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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세준희 Feb 15. 2022

할아버지의 느린 죽음

삶과 죽음, 존엄사에 대한 생각

나는 죽음과 가까이 있던 시간이 길다. 할아버지의 느린 죽음을 지켜보았기 때문이다.


아빠와 아빠의 형제들은 효자다. 내가 기억하는 한 아주 어린 시절부터 우리 핵가족은 일주일에 일요일은 무조건 1시간 거리에 있는 할아버지 댁에서 종일 보냈다. 내가 중학생 때 할아버지의 치매가 시작되었다. 치매가 진행되면서 간혹 폭력적인 성향을 보이셔서 처방받은 약이 원래 한쪽 다리가 불편하셨던 할아버지의 몸을 더 약하게 만들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침대에서 일어나지 못하시게 되었다. (그때는 몰랐지만 지금 생각하면 약을 잘못 쓴 것 같다.)


할아버지가 아프기 시작하신 후 할머니는 오랫동안 사시던 텃밭과 정원과 감나무, 은행나무가 있던 전원주택에서 대병원과 접근성이 좋은 도심의 아파트로 이사하셨다. 새로운 아파트와 우리 집과의 거리는 30분으로 줄어들어서 여름방학과 겨울방학에 한국에 갈 때마다 일주일에 두세 번씩 방문해서 시간을 보냈다. 할아버지는 그 후로 10년을 넘게 사시며 아파트 거실 한가운데에 있는 침대에 한결같이 누워 계셨다. 가족들이 거실에서 복작이며 텔레비전을 보고, 식사를 하고 과일을 먹는 동안 같은 공간의  중심에서 할아버지의 생명이 조금씩 꺼져갔다.


치매가 발병하고 곧 할아버지는 대소변을 가릴 수 없게 되셨다. 가끔씩 정신이 돌아오실 땐 며느리와 손자 손녀들이 지켜보는데 대소변을 받는 것에 대해 화를 내신 적도 있었다. 그럴 때면 우리는 할아버지의 시야 밖으로 자리를 피하곤 했다. 그런 항의할 기력도 첫 1-2년뿐, 머지않아 사라졌다.


누워계신 방향도 하루에 몇 번씩 바꿔야 했다. 한쪽으로만 누워계시면 눌린 곳에 욕창이 생기기 때문이다. 할아버지 댁에는 항상 상주하고 있는 입주 간병인이 있었는데, 그 간병인은 월급을 주는 할머니에게는 영업용 미소를 지으며 친절했지만 말을 못 하시는 할아버지는 확확 거칠게 다루었다. 그럴 때마다 할아버지는 고통에 비명을 지르셨다. 한때는 카리스마 있는 사업가셨고 지금 계신 집과 간병인의 월급까지 전부 할아버지가 건강하실 때 이룬 것들이었지만 이제는 간병인의 손에 무력하게 의지하고 계셨다. 모두가 할아버지와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간병인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었다. 할아버지를 부드럽게 다뤄달라고 공손히 부탁하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의학적으로 할아버지는 최고의 의료 서비스를 받으셨다. 할머니와 자식들은 할아버지의 삶을 늘릴  있는 모든 의학적인 방법을 동원했다. 할아버지가 누워계신 상태로 10년을 사신 것은 의료 기술 덕분이었다. 아마 집에서 모든 가족이 동참하고 외부 인력을 동원해서 극진히 모시지 않았다면 길어도 2~3년밖에  사셨을 것이다. 가족들은 할아버지가 기능을 하나씩 상실할 때마다 의학적인 도구를 동원해서 기능을 대체했다. 그렇지만 의학적인 도구는 기능보다 항상 떨어졌고 점점 꺼져가는 생명을 천천히 타게  , 다시 불타게  수는 없었다.


처음엔 풍채가 좋았던 몸에서 지방이 빠졌고, 누워 있는 세월이 지날수록 근육이 빠져서 나중에는 피부 아래 바로 뼈가 보였다. 뼈와 피부가 너무 가까이 있고 완충역할을 하는 근육이 없다 보니 아무리 돌아 눕는다고 해도 뼈에 눌려 피가 통하지 않아 몸의 곳곳의 생살이 썩어갔다. 내장 근육도 약해지면서 배변기능이 약해져서 관장으로 변을 빼내야 했고, 어느새 더 이상 음식을 소화하는 기능을 상실하셨을 때는 관으로 간 음식을 넣어드리는 장치를 항상 몸에 장착하고 있어야 했다. 그런데 이 장치가 외부에서 장기로 연결되는 장치이다 보니 주기적으로 교체하는데도 어쩔 수 없이 오염되기도 해서 염증이 생기고 심할 땐 패혈증이 와서 응급실과 중환자실을 오가는 일도 몇 번 있었다. 어느새 내가 대학도 졸업하고 어른이 되어 있었던 어느 날 할아버지가 주무시다가 밤에 평화롭게 숨을 거두시기 전까지 의학은 충실하게 성실하게 할아버지를 살렸다.


할아버지의 대소변을 받아내는 것, 욕창을 소독하는 것, 호스로 음식을 넣어드리고 관장을 하는 것을 보는 것은 내겐 매일 밥을 먹다가도, 티브이를 보는 중에도 일어나는 생활이고 일상이었다. 늘 거실 한가운데 계셨던 할아버지의 느린 죽음과 10년 동안 함께하면서 건강의 상실과 죽음에 대해 오랫동안 생각했다. 뇌는 생각을 할 수 없고, 몸은 움직일 수 없고, 스스로 음식을 소화할 수 없고, 배변할 수 없고, 오로지 숨만 쉴 수 있는 몸을 인간다운 삶이라고 할 수 있을까. 가족들은 할아버지를 사랑하고 존경하는 마음에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해서 할아버지를 살리고 최대한 오래 사시도록 했지만 사람답게 살 수 있는 기능과 모든 존엄을 상실한 상태로 살아만 있는 상태가 타의에 의해 계속 지속되는 게 과연 할아버지를 위한 일이었을까. 예전에 건강하셨던 때의 모습보다 누워계셨던 모습이 더 선명하게 남아 있어서 할아버지를 기억할 때 아픈 모습을 떠올리게 되는 게 속상하다.


모든 살아 있는 것들은 죽는다. 언젠간 나도 죽을 것이다. 그리고 그때가 오면 적어도 내가 죽음을 선택할 수 있는 상태로 죽고 싶다. 고통스러운 상태로 억지로 계속 살고 싶지 않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엄마도 내게 나중에 엄마가 아프게 되어서 의학의 도움 없이는 살 수 없게 되면 억지로 연명하지 않고 죽게 해달라고 말했다. 내가 그런 입장이 되면 엄마의 죽음을 ‘선택’ 하기 쉽지 않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게 엄마를 위한 선택이고, 옳은 선택이란 걸 알고 있다.


친할아버지가 돌아가신 지 8년 여가 지난 지금, 지난 몇 년 동안 천천히 건강이 악화되어 오셨던 80대 후반의 외할아버지가 중환자실에 계신지 몇 달이 되었다. 이제는 친할아버지에게 했던 것처럼 의학 장치를 이용해서 살아있는 상태를 지속할지 보내드릴지를 결정해야 한다고 한다. 항상 장난스럽고 사람을 좋아해서 손님이 끊이질 않고 활기찼던 외할아버지마저 후에 할아버지를 추억할 때 아픈 모습으로 떠올리게 될까 봐 두렵다. 엄마는 엄마를 위해 해달라고 했던 선택을 엄마의 아빠를 위해 해야 하는 상황에 처해 있다. 이제 다시 건강하게 살 가망이 없으신 상태지만 엄마의 형제들도 아빠와 아빠의 형제들이 그랬듯 할아버지를 보내드리지 못하고 의학적 장치를 하나 둘 늘려가고 계시다. 상태가 좋아지면 고통을 느끼셔서 소리를 내시다가 다시 안 좋아지면 아무 반응이 없는 상태를 지속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렇지만 정답을 알면서도 결정이 쉽지 않으신가 보다. 


재작년에 오빠의 딸이 태어났고, 지금 다음 달이면 태어나는 아기가 내 뱃속에 있다. 매일 새로운 것이 피어나고 오래된 것들이 시드는 자연의 섭리가 지속되는 가운데 세월이 가면서 우리가 장성해서 부모가 되는 삶의 새로운 변화에 대해서는 하루 종일 고민하고 생각하면서도 이렇게 흘러가는 세월이 외할아버지를, 엄마 아빠를, 그리고 나를 죽음에 한발 더 가깝게 하는 흘러감이기도 하다는 사실은 망각하고 있었다. 흘러가는 세월을 잡을 수는 없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인생의 순간순간을 최대한 느끼고 만끽하고 즐기면서 주어진 ‘살아감’을 극대화하는 것뿐이다.


향후 몇 년 안에 존엄사가 합법화되었으면 좋겠다. 건강이 내 몸을 지탱하고 있을 때 최대한 열심히 살아가고, 그 한정된 시간이 끝났을 때 삶을 정리하는 준비를 하고 내 손으로 마무리할 수 있는 존엄사가 있다면 반드시 그렇게 가는 길을 택하고 싶다. 어느 날 남편이나 나의 건강의 유통기한이 다했을 때, 살아있는 상태로 좋아하는 사람들을 모두 불러서 파티를 열고, 그걸 장례식 인 셈 치고, 같이 고통 없이 존엄사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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