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도 그런 회사는 사절이거든요

능력 vs 연차

by 세준희

미국에서 대학원을 졸업하고 일을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 한국의 한 대기업에서 주최하는 데이터/소프트웨어 부문 해외 인재 채용 설명회에 참석한 적이 있습니다. 요즘 뜨거운 데이터/소프트웨어 분야 설명회라 그런지 스테이크 하우스에서 진행한 파워포인트 프레젠테이션은 시각적으로는 웅장하지만 내용은 별로 없어서 거추장스러웠습니다.


발표자분 또한 본인이 발표하는 내용에 대한 이해도가 없어 보였고 추진하는 사업들에 대해서도 수박 겉핥기 수준의 지식밖엔 없는 듯 보였습니다. 그분은 50대의 높은 직책에 계신 분이었고 파워포인트 내용은 막 주목받기 시작한 5년여 밖에 되지 않은 신분야였기 때문에 왜 그 분이 발표자인 건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같이 출장에 대동한 직원들 중에서도 데이터/소프트웨어 전문가는 아무도 없어서 질문들에도 제대로 답하지 못한 채로 프레젠테이션이 끝났습니다. 분명히 프레젠테이션은 전문가가 만들었을 텐데 그 거추장스러운 파워포인트를 시간을 들여 웅장하게 만든 후 전문지식이 전혀 없는 상관에게 넘겨야 했던 젊은 직원에게 연민을 느꼈습니다.


프레젠테이션이 끝이 난 후, 인사팀 직원들이 테이블로 와서 졸업자들과의 대화를 시도했습니다. 그 기회에 궁금하던 질문을 했습니다.




"채용돼서 한국에서 일하게 되면, 연차가 얼마 되지 않은 젊은 직원들도 회사 안에서 혁신적이거나 가시성이 있는 업무를 주도해서 할 수 있나요?"


아, 아직 한국에서 그렇게 하기는 아무래도 힘들죠.


"네, 그럼 업무를 아주 잘하면 그렇게 할 수 있는 높은 직급으로 빨리 승진할 수 있나요?"


음, 남들보다 비교적 조금 빨리 승진할 수는 있지만, 회사 방침이 있어서 미국처럼 크게 건너뛰는 승진은 힘들어요.


"네, 그럼 능력이 있고 프로젝트를 제안하고 주도하고 싶은 사람일 지라도 회사 방침에 맞춰서 승진할 때까지 10년 이상 기다려야 한다는 말씀이시죠?"


네 뭐 그렇죠. 사실 그런 분이라면 미국 회사에서 빨리 승진하신 후에 저희 회사로 이직하시는 걸 추천드려요. 그런 경우 대우도 더 잘해드리고 그게 가장 빨리 높은 직책으로 들어 오는 길이거든요.




이 말을 마친 후 인사 담당자는 저와 이야기하기 싫은 듯 제가 더 이상 질문 하기 전에 고개를 재빨리 다른 사람들에게로 돌렸습니다. '당신 같은 반체제적인 사람은 우리 회사에서 사절이에요'라고 제스쳐와 표정으로 말하는 듯했습니다. 워낙 세계적인 대기업이기 때문에 저 아니라도 가고 싶어 할 사람들이 많다는 건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해외까지 와서 석사 이상 학력자들을 위한 설명회를 열어서 능력으로 평가 하기보단 연차가 중요하다는 회사에 가고싶은 마음이 들지 않는 것도 당연한 것 아닐까요?


아직 한국 기업들은 능력 위주의 시스템은 아닌것 같습니다. 미국에서는 연하의 상사가 있는 게 흔한 일이고 젊은 나이임에도 회사에서 중요한 일을 담당하는걸 자주 봅니다. 20대 후반에 임원이나 부장이 되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회사원은 회사에 가장 큰 이득을 안겨주는 능력으로 평가받는게 당연하다고 느껴집니다. 그러나 그 설명회의 인사 담당자님의 말씀에 의하면 아무리 능력있는 사람들이라도 한국 대기업에서 시작한다면 연차가 쌓일 때 까지 허드렛일을 오래동안 해야 합니다. 이런 시스템은 다른 회사로 이직해도 똑같은, 개인의 능력을 저평가 하는 시스템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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