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랑비에 옷 젖듯이
처음에 미국에서 학교를 갔을 때는 마치 머나먼 외국의 티비를 7시간 동안 시청하는 것처럼 무슨 대화가 오가는지 전혀 알 수가 없었다. 정말 막막하고 영어가 언젠간 들리기는 할까라는 의문이 들었다. 그런데 가랑비에 옷 젖듯이 영어가 나에게 스며들어 3개월이 지나자 대충 어떤 대화가 오가는지 감이 잡히기 시작했다. 정확한 대화 내용은 알 수 없지만 전체적인 큼직한 맥락 어렴풋이 파악할 수 있었다.
3개월이라는 꽤 빠른 시간 안에 대화의 큼직한 맥락을 이해하게 된 데 것은 내가 다니던 학교의 특성 때문이었다. 내가 다닌 학교는 한 학년에 30명밖에 되지 않고 중학교 전체를 합쳐도 70-80명밖에 안 되는 아주 작은 학교여서 모든 아이들이 서로를 알았다. 게다가 학교가 작으니 선생님들이 아이들 하나하나의 가정사까지 알 정도여서 영어 못하는 불쌍한 외국인인 내가 영어를 배울 수 있게 특별히 아이들에게도 당부하는 등 신경을 써 주셨다. 한 학년에만 1000명이 가까운 아이들이 다니는 보편적인 학교에 갔다면 상상도 할 수 없는 특혜를 받은 것이다.
이런 특별한 환경 덕분에 영어로 대화할 기회를 얻어서 빨리 배울 수 있었다. 그 후로 미국에서 17년 동안 살아오면서 인생의 다양한 시기에 미국에 온 사람들을 봤는데 영어를 배우는 속도는 얼마나 영어로 많이 대화하느냐에 달려 있었다. 미국에서 몇 년을 살았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미국에서 30년을 넘게 살아도 영어를 못하는 사람들이 정말 많다. 미국에서 태어난 히스패닉계 중학생이 영어를 잘 못하는 것도 봤다. 부모님이 영어를 전혀 못하는 데다 이웃들이나 친구들도 전부 스페인어를 쓰는 히스패닉인들이라 영어를 배울 기회가 없었던 것이다. 이런 특수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나이에 따라 언어를 배우는 게 비교적 수월해지기도 한다. 어리면 어릴수록 아이들 속에 섞이기가 쉽고, 보호자들도 서로 사이좋게 놀기를 권장하기 때문에 영어를 쓸 기회가 많아서 빨리 배운다. 나이가 들 수록 각자 노는 그룹이 굳어지기 때문에 그 속에 섞여 대화하기는 쉽지 않다. 그래서 뭐니 뭐니 해도 언어 배우는데 가장 효과적인 것은 외국인과 연애하는 것이다.
내 영어가 유창해 지기까지는 2년이 걸렸다. 2년 동안 영어를 배우는데 가장 도움이 됐던 것들은 교과서의 모든 단어를 사전에서 찾아서 매일 새벽까지 교과서를 붙들고 있었던 것과, 학교에서 모두가 나를 바보 취급해도 창피해하지 않고 웃으면서 바보 같더라도 한마디라도 한 것과, 클레임을 걸기 위해 전화하기 전에 마음속으로 무슨 말을 할지 되뇌던 것들이다. 난 2년 동안 학교의 웃음거리였다. 망신당하는 게 두려우면 영어를 하기가 힘든 것 같다. 그리고 좋은 말을 할 때보다는 싸워야 할 때 더 준비를 많이 하게 되고 논리적으로 문장을 구사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