) 직급이 그리 높지 않은데도 운 좋게 부사장님과 대화를 많이 할 수 있었다. 지난 5~6년 동안 부사장님 밑에서 일을 하면서 지적인 젊음을 유지하시는 걸 지켜볼 수 있었던 건 정말 행운이었다.
젊어 보이는 비결은 지적 호기심
5년 전, 처음 회사에 들어왔을 때 조직에 대해 설명해 주던 선배가 내게 부사장님은 만 40대 초중반 정도인 것 같다고 했다. 그런데 최근에 인사부와 결제 문제로 이메일을 주고받던 중 인사부 실수로 부사장님의 생년월일이 노출되었는데 그보다 10세나 연상이었고 한국에서 60대인 내 부모님과 나이가 같아서 깜짝 놀랐다. 보통 은퇴하는 나이를 넘겼다곤 상상할 수 없었던 이유는 여러 가지다.
부사장님의 복장은 항상 단정하지만 특별한 디테일이 없다. 우리 회사의 임원들은 대부분 자신의 자리에 대한 프라이드가 강했고 무게 잡는 느낌과 자기 부서 일 외에는 절대 일을 맡지 않겠다는 뺀질함(?)을 풍겼는데 부사장님은 직위는 대부분의 임원보다 높은데도 그와는 상반되게 빠릿빠릿하고 회사에 도움 되는 일이라면 자신의 일과 아무 상관이 없어도 망설임 없이 곧바로 소매를 걷어붙이고 여러 부서에 컨택해서 바로잡는 대공사를 벌였다. 또한 나와 투자 이야기를 할 때를 제외하곤 누구와도 사담이나 잡담을 하는 걸 본 적이 없었고 그 누가 어떤 폭언을 하던 감정적으로 흔들리지 않았다. (우리 회사에선 종종 미팅 때 언성이 아주 높아진다.) 나와 투자 이야기를 할 때도 전문가처럼 여러 산업에 해박하고 적극적이셔서 재산 증식에 관심이 많고 현역에서 가장 왕성하게 활동하는 40대인 줄 알았다.
지적 은퇴란 없다
어제 일 때문에 부사장님과 통화할 일이 있었는데 “요즘 어때?”라는 통상적인 질문에 으레 답하듯이 “좋아요”라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평소 같으면 바로 긍정적으로 답하는 사람이 무슨 일이냐고 물으시길래 주저리주저리 코로나로 인해 몸은 1년 넘게 집에 있는데 세상은 너무 빨리 바뀌고 있는 상황에 혼란스럽고 5년 전까지만 해도 가장 화두였던 인공지능까지는 이해했었는데 지금은 신문에서 보이는 블록체인, metaverse, NFT 등 내가 이해하지 모르는 것들이 너무 많고, 적자인 인터넷 기업들이 엄청난 기업가치로 IPO를 하는 게 너무 이질적이라는 요즘 생각을 털어놓았다. 그랬더니 너는 너무 어려서 몰랐겠지만 1999년과 2000년 닷컴 버블 때도 그랬다면서 역사는 반복되고 자신의 전문분야 하나만 있으면 다른 모르는 게 많아도 크게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다독여 주셨다.
그리고 15분 정도로 길어진 대화에서 알게 되었는데 부사장님은 매일 6시간에서 8시간 동안 세상 돌아가는 일들과 자신이 모르는 것들에 대해서 공부하는데 보내신다고 한다. 어쩐지 모르는 게 없으시더라니.. 코로나 바이러스가 퍼지기 시작했을 때 대학 바이러스 전문 연구원들이 연구자료를 발표하는 채널을 매일 보면서 전문적으로 공부하셨고, 작년에 일어난 무인 우주선 착륙도 실시간으로 챙겨보면서 당시 상황을 생중계하고 있는 NASA 우주과학 전문가가 어떤 사람인지까지 알고 있을 정도로 세상 돌아가는 일에 관심이 많고 항상 공부하고 무언갈 조사하고 계신 건 알았는데 매일 거의 근무시간에 맞먹는 시간을 공부하는데 쓰실 거라고까진 생각하지 못했다. 내가 크게 놀라는 걸 보시곤 그냥 새로운 걸 배우는 게 좋아서 취미삼아 한 거라며 별거 아니란 식으로 말씀하셨지만 난 대화 후 큰 여운이 남았다.
어릴 때는 느리게 흘러가던 시간이 나이가 들수록 더 빨리 흘러가는 것처럼 느껴지는 이유는 더 이상 일상에서 새로운 경험을 하는 횟수가 적어지고 같은 루틴이 반복되기 때문에 기억에 남는 순간들이 별로 없어서라는 글을 읽은 적이 있다. 생각해 보면 부사장님은 외모가 40대라기 보기에는 머리카락도 반백이고 주름도 있으신데 그 호기심 많고 탐구하는 눈빛이 항상 젊은 기운을 뿜고 있었던 것 같다. 세상에 항상 새로운 것들이 생겨나는 가운데 우리가 모르는 게 많은 건 좋은 일일 수도 있다. 마음만 먹으면 설레는 젊은 마음가짐으로 매일을 새롭게 보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