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그머니 집을 빠져나온 영심이는 대문 앞에 잠시 멈춰서 뒷발로 귓가를 털어댔다. 이른 아침 양 씨 아저씨의 방문으로 따듯한 흙마사지를 방해받은 것이 영 못마땅했던 모양이다. 길 건너 마른 신작로 한 구석에는 부지런한 순자 할매가 어제 딴 탱탱한 빨간 고추들을 햇살에 펴 널고 있었고, 신작로 옆 키 큰 풀들은 아직 이슬에 촉촉이 젖어있다. 그 길을 따라 영심이의 느린 걸음이 마을 밖 포도밭으로 향했다. 포도밭을 향해 걸음을 옮기는 영심이의 발걸음이 조급해지기 시작했다. 찡찡대는 매미들 소리가 마을을 슬슬 채우기 시작했고, 뜨거운 햇살의 열기가 느껴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잰걸음에 멀리 푸르스름한 포도밭이 눈앞에 보이기 시작할 때쯤 영심이가 사뿐사뿐 뛰기 시작했다.
포도밭은 아직 간밤의 냉기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었다. 포도나무 아래 이랑을 지나 한 청포도 나무 아래에 닿자 영심이의 잰걸음이 멈춰 섰다. 푸른 잎들과 알알이 맺힌 푸른 열매들이 묵직하게 늘어진 게 그 무게에 곧 땅에 닿을 것만 같았다. 그 사이를 비집고 들어간 영심이는 나무 아래 동그랗게 몸을 말아 눕고 눈을 감았다. 이윽고 탄식 같은 한숨이 영심이의 입에서 길게 흘러나오고 이내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온몸을 길게 늘이며 영심이가 깨어났고, 품고 있던 온기가 포도나무 그늘의 차가운 허공으로 날아갔다. 살랑이는 나뭇가지 사이로 탱글게 늘어진 청포도들이 영심이의 눈앞에 아른아른 흔들렸다. 아직 더위에 닿지 않은 시원한 푸른 청포도 한 알을 야무지게 배어무니 혼미하던 영심이의 정신이 살아나며 눈도 동그랗게 떠졌다. 그러자 문득 그날의 일들이 문득 떠올랐다. 아직도 너무도 선명한 그날의 기억들! 영심이의 삶을 송두리채 바꿔놓은 그날의 사건들이! 그 특별한 날은 몇 년 전 이맘때 즈음이었다. 어김없이 청포도밭에서 오수를 즐기고 있던 그날은 웬일인지 양 씨 아저씨와 누렁이가 나타나지 않았다. 그래서였을까? 영심이의 오수가 한정 없이 늘어져 저녁까지 이어지게 되었다. 시간이 어찌 흐르는지도 모르게 떡이 되어 잠에 취했던 영심이는 낮에 먹었던 덜 읽은 포도 때문인지 아랫배의 찌르르 싸한 느낌에 잠을 깨었다. 이미 주변은 어두워졌고, 산 아래 논두렁에서 울려 퍼지는 개구리 소리들만 메아리로 울렸다. 더 이상 아픈 배를 참을 수가 없었던 영심이는 바삐 흙을 골라내고는 급하게 엉덩이를 흙사이로 밀어 넣었다. 아랫배는 요동을 치며 묽고 설익은 똥을 지직직 쏟아내었고, 엉거주춤한 영심이의 등골이 움찔거리며 엉덩이를 따라 바삐 움직였다. 한참을 쏟아내고 나니 이제 좀 살 것 같아졌다. 야무지게 흙을 덮고는 한숨 삭히려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보랏빛 하늘에는 누런 달이 커다란 쟁반만 하게 떠있었고, 청포도 나무들은 황금색 달빛에 하얗게 반짝거렸다. 그렇게 한참을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노라니 눈앞이 노래지며 어질어질 현기증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그런데 갑자기 손바닥만 하던 달이 점점 부풀어 오르며 영심이 코 앞까지 커져오는 것이 아닌가? 꿈인가 아니면 현기증에 이러나 싶어 영심이는 무딘 손으로 눈을 열심히 쓸어내렸지만, 부푸는 달은 멈추지 않고 풍선처럼 점점 커지더니 마침 영심이의 코앞까지 밀려왔다. 더는 참을 수 없을만큼 탱탱해진 달은 이윽고 펑! 하는 괭음과 함께 영심이의 얼굴에서 터져버렸다.
영심이가 정신을 차리고 깨어났을 때는 이미 날이 훤하게 밝아있었다. 간밤에 있었던 일들이 꿈인지 환상인지 어안이 벙벙했지만, 꼬릿하게 말라비틀어져 몸에 붙은 똥을 보니 간밤에 무슨 일이 있어도 단단히 있었던 것만은 분명했다. 그 길로 집으로 돌아온 영심이는 우물가에 앉아 털을 핥고 가르느라 온종일 정신이 없었다. 어느덧 어둠이 내려 앉은 마을은 기척이 사라지고 집안 식구들 마져 깊은 잠에 들었다. 사방은 고요했고 하늘엔 둥근 달이 방실방실 대다 온 사방에 빛을 뿜어대기 시작했다. 그러자 우물가 학돌안에서 곤히 잠든 영심이가 공중으로 떠오르는 것이 아닌가! 비몽에 영문을 모르는 영심이가 당황하는 사이 달빛은 점점 더 영심이를 하늘로 하늘로 멀리멀리 쳐올렸다. 그렇게 밤 새 영심이의 영혼은 밤하늘을 뭉개 뭉개 떠다니다 새벽녘이 다 되어서야 제 몸으로 사뿐히 돌아왔다. 이후로도 청포도가 막 익어가는 큰 달이 뜨는 밤이면 영심이는 마을을 내려다보며 하늘을 두둥실 떠다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