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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eju Aug 15. 2023

포도밭 고양이, 영심이 2

뭉게뭉게 하늘을 날아올라

     

      매캐하게 피어오르던 모깃불은 이미 잔잔해졌다. 영심이는 차가운 우물가 바닥에서 곤한 잠을 청하고 있다. 밤하늘엔 보랏빛 구름들이 평화로이 떠다니고, 그 사이로 굵은소금 같은 별들이 반짝였다. 먼 산으로부터 청아하게 울리는 소쩍새 소리에 영심의 눈이 슬그머니 떠졌다. 굳게 닫힌 정지문 옆 툇마루 너머로 곤히 잠든 식구들의 하얀 어깨가 보였고, 온통 고요했다. 온 식구가 잠든 이 시간엔 오직 영심이와 구름을 비켜 얼굴을 내밀기 시작한 보름달만이 깨어 있을 뿐이다. 보랏빛 구름들이 걷히고, 노란 달빛이 쏟아지자 장독대들이 까만 옥구슬처럼 투명하게 반짝였다. 달빛은 춤을 추 듯 뒷마당 이곳저곳을 비추며 부서지다 이윽고 영심이에게로 쏟아져내렸다. 그러자 영심이의 영혼이 몸을 떠나 공중으로 둥실둥실 떠오르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선 까만 하늘에 빼곡하게 박힌 별들을 향해 자꾸만 뭉게뭉게 높이 떠 올랐다.


     처음 있는 일도 아닌데 영심이는 영 적응이 되지 않는 모양이다. 하늘로 하늘로 둥실둥실 떠 오를 때면 자꾸만 발바닥이 간지럽고 등의 털들이 서는 느낌이다. 영심이는 어느새 까만 기와지붕이 손바닥 만해 보일 때까지 떠 올랐다. 축축한 우물 옆에 턱을 괴고 곤히 잠든 자신의 모습도 깨알만 하게 보였다. 그렇다. 영심이의 영혼은 보름달이 뜨는 날이면 달빛을 받고 몸에서 분리되어 하늘을 날 수 있었다. 영심이는 공중에 떠서 불빛 한 점 없는 동네를 한참 내려다봤다. 이윽고 시선이 어느 한 집에 머문다. 그리고선 어둥버둥 꼬리를 휘저어 방향을 틀어 총총거리며 그 집을 향해 날아갔다.


     영심이의 몸이, 아니 영심이의 영혼이 작은 양철집 지붕 위에 멈춰 섰다. 낮은 흙담이 둘러진 마당 한 구석엔 영심이가 그리도 싫어하는 누렁이가 목에 줄은 단 채 잠들어있다. 생각한 대로 이곳은 양 씨 아저씨의 집이다. 하늘에서 아래를 찬찬히 둘러보던 영심이가 인절미같이 보드라운 두 손을 공손히 모으고 머리를 숙였다. 그러자 영심이의 몸이 다이빙을 하듯 양 씨 아저씨의 지붕 안으로 빠르게 빨려 들어갔다. 까맣게 그을린 석가래를 넘어 내려간 곳은 *정지 안 이었고, 둥실둥실 떠돌다 벽장 모양의 찬장 문에 살며시 열었다. 여러 작은 항아리와 귀퉁이가 찌그러진 노란 양은 주전자가 보였다. 그리고 막걸리를 마시고 남긴 듯한 쉰 내 풍기는 김치도 보였다. 영심이는 이것저것 작은 항아리들의 뚜껑을 열더니 킁킁 냄새를 맡기 시작했다. 그러다 어느 항아리 안으로 손을 푹 찔러 넣더니 까맣고 물컹거리는 된장을 손에 잔뜩 퍼올렸다. 어둠 속에서 천천히 몸을 돌린 영심이는 방과 연결 된 쪽문을 통해 안방으로 살금살금 날아 들어갔다. 방 안에는 양 씨 아저씨가 막걸리 냄새를 풍기며 잠들어 있었다. 홀아비 냄새 찌든 작은 방엔 살림이라곤 큼큼한 이불 한 채 얹어진 늙은 앉은뱅이 자개장이 전부였다.얼마나 깊은 잠에 취한 건지 베개는 아무렇게나 구석에 던저져 있고, 양팔다리를 쩍 벌린 채 양 씨 아저씨의 드르렁거리는 소리만 가득했다. 영심이는 얌전히 아저씨의 머리맡으로 날아갔다. 그리곤 아저씨 머리를 수제비 반죽하 듯 주무르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저녁녘에 실수로 떨어트린 기와가 맘에 걸렸던 모양이다. 그렇게 한참을 신명 나게 주물거리다 보니 자신도 모르게 작고 떨리는 소리가 목에서 흘러나왔다.


“푸르릉..푸르릉…”


     그 순간 밖에선 날 샌 인기척이 들리며 누렁이가 짖어대기 시작했다. 작은 구멍들이 뚫린 창호지가 발린 방문을 짧게 노려 본 영심이는 급하게 지붕을 뚫고 하늘로 올라갔다. 온 동네가 누렁이 짖는 소리로 가득했다.



     

     영심이가 희미하게 눈을 뜨니 부지런한 동석 어멈이 김이 폴폴 올라오는 보리밥을 막 뜨고 있었다. 밤 새 소쩍거리던 새소리 대신 입 싼 참새들이 짹짹 거리며 마당을 쪼기 바빴다. 길게 몸을 늘려 기지개를 편 영심이가 막 햇살을 받은 마당 한구석으로 가 배를 까고 몸을 굴렸다. 밤 새 차가운 돌에 굳어버린 뼈 마디마디가 마른 흙에서 피어오르는 뜨듯한 기운에 녹아져 내렸다. 그때 낡은 대문이 삐그덕 하며 열리더니 떡진 머리를 한 양 씨 아저씨가 마당 안으로 들어왔다.


“ 식전부터 무슨 일이단가? 어제 맞은 대그빡이 시방까지 안 좋은가?”


     활짝 열린 방 안에서 걸레로 바닥을 훔치던 할머니가 양 씨 아저씨를 향해 물었다.


“하.. 내가 참 거시기한 꿈을 꿨당께요.”


     툇마루 끝에 걸터앉은 양 씨 아저씨가 묘한 표정을 지으며 이야기를 이어 갔다.


“으젯밤 꿈에 말요. 누런 고양이 한 마리가 내 머리에 똥을 싸지르는 꿈을 꿨당께요.”


     양 씨 아저씨의 말에 걸레질을 멈춘 할머니가 쪼그려 앉은 다리를 일으켜 툇마루로 걸어 나왔다.


“뭐시여. 긍께 시방 똥 꿈 자랑하러 왔는가?”


“그게 아니당께요. 그 꿈을 꾸고 일어 낭께 대그빡이 안아푸요. 욱신욱신 감자 만하던 혹도 *거지깔 매냥 사라졌당께요!”


     잠잠히 이야기를 듣던 영심이가 입이 찢어져라 하품을 하며 열린 대문 사이로 미끄러지듯 빠져나갔다.




*정지: 예전 부엌을 일컫는 말

*거지깔: 전라도 사투리로 거짓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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