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 나는 '완벽한' 집사람이 되었다.
대학 졸업, 대학원 졸업, 어학연수 그리고 서류 넣고 면접 보면 어렵지 않게 붙었던 내 직장들. 결혼 후 시작했던 떡케이크 공방이 승승장구하던 시절, 아이들이 만 3세 때 붙었던 구글스타트업 캠퍼스에서 꿈꾸었던 나의 첫 스타트업. 그리고 30대 중반 남편 따라 인도네시아 주재원배우자로 시작. 나는 아직 내가 해보고 싶은 거 반도 못해봤는데 00의 엄마로, 00의 배우자로 저무는 걸까?
새로운 나라에 대한 호기심과, 그곳에 가면 한국에서는 경험해 보지 못한 것들 해볼 수 있다는 것의 기대감이 있었다. 코로나로 락다운하던 그 시기에 비행기를 타고 해외로 나간다는 것이 일탈처럼 느껴졌다. 몇 년간 한국에서 쌍둥이 육아만 하다가 나에게 인생에 한번 전환점이 온 것 같아서 너무 좋았다. 매일 보는 한국의 풍경이 아니라, 열대나무와 365일 여름의 나라에서의 삶이 싫지 않았다. 그리고 반강제적으로 주재원 와이프는 일할 수 없으니 그 어쩔 수 없는 상황에 속이 후련하기도 했다. 손이 가장 많이 가는 쌍둥이 아이들을 두고 어디 취직하는 것이 쉽지 않았던 시절이지만 언젠가는 일을 다시 해야지, 무엇을 해야 할까 매일매일 육아와 나의 일과 취직에 대해 고민이 끊이지 않던 시절에 4년은 당분간 이 고민은 안 해도 되겠구나! 싶어서 조금 마음은 가벼웠다.
남편은 너무 바빴다. 월화수목금토일 일에 매여있는 사람이었다. 한국에서는 회식이 있을 때
'그날 회식이 있어. 괜찮을까?'
하고 물어보던 남편이었는데 인도네시아에서는 그러지 않았다. 아이들이 어느 정도 크기도 했고 살림을 도와주는 가정부가 있어서 남편은 더더욱 바깥일(회사일)에 매진했다. 남편에게 집안일 뭐 하나 부탁하는 일이 점점 눈치 보고 미안한 감정이 들었다. 아이들 학교일부터 집안에서 일어나는 문제들을 내가 온전히 맡게 됐다. 한국에서는 같이 나누던 일들이었다. 남편은 회사 스트레스도 많아서 갑자기 짜증을 내거나 화를 내는 일도 잦았다. 남편은 정말 '바깥사람' 나는 '안사람'이 되던 시기였다.
4년의 해외생활을 마치고 한국으로 왔다. 인도네시아 가기 전에 직장이 있던 것이 아니니 나는 다시 집안일을 하는 사람이 되었다. 가정부가 없으니 더 많은 집안일을 하게 됐다. 대출금과 이자를 갚아나가야 했고, 해외에 나가서 익혀온 아이들의 영어 감각을 잃지 않게 해 주기 위해 우리는 영어교육이 가장 큰 비중의 사교육비를 지출한다. 그렇게 내 통장에는 생활비가 인도네시아에 있을 때보다 거의 반의 금액으로 생활하고 있다. 그러다 보니 불필요한 지출을 줄이려고 내 약속을 만들려 하지 않는다. 그렇게 집에 있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더 완벽한 '집사람'이 되었다.
SNS에 귀임 후 복직이 두렵다는 엄마들의 투정이 부럽다. 해외생활을 마치고 한국에 들어오면 직장이 있는 배우자면 모를까 대부분의 주재원 배우자라면 비슷한 고민을 하지 않을까 싶다. 오랜 사회활동의 공백과 다시 무언가 할 수 있을까? 싶은 고민과 두려움들. 이미 맛을 본 이상 놓칠 수 없는 아이의 교육에 대한 것들 (나도 경제적 능력만 되면 아이들을 유학도 보내고 썸머캠프 등을 보내줘서 지금의 국제적 감각들을 잃지 않게 해주고 싶다.)도 더 채워주고 싶다.
오늘도 나는 밖에 나가서 커피를 한잔 사서 마실까에 대한 생각에서 그냥 집에서 한잔 마시자의 마음으로 굳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