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세준희 Feb 20. 2020

일 = 돈벌이 수단  or 자아실현의 도구?

일, 열정, 직업, 돈, 자아, 자아실현, 성취감, 번아웃, 인생계획

학생 때 미래에 사회에 나가서 일을 하는 나의 모습을 그려봤을 때, 그 모습은 뭔가 원대한 일을 하는 그림이었다. 틀에 박힌 일이 아니라 나만을 위해 특화된, 나한테 딱 알맞고 특히 내가 잘할 수 있고, 또 의미 있는 일이어서 타인에게 도움이 되고 성취감을 느낄 수 있는... 그런 자아를 실현할 수 있는 일을 상상했다. '좋아하는 일을 할 수 있다면 돈은 상관없어.'라는 다짐과 함께.


동기들 중 어림잡아 90% 정도는 안정적인 직장에 취직하거나 전문대학원에 진학했지만 나머지 10% 정도는 자신의 꿈을 찾아 세계여행을 떠나기도 하고, 비영리단체를 설립하기도 하고, 전공과 아무 상관이 없는 분야로 가기도 하는 등 소득을 포기하고 열정을 따라갔다. 나는 후자인 사람들을 동경했고 나 역시 처음엔 후자의 길을 갔다. 내 전공분야와 상관이 없고 미래가 밝지도 않은 분야에서 '커리어에 아무 도움이 안 되는' 일을 1년 정도 했다. 시간이 흘러 사회 경험이 7-8년 쌓인 지금, 나는 일단은 자아실현보다 돈벌이 수단을 목적으로 일하는 것도 괜찮다는 생각이 든다.



탄탄한 경제적 기반이 열정에 날개를 달아 준다.

아무리 성격이 좋은 사람도 오랜 시간밥을 먹지 않으면 신경이 예민해지듯이, 금전적인 문제도 오래 지속되면 열정에 걸림돌이 되고 본질을 변질시킬 수 있는 것 같다. 아무래도 금전적인 문제가 있으면 마음이 조급해지기 마련인데,  일단은 최대한 고소득 직장에서 일해서 경제적인 기반을 다진 후에 열정 분야로 가면 금전적인 걱정 없이 느린 페이스라고 해도 자책하지 않고 열정 분야에만 집중할 수 있는 것 같다. 바로 열정을 향해 뛰어드는 것이 멋있긴 하지만, 이보 전진을 위한 일보 후퇴로 다진 탄탄한 경제적인 기반은 훗날 열정을 제대로 쏟기 위한 일종의 보험이 되는 것 같다.



나중에 생각이 바뀐다면, 고소득 분야에서 저소득 분야로 가는 것이 더 쉽다.

어떤 분야던 고고하기만 한 일은 없다. 열정 분야에 실망을 하고 다시 돌아가고 싶을 수도 있다. 나 역시 열정을 쫒아간 곳에서 그곳도 다름없이 세속적이란 걸 알았고 다시 재취업했지만 쉽지 않았다. 내가 그랬듯이 저소득 열정 분야로 갔다가 실망 또는 포기하고 재취업을 하려고 할 때 재취업이 힘든 곤란한 상황에 빠질 수도 있다.


반면, 고소득 직종에서 저소득 직종으로 가는 진입장벽은 훨씬 낮다. 예를 들어 종이 접기에서 법조계로 가기는 힘들지만 일단은 법조계에서 일하다가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아서 돌아올 곳을 만들어 놓은 후 종이 접기로 가는 건 훨씬 쉽다. 나도 열정 분야를 그만두고 나서 재취업이 힘들어서 1년 동안 마음에 들지 않는 직장에서 일을 했고, 결국은 대학원에 진학해서 진로를 다시 바꿀 수 있었다. 처음에 대안을 만들어 두지 않고 열정 분야를 선택했기 때문에 대학원이라는 시간도, 돈도 많이 들어가는 과정을 통해 비싼 수업료를 치른 셈이었다.



'자아'는 계속 바뀐다.

내가 지금 하는 일은 예전에 세속적이고 재미없다고 치부했던 데이터 분석과 투자다. 그런데 예전에 비영리단체, 봉사, 예술 분야에서 일할 때 보다 더 재미있고 하루하루 자아를 실현하는 기분으로 보낸다. 오히려 돈벌이 수단으로 시작했던 일이 적성에 맞아 열정으로 바뀌었다. 그때는 이게 이렇게 재밌는지 몰랐다. 예전에는 내가 세속적인 분야에서 성취감을 못 느낄 줄 알았는데 그건 편협한 생각이었다.


예전에 한국의 문화를 세계화하거나, 인권문제들을 알리는 일들에 의미를 느꼈다면 지금은 마음이 가는 투자 종목에 투자하면서 그 종목을 알아보는 사람들이 점차 늘어나고 회사가 커지는 걸 보면서 성취감을 느낀다. 내가 그랬듯이 내가 나를 완벽히 모를 수도 있다. 하고 싶은 일이던 하기 싫은 일이던 하다 보면, 싫은 일은 싫은 일 대로 배우는 게 많다. 그래서 경험에 살이 많이 붙고 나면 전과는 생각이 바뀔 수도 있다. 그래서 최대한 많은 길을 열어두는 게 좋다.






졸업 후에 열정을 따라갔던 동기들 중 나를 포함해서 50% 이상이 다시 돌아와서 안정적인 직장에서 일하고 있다. 열정을 따라갔던, 돈을 따라갔던 후회하는 사람도, 만족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 모두가 아마도 동의할 부분은, 하고 싶은 일을 하기 위해 하기 싫은 일도 반드시 해야 한다는 것일 것이다.


이제는 내가 지금 하는 일이 곧 나라는 생각도 옅어졌다. 그저 돈을 벌기 위해 일을 하는 것도 괜찮다. 일은 최소한으로 하고 월급은 최대한으로 받는 직업이라면 더더욱 좋다. 하고 싶은 일을 못하게 돼도 내 가치가 변질되는 게 아니다. 내 열정은 아직도 죽지 않고 내 안에 살아 숨 쉬고 있을 것이다. 하고 싶은 일과 해야 하는 일의 밸런스를 조심스럽게 맞추고, 한보 후퇴해서 돌아가더라도 인생을 길게 보고 내가 번 아웃되지도, 지리멸렬해 지지도 않도록 정신적인 건강함을 추구하는 게 더 중요한 것 같다.


매거진의 이전글 스크린한테 빼앗겼던 정신 책으로 다시 찾아오기 3년째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