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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eju Aug 14. 2023

포도밭 고양이, 영심이 1

양산리 술도가집 영심이의 판타지 라이프


    영심이가 가장 좋아하는 계절이 돌아왔다. 꿉꿉하고 지리한 장마가 울음을 뚝 끊고 연둣빛 청포도가 알을 키우는 시기. 목이 쉬어라 저 멀리 동구박 느티나무에서 매미가 맴맴거리는 늦은 오후면 어김없이 영심이의 발걸음은 언덕 위 청포도 밭으로 향했다. 온종일 더워진 지면의 열기가 고스란히 남아있지만, 연하고 순하게, 바람에 살랑이는 청포도 나무 아래서의 시간을 거부할 수는 없다. 굴곡진 늙은 몸을 뚫고, 마치 아기처럼 연한 새잎을 피워내는 그 순간이 경이롭게 느껴졌다. 그러다 어린잎들 사이로 작고 앙증맞은 열매들이 알알이 커져가는 7월이 오면 영심이는 온통 청포도 밭에 홀려 시간을 보냈다. 이것이 영심이가 양산리에 머물러야 하는 유일한 이유이기도 하다. 오늘도 어김없이 풋풋한 청포도 익어가는 향기와 함께 영심이의 망중한도 익어간다. 양 씨 아저씨가 포도밭을 둘러보러 오기 전까지 말이다.


     양 씨 아저씨는 늘 늙은 누렁이와 함께 포도밭에 등장했다. 어느 장마철 처마 밑에 버려져 다 죽어가던 누렁이를 아저씨가 거두어 키웠다며 양구 아저씨가 점방 아지매와 나누던 소리를 들은 적이 있다. 그 봄 양 씨 아저씨는 안사람을 먼저 떠나보냈다고 한다. 그러나 누렁이가 어떻게 등장했는지 영심이에게 중요하지는 않다. 다만 영심이만 보면 눈에 쌍불을 켜고 짖어대는 누렁이가 거슬릴 뿐이다. 오늘도 어김없이 누렁이는 청포도 밭 입구에서부터 미친 듯 지져댔다. 영심이가 있든 없든 짖고 보는듯했다. 푸릇푸릇 한 낭만의 시간을 방해받은 영심이의 기분이 썩 좋지는 않다. 저 성질 더러운 개새끼 한 마리를 뒤로한 채 포도밭 울타리 밑구멍으로 영심이는 유연하게 빠져나간다. 해는 아직도 떨어질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누런 털 위에 붙은 검불 몇 개를 꼬리로 쳐 떨군 영심이의 발걸음이 짜증스럽기만 하다.


   신작로가 뿜어내는 열기에 영심이의 누런 몸뚱이가 녹은 조청 덩어리처럼 꾸물렁거린다. 지열을 피해 길 옆 풀숲을 걸어 마을 입구에 닿자 웅장하게 서있는 느티나무가 맴맴 거리며 진동을 했다. 태양은 산자락 위에 간신히 걸쳐져 영심이의 그림자를 땅끝으로 잡아당겼다. 바람 한 점도 불지 않아서인지 느티나무 아래 평상은 조용하다. 이 시간이면 먼지를 피우며 시끄러웠어야 할 동네 아이들도 오늘은 보이지 않는다. 다만 저 멀리 고추밭고랑 사이로 순자 할매의 하얀 머릿수건만이 오르락내리락 바쁘게 움직일 뿐이다.  


     마을 안쪽으로 깊게 뻗은 신작로는 마을의 뒷섬과 앞섬을 연결한다. 오래전 양산리를 감싸고돌던 강줄기 덕에 마을은 산속에 갇힌 섬이었다. 그러다 새마을 운동이 무르익던 그 시절 다리가 놓이며 섬 신세를 겨우 면하게 되었지만 여전히 오지 중에 상오지이다. 이틀에 한 번 겨우 버스가 한 대 지나니 말이다. 뒷섬과 앞섬이 갈라지는 길 안쪽에 영심이가 기거 중인 술도가가 있다. 납작한 구들석과 누런 황토로 올린 담벼락 위엔 까만 기와가 성기듯 덥혀있고, 그 위를 늙은 감나무가 길을 향해 푸르게 뻗어있다. 세월을 그대로 맞은 나무 대문 사이로 영심의 몸이 흘러들어 간다.


     "영심아, 날도 더운데 어딜 쏘댕 기다 오냐? 털 옷 그랴 입고 안 덥다냐?"

  

     주인 할머니가 마당 가운데서 모깃불을 부지깽이로 쑤시며 영심이를 흘끔거렸다. 들은 체 만 체 매캐한 모깃불을 뒤로한 채 영심이는 뒷마당 우물가로 향한다. 우물가 사방으로 물이 첨벙거리게 튀어있었다. 아마도 주인집 큰 아들 동석이가 등목을 한 듯하다. 온종일 열기로 녹아내린 영심이가 우물가 젖은 돌 위에 배를 철퍼덕 깔고 눈을 감는다. 마침 해는 산 너머로 꼴깍 떨어져 사라지고, 열린 정지문 사이로 동석 어멈이 신명 나게 오이를 채 썰고 된장찌개를 휘졌고 있다.


     웅성거리는 소리에 단잠을 자던 영심이의 눈이 떠졌다. 축축하게 젖어 고꾸라진 멸치 너 댓 마리가 코앞에 놓여있었다. 된장찌개에 빠졌다 나온 것을 동석 어멈이 가져다 둔 것이다. 더위를 먹은 것인지 입맛이 통 없는 영심이는 멸치를 뒤로한 채 소리가 들리는 앞마당으로 향했다. 타고 있는 모깃불 옆으로 부지깽이가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있을 뿐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그때 담장밖에서 웅성이는 소리가 들렸다. 영심이가 재빨리 담장 위 기왓장에 올라갔을 때 주인 할머니의 목소리가 아래서 들렸다.


     "아따, 참말로 이 더위에 뭐한다고 고추를 딴당가!"


     순자 할매가 입가의 거품을 물고 바닥에 쓰러져있고, 그 주위로 아직 싱싱한 붉은 고추들이 널려있다. 아무래도 순자 할매가 더위를 먹어 쓰러진듯싶다.


     "물, 물! 여기 물 가왔네! 아여, 어서 마시랑께!"


      어디선가 나타난 양 씨 아저씨가 축 처진 순자 할매 입에 박아지를 들이대며 물을 먹이려 했다. 순간 영심이의 걸음이 아찔하며 밟고 있던 기와 한 장이 담벼락 밑으로 떨어졌다.


     "악!"


     들고 있던 박아지를 떨어트리며 양 씨 아저씨가 비명을 질렀다. 빈속에 종일 뜨겁게 쏘다닌 영심이도 더위를 먹은 듯하다. 어지러웠다. 영심이가 주춤하며 걸음을 챙기는 동안 양 씨 아저씨의 머리에는 작은 감자만 한 혹이 솟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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