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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세준희 Apr 19. 2020

2. 중학생에게 탈모와 비만을 안겨준 유학생활 첫 1년

비참하고 절박했던 유학 첫 1년

미국에 왔을 때 나는 영어를 못했다. 한국 교과서 앞장에 매년 나오는 "Hi, how are you?" "I'm fine thank you. And you?" 정도밖에 모르는 수준이었다. 그 실력으로 한 학년에 30명도 안 되는 아주 작은 학교에 입학했다. 사립학교라 시험을 보고 입학해야 하는데 (시험을 보러 미국까지 올 수 없으니) 영어를 잘하고 똑똑하다고 거짓말로 우겨서 입학했다. 입학 첫날, 언제든지 학교 공부에 적응하지 못하면 입학이 취소될 수도 있다고 통보받았다. 학교생활 1일부터 약 6개월 간 실력이 드러나서 퇴학당할 수 있다는 두려움에 시달렸다. 학교에서 퇴학당하면 학생비자가 취소될 것이고, 그러면 한국에 돌아가야 할 수도 있었다. 엄마가 미국에서 오빠를 뒷바라지해야 하는 상황에 내가 퇴학당해서 한국으로 돌아가야 한다면 우리 가족의 계획이 전부 무너지는 상황이었다. 그 사실이 어린 내 어깨를 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짐이 되어서 짓눌렀다.


영어를 못하니 수업을 알아들을 수 없었고 교과서도 못 읽었다. 입학한 지 며칠 만에 역사 선생님께 불려 가서 왜 숙제를 하지 않았냐고, 네가 한국에서 막 전학 왔다고 해서 숙제를 하지 않아도 되는 건 아니라고 혼났지만, '숙제가 있는지 몰라서 못했다'는 말을 영어로 구현할 수 없어서 "I'm sorry"만 반복하고 나오기도 했다. 내가 도움을 청할 수 있는 사람은 학교에서 유일하게 한명 있는 한국 여자애였다. 그 아이는 나와 같은 아파트 단지에 살고있기도 해서 절박한 마음에 다가가서 오늘 내주신 숙제 같은걸 용기내서 물어봤다. 유학 오기 전까지 음침한 아싸로 지내느라 남에게 도움을 청할 줄도 모르는 나였지만 워낙 절박하니 평소에 못하던 말도 눈을 질끈 감고 할 수 있게 됐다. 그런데 그 아이는 몇 번 답해주다가 곧 등을 돌리며 목이 아프니 말 시키지 말라고 했다.


그 한국 아이를 생각하면 아직도 야속한 마음이 든다. 전학 와서 문학 수업에서 처음으로 읽어야 하는 책은 미국 불량학생들에 대한 "Outsider"라는 책이었다. 나는 학교에서 읽는 모든 책에 나오는 모든 단어를 전자사전으로 일일이 검색해서 공책에 적으면서 해석해서 읽느라 단 10장을 읽는데도 몇 시간이 걸렸다. 그런데 "Outsider"는 사전에 찾아도 나오지 않는 은어가 많아서 도저히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수업에서 매일 전날 읽은 분량을 체크하는 10문제 정도 되는 짧은 시험을 보고 짝꿍과 서로 시험지를 바꿔서 채점을 시켰는데, 선생님이 영어를 못하는 나를 배려해서 한국인인 그 아이와 짝지어 주셨다. 그런데 매일 내 시험지를 채점할 때마다, 그 아이는 문제의 답을 듣기도 전부터 펜을 허공에 들고 X자를 연습하듯이 반복적으로 그렸다. 답은 맞아도 스펠링이 틀렸거나 문장이 어정쩡하면 가차 없이 X자를 그렸다. 그 아이의 펜이 허공이나 종이에 X자를 그을 때 마다 내 가슴에 그리듯이 아팠다. 문학 수업에서 첫 학기에 D 성적을 받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참함을 억누르고라도 그 아이의 도움이 필요할 때도 있었다. 질문을 연달아 두 가지 하면 머리가 아프니 말 시키지 말라던지, 목이 아프니 말 시키지 말라던지 하면서 곧 차단했기 때문에 눈치를 봐 가며 아끼고 아꼈다가 정말 절박할 때만 질문을 했다. 한국에서 나만의 세상에 빠져 살았던 내가 유학와서 눈치 보는 법을 익혔고, 웃을 줄 몰랐던 내가 웃으면서 다가가 도움을 청하는 법을 배웠다. 살아남으려면 성격을 바꿔야 했다.


웃는 법을 배우고 난 다음에도 친구를 사귀기는 정말 힘들었다. 퇴학의 두려움에 비하면 혼자 지내는 건 견딜만했다. 항상 살얼음 위를 걷는 마음이고 피폐해서 친구까지 사귀려고 노력할 여력도 없었다. 점심시간에도, 쉬는 시간에도, 나는 혼자였다. 동급생들은 대체적으로 착한 편이었지만 중학생의 인내심은 그리 깊지 않다. 아이들은 나에게 몇 마디 말을 걸었다가도 내가 잘 알아듣지도 못하고 대답하지도 못하면 곧 흥미를 잃고 자리를 떠났다. 영어를 쓰는 나라에서 영어를 못하는 사람은 바보나 다름없다. 말을 하지도 못하고 알아듣지도 못하고, 친하게 지낼 말 통하는 한국 아이도 없었으니 나는 철저히 고립된 바보나 다름없었다. 한국에서는 아싸이긴 했어도 한두명 깊이 사귀는 단짝친구들이 있었고 무시당하지는 않았었는데 학교에서 나를 바보로 본 아이들이 내 자리를 빼앗고 모른 척하는 둥 은근슬쩍 무시하기도 했다. 그래서 나는 공동체에서 우습게 보이는 사람이 무시당하고 홀대당하는게 뭔지 잘 안다.


외로웠고, 무력했고, 그럼에도 잘해야 해서 절박하고 비참했다. 스트레스받으며 매일 새벽까지 공부하느라 빠지던 머리가 원형 탈모로 진행됐다. 그리고 스트레스에서 벗어나는 시간이 먹을 때 밖에 없어서 원래도 통통했던 몸이 비만으로 불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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