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세준희 Sep 10. 2021

가정을 위해 살아야 하나 자신을 위해 살아야 하나

친구 결혼식에서 같은 테이블에 앉은 인도 여자 P와 대화를 나누었다. 내 또래인데 (30세 전후) 매일 아침 4시에 일어나서 요가를 하고 10대 초반에 어머니께 명상을 배운 후 지금까지 매일 20분 명상으로 하루를 시작한다고 한다. 자신을 위한 일들로 꽉꽉 채운 하루에 새로운 사람을 끼워 넣기가 힘들어서 연애도 미루고 있다고 했다. 그녀의 표정과 신체에 생기가 넘쳤다. 모닝 루틴의 즐거움을 나도 느껴봤기에 강한 부러움을 느꼈다. 내 '모닝 루틴' 은 '모닝' 이 빠진 지 꽤 됐다. 남편이 최근 1~2년간 일이 많이 바빠지며 저녁 8~9시에나 퇴근하게 되었고, 남편과 조금이나마 시간을 보내려면 나도 취침시간을 늦춰야 했고, 취침시간이 늦어지며 새벽에 일어날 수 없어졌다. 내 무너진 모닝 루틴에 대해 듣고 P는 자신의 어머니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P의 아버지는 성실하게 쉬지 않고 일을 해서 비즈니스를 키우셨고, 덕분에 P의 가족은 경제적으로 편안했다. P의 어머니는 호기심과 에너지가 많았는데 가정을 이룬 후에는 그 에너지를 전부 가족을 위해 쏟았다. 남편이 일에만 집중할 수 있게 일을 제외한 모든 걸 전담했다. 가사와 아이 넷의 육아는 물론이고 밤에 남편의 차에 기름까지 채워 놓을 만큼 남편이 아무것도 신경 쓰지 않게 모든 걸 완벽하게 관리했다. 20년이 흐른 후 P의 가정은 아버지 없이는 굴러갈 수 있었지만 어머니 없이는 단 하루도 버틸 수 없었다고 한다. 때문에 P의 어머니는 혼자 여행을 한다거나 하는 혼자만의 시간을 보낼 수 없었다.


그러나 어른이 된 P를 보면서 어머니는 P에게 부러움을 느끼고 자신의 삶에 회의감을 느끼셨다고 한다. 남편과 가족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내던지지 않았다면? 더 나은 어머니와 부인이기 위해 집중하기보다 자기에게 조금 집중했으면 삶의 만족도가 더 높지 않았을까? 인생이 너무 짧은데 타인을 위해만 살아온 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 후 10년 동안 전담하고 있던 일들을 하나 둘 놓으면서 다른 가족들에게 위임하셨다. 그리고 지금은 다시 자신을 찾아가는 중이라고 한다.





지난 2년간 남편과 나에게 큰 변화가 있었다. 남편의 일이 바빠지면서 원래 비슷하게 나눠하던 집안일에 전혀 손을 댈 수 없게 되었고 그 외의 모든 자잘한 관리업무도 내게 떨어지게 되었다. 부부는 팀이니 내가 남편이 빠진 자리를 채우려고 했다. 남편이 집안일에 참여하지 않아도 집은 여전히 쾌적해야 하고, 건강한 음식이 있어야 하고, 강아지는 산책해야 하고, 망가진건 고쳐져야 하고, 떨어진 물건은 채워져야 했다.


내가 조금만 더 신경 쓰고 시간을 투자하면 전과 같이 살 수 있을 줄 알았지만 그리 만만하지 않았다. 내 생활이 완전히 흔들렸다. 새벽에 일어나서 마음을 가다듬고 모닝 루틴을 소화하던 미라클 모닝도 그만두었다. 내 하루 중 남편의 자리를 채우려는 시간이 점점 늘어나고, 더 이상 내 것을 할 시간과 체력이 남아있지 않게 되었을 때 남편이 미워지기 시작했다. 남편이 조금만 마음에 안 들게 행동해도 '내가 우리를 위해 이렇게 까지 하는데, 네가 감히?'라는 생각이 발끈 들었다. 우리의 삶이 자동차라면 나는 조수석에 타고 있는 기분이 들었다. 누가 어디 타든 상관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아주 상관있었다. 이러다 아이를 낳게 된다면? 나는 사라질 거란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남편은 좋은 사람이고, 나에게 아주 관대하고, 내가 남편을 챙기는 쉬간에 절대 놀지 않고 쉬지 않고 일을 한다. 내가 남편을 위해 노력하는걸 고맙고 미안하게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무엇도 내 자기 효능감을 대신할 수는 없는 것 같다. P의 어머니의 이야기를 듣고 앞으로 나도 내 생활을 포기하고 남편을 서포트하기보다는 내 루틴을 지키는 방향으로 나아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앞으로 남편은 더 바빠질 것이고 그때마다 내가 그 짐을 덜어주려고 하면서 보상심리를 키우기보다는 같이 위임할 대상을 찾고 내가 꾸준히 삶에 만족을 느끼고 행복한 게 서로에게도 좋고 우리 관계에도 좋다고 판단했다.

매거진의 이전글 내가 오만하다고?자신 없어서 그런 건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