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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세준희 Apr 19. 2020

3. 엄마도 미국에서는 슈퍼우먼이 아니었다

엄마의 웃는 얼굴과 잃어버린 여유, 작아진 모습

미국에 오기 전의 엄마에 대한 기억은 상냥하고 여유로운 모습이었다. 엄마는 잘 웃고 착하고 우아해서 누구나 좋아했고 지금도 그렇다. 오빠의 반장, 부반장, 보이스카우트 회장 활동, 크고 작은 사고 수습 때문에 학교에 종종 드나들 때도 항상 여유 넘치는 모습이었다. 그 옆에 좀 권위적이고 무게감 있는 아빠를 세우면 그야말로 완성된 사회적으로 존경받는 부부의 그림이었다.


미국에 오면서 엄마의 여유로움은 사라졌다. 더 이상 한국에서처럼 당당하고 여유로운 사모님이 아니었다. 유창하지 않은 영어로 두 아이의 수많은 문제들을 해결해야 하고 끊임없이 남에게 도움을 청해야 하는 가장이 됐다. 한국에서는 모두들 엄마를 존중했었는데, 미국에서는 어떻게든 문제를 해결하려고 애쓰면서 미소 짓는 엄마를 어린아이를 대하듯 아랫사람 대하듯 대하고 무시했다.


미국은 참 오래 걸리고 비효율적이다. 미국 생활은 어느 하나 쉬운 게 없어서 항상 해결해야 하는 문제가 많았다. 우리의 학교 입학부터 쉽지 않았고 그때는 스마트폰도 없어서 새로운 곳에 가려면 지도를 찾아서 운전해 가야 했고 정보를 얻을 곳도 마땅치 않았다. 엄마는 우리가 학교에만 집중할 수 있게 다른 모든 것을 해결해야 했다. 집, 자동차, 보험, 신용카드, 은행, 통신사 모두 쉽게 해결되는 게 아무것도 없었고 직접 전화하거나 방문해서 해결해야 했다. 그리고 미국은 서비스가 좋지 않아서 유창하지 않은 영어를 구사하는 사람은 고객이라도 불친절하게 대하고 하대하거나 전화를 끊어버리는 일도 많았다. 엄마는 얼마나 전화하기 싫었을까? 가끔 내가 안되는 영어로 그런 전화를 걸어야 할때 마다 토할것 같은 울렁증을 느꼈다. 엄마도 그랬을 것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우리와 함께 미국에 왔을 때 엄마 나이도 40 정도밖에 안됐었는데 나이 마흔에 자식들 때문에 평생 가지고 있던 남편과 가족이라는 지붕을 떠나 연고 없는 미국으로 건너와 10년 가까이 고생스러운 생활한 것이다. 거기다 책임져야 할 두 아이도 있으니 엄마의 어깨도 정말 무거웠을 것 같다.


누구나 부모가 작아 보이는 순간이 있다고 하는데 나는 그게 중학교 1학년 때 미국에 오면서부터였다. 당당했던 엄마가 너무 작고 연약해 보였다. 엄마가 연약하다는 걸 느끼고 나니 내가 엄마를 지켜줘야겠다고 느꼈다. 더불어 내 유학생활 때문에 부모님이 너무 고생한다는 죄책감을 느꼈다. 내가 계속 영어를 못하는 상태로 머무르면 대학도 못 갈 테고 내 유학생활은 돈과 시간과 노력만 낭비하고 실패로 끝나는 것일 텐데 그렇게 되면 절대 안 된다고 생각했다. 잘할 자신도 없었지만 실패는 더욱 두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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