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연구계획서(SOP 혹은 Personal Statement)의 중요성 2. 연구계획서에 꼭 들어가야 하는 내용, 지도교수의 입장을 상상해라 3. 연구계획서는 쓰는 시간보다 준비하는 시간이 더 오래 걸린다 4. 효율적인 글을 구조화하는 방법
1) 연구계획서의 중요성
사람들이 "그래서 미국 대학원 입시에서 가장 중요한 게 뭡니까?"라고 물어보면 굉장히 곤란하다. 서문에서 말했다시피, 대학원 지원 시 제출하는 서류들은 긴밀히 상호작용하며 지원자의 이미지를 만들어주기 때문에 각기 구분되어 기능하거나 중요성을 갖는다고 보기 어렵다. 그래도 나는 이렇게 대답한다: "딱 구분해서 뭐가 제일 중요하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연구계획서가 가장 중요합니다. 다른 건 조금 부족해도 상황에 따라 만회가 될지 몰라도, 연구계획서가 엉망인 학생은 커미티 입장에서 고민할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하기 위해, 우선 지원자 개개인의 상황에 따라 비교적 부족해도 만회가 되는 서류와 당락에 중심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는 서류가 조금씩은 다를 수 있다는 점을 생각해보자. 가령 미국 내에서 대학을 졸업하는 학생이 학부 전공과 같은 전공으로 미국 내 대학원에 진학할 때에는, 다른 서류들이 상당히 잘 준비되었다는 전제하에 GRE 등의 공인시험 점수는 조금 낮아도 만회가 될 가능성이 있다. 커미티 입장에서 볼 때, 본인들이 잘 알고 있어 비교적 신뢰할 수 있는 대학교의 성적표와 본인들이 평판을 잘 알고 있는 교수가 해당 학생의 능력을 보증해주고 있으며 그 학생이 수준 높은 연구계획서에서 본인이 공인시험에서 낮은 점수를 받은 이유를 간결하게 변명해주고 있다면, 우선 면접을 잡아서 얘기를 나눠봐도 괜찮겠다고 생각할 확률이 높기 때문이다. 다만 타국에서 수학했거나 타전공의 과정에 지원하는 학생의 경우라면, 커미티 입장에서 본인들이 해당 학생의 수학 배경과 추천서의 신빙성을 평가하기 어렵다고 생각할 수 있기 때문에 중립적 평가요소인 공인시험 점수에 대한 의존도를 높일 수 있다. 또 전공별로도 생각해볼 수 있는데, 철학, 수학, 물리학 그리고 법학(JD 과정) 등 해당 분야에서 성취를 내는 데에 수리-논리적 사고능력이 다른 능력들 보다 압도적으로 중요한 학과의 경우에는 논리력을 평가하는 공인시험(GRE나 LSAT)의 점수가 매우 중요할 수밖에 없고 실제로 커트라인도 상당히 높게 책정해 둔다. 반면 역사학이나 문화인류학처럼 질적 연구의 성향이 강한 전공의 경우에는 학생의 연구력을 직접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작문 견본(Writing Sample)이 특별히 중요한 평가요소로 여겨진다.
물론 위에서 언급한 시나리오 중 어떤 것도 절대적이지는 않다. 결국 지원자 본인이 커미티의 입장을 상상하면서 본인의 상황에서 어떤 부분에 좀 더 집중해야 하는 지를 전략적으로 판단하고 그 판단이 먹혀들어가도록 노력하는 수밖에 없다. "2-2 예비 지도교수에게 컨텍 이메일은 어떻게 보낼까? (사전 컨텍)" 장에서 자세히 설명하겠지만, 예비 지도교수와 미리 컨텍하면서 본인에 대한 커미티의 평가를 슬쩍 감지해보는 것도 도움이 된다. 이런 프로세스가 특별한 학문적 작업이라고 생각하지는 말자. 우리가 지인을 대할 때 상대방의 입장에서 나의 행동이나 모습이 어떻게 비칠지를 상상해보며 사회적 관계를 갖듯이, 나의 학생으로서의 자질과 성향을 가늠해보려는 커미티의 눈에 나의 여러 모습들이 어떻게 보일 지를 상상하며 스스로의 기획력으로 본인을 그려내는 것은 어렵지만 필요한 일이다. 이런 커뮤니케이션 과정에서 예비-학자로서의 학생은 누구나 특별한 장단점이 있을 것이고, 어떤 교수의 눈에는 부족한 학생이 다른 교수의 눈에는 좋게 보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구계획서는 조금 논외의 영역이다... 연구계획서는 무조건 잘 써야 한다. 그 이유는 간단한데, 대학원 특히 연구중심의 프로그램은 똑똑해서 가는 것도 아니고 스펙을 쌓으러 가는 것도 아니다. 일차적으로는 그저 공부/연구하러 가는 거다. 게다가 학부과정도 아니고 석사 이상의 과정이라면, 어느 정도는 구체적인 수학 목표가 있어서 그 목표에 적합한 지도교수와 학교를 찾아가는 것이 상식이다. 그런데 한 학생이 자신의 연구계획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한다면, 커미티 입장에서는 그 학생이 뭘 하려는 건지도 모를 텐데 어떻게 "잘"할 수 있을지를 평가할까? 본인이 무슨 공부를 하고 싶은지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한다면, 그 학생은 똑똑하거나 열정이 넘치더라도 번지수를 잘못 찾아온 사람 취급을 받을 것이다.
비슷한 맥락에서, 연구계획서가 엉망인 학생은 공인점수를 제외한 다른 대부분의 서류를 제대로 준비하지 못할 가능성이 높다. 연구계획을 못 세운다는 건 학문적 역량과 지식이 부족하다는 반증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연구계획을 세우지 못한다는 것은 대개 해당 학과에서 어떤 연구가 가능하고 중요한가를 판단할 역량이 준비되지 않았다는 뜻이다. 입시를 위해 제출하는 서류들은 상호 연결되어 기능한다고 반복해서 강조했는데, 중요한 점은 연구계획서가 다른 서류들의 구심점으로서 기능한다는 것이다. 커미티는 제출 서류들을 함께 검토하며 "이 학생은 이런 공부를 하고 싶어서 이 학교에 지원했군. 우리 학과의 @@교수와 연구핏이 맞을 것이라는 판단 때문이었구나. 어디 보자... 성적표를 보니 성실하고 관련 수업도 많이 들었고, 작문 견본을 보니 이 학생의 연구 성향도 대충 알 것 같군. 의문점이 남는 부분을 면접이나 이메일을 통해 한번 물어서 평가해보자"와 같은 류의 판단을 하고 싶어 한다. 결국 다른 서류들은 지원자가 자신의 연구계획을 실현시키는데 필요한 역량과 준비상태를 갖추고 있는지를 증명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일 뿐이고, 연구계획서는 해당 연구계획의 표현 그 자체인 것이다.
2) 연구계획서에 꼭 들어가야 하는 내용
그래서 좋은 연구계획서에는 어떤 내용이 들어가야 할까? 이 질문을 "커미티 입장에서는 어떤 연구계획서가 좋은 연구계획서일까?"라는 질문으로 바꿔서 생각해보면 쉽다. 연구계획서에는 지원자의 능력과 동료로서의 자질을 판단하는 데 꼭 필요한 내용들, 즉 해당 지원자가 생각하는 자신의 연구분야는 무엇인지, 왜 그 연구를 하기 위한 장소로 해당 대학교가 적합하다고 생각하는지, 그 연구계획을 실현시키기 위해 지금껏 어떤 현실적인 준비를 해왔는지 등에 대한 설명이 포함되어 있어야 한다. 너무 당연한 얘기라고 생각한다면 조금 다르게 풀어서 설명해보겠다. 나는 이렇게 표현하는 걸 좋아하는데, 지원자는 자신의 과거-현재-미래의 타임라인을 커미티 입장에서 중요한 내용만으로 잘 채워서 간결하게 그려내야 한다. 당장 생각나는 대로 이 타임라인의 잠재적인 재료들을 나열해보면 다음과 같다:
- 미래: 나는 어떤 주제를 공부하고 싶은가, 어떤 이론적인 틀을 사용하고 싶은가, 어떤 지도교수의 밑에서 공부하고 싶은가, 왜 그 지도교수 혹은 학교여야만 하는가, 메인 지도교수 외에 해당 학과나 학교에 서브 지도교수로서 눈여겨본 교직원이 있는가, 나의 연구주제에는 어떤 사회적 중요성이 있는가, 혹시 학문적 열정 외에 특별한 경력적 목표가 있는가, 지금 원서를 제출하는 시점과 (만약 합격한다면) 입학하는 시점 사이에는 어떤 부분을 추가적으로 보완해서 입학할 것인가 등
- 현재: (연구계획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는 한에서) 나는 현재 어디서 어떤 공부/일을 하고 있는가, 나의 학문적/문화적 배경은 어떻게 되는가, 나의 감성이나 지적 성향의 내세울 만한 특징은 무엇인가, 나는 어떤 문제의식이나 학문적 열정을 갖고 있는가, 나는 현재 시점에서 어떤 외국어를 어느 정도로 구사할 수 있는가 등
- 과거: 나는 학부에서 어떤 수업을 들었는가, 나는 어떤 주제에 관심을 갖고 공부해왔는가, 내가 경험한 지적 훈련을 잘 대변해줄 예시/사례(작성한 논문, 수상경력)가 있는가, (만약 해당사항이 있다면) 나는 해당 연구를 실행하는데 필요한 외국어 능력을 어떻게 준비해왔는가, 나는 어떤 리더십이나 단체 활동 경험이 있는가등
물론 오해는 하지 말자, 내가 말한 "미래", "현재", 그리고 "과거"는 그저 추상적인 개념일 뿐 꼭 시간적 흐름에 따라 연구계획서를 구조화할 필요는 없다(예를 들어, 연구계획을 설명한 뒤, 당신의 현재 지적 상태와 과거의 준비과정을 설명하고 다시 왜 해당 학교에서 공부하고 싶은지를 설명하는 등 다양한 구조가 가능하다). 또 내용이 무조건 많다고 좋은 연구계획서가 되는 것은 아니니, 위에서 언급한 재료들을 모조리 때려 넣으려고 무리한 글쓰기를 해서는 안된다. 그저 당신이 가장 효과적으로 자신의 계획과 자질을 설명할 수 있는 글의 구조와 내용 순서를 기획하면 될 뿐이다. 내가 추천하는 방식은, 우선 각자의 연구계획과 관련하여 중요한 이력이나 역량들을 최대한 많이 브레인스토밍 해서 모은 뒤 그중 연구계획서에 들어갈 몇 개의 내용을 선별하여 간결하고 매끄러운 구조로 엮어 가는 것이다. 연구계획서는 "자기감성소개서"나 "자기대단함소개서"가 아니니, 커미티 입장에서 꼭 필요한 내용들만 효율적이고 간결하게 쓰면 된다.
3) 연구계획서는 쓰는 시간보다 준비하는 시간이 오래 걸린다
여기까지 읽은 독자들, 특히 학부생 독자들 중에는 이런 반응을 보이는 사람들이 많을 것 같다: "아니... 나는 그냥 대학교를 열심히 다니긴 했는데, 내가 전문적인 수준에서 무슨 연구를 하고 싶은지 당장 정리할 수 있을 정도로 아는 게 많은 것 같지는 않은데... 그리고 정확히 어떤 교수에게서 어떤 지도를 받고 싶은지 적으라니, 미국에 대학교가 몇 갠데 어느 교수가 어디 있는지는 어떻게 다 아는 거야...? 이 가이드 읽어보니까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는 알겠는데, 이건 이미 준비가 된 사람들이나 따라갈 수 있는 거잖아."
혹시 본인이 이렇게 반응했다면 우선 안심해도 된다. 내가 미래의 연구계획을 구체적으로 기술할 수 있어야 한다고 한 것은 어느 정도의 구체성이 있어야 한다는 뜻이지 당장 박사논문 목차를 뽑아낼 수 있을 정도로 디테일하게 써야 한다는 뜻은 결코 아니다. (그리고 입학한 뒤 실제로 연구계획서의 내용대로 연구를 진행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대학원에 가서 새로 배우는 만큼 계획도 수정되거나 재설정될 것이다.) 게다가 혼자 모든 계획을 다 정해놨으니 지도교수는 멀찍이 서서 지원이나 하라는 듯이 너무 구체적으로 쓰는 것도 오히려 부정적으로 작동할 수 있다. 당신이 연구자만큼이나 학생으로서 지원한다는 것은 모두가 아는 일이니 너무 걱정하지 말고, 그저 학생만큼이나 연구자로서 지원한다는 것을 안일하게 생각하지만 않으면 된다.아울러, 예비 지도교수를 몰색하는 방법 등 입시에 실용적으로 필요한 기술들은 이 가이드의 다음 글들을 찬찬히 읽어보면 다 숙지할 수 있을 것이다.
아무튼 부담을 조금 내려놓고, 학생만큼이나 연구자로서의 면모를 어느 정도는 보여줘야 한다고 했는데 당장은 전혀 감이 안 오는 그 부분을 어떻게 준비해야 하는가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자. 스스로의 지적 목표를 설정하고 적절한 노력을 할 수 있는 정도의 역량은 확실히 보여줘야 할 테니 말이다(그리고 이런 태도 없이 대학원에 가는 것은 스펙보다는 시간 낭비에 가까울 수 있다). 이 파트의 제목이 "연구계획서는 쓰는 시간보다 준비하는 시간이 오래 걸린다"인데, 이건 단순히 연구계획서의 내용을 고민하면서 책상에 앉아있는 시간이 실질적으로 타이핑하는 시간보다 오래 걸린다는 뜻만은 아니다. 내가 생각하는 <준비>를 두 종류로 나눠서 설명해보겠다.
첫 번째 종류의 준비는, 기본적으로 평소에 능동적이고 열정적으로 지적인 활동을 하면서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학부의 커리큘럼을 성실히 따라가며 기본적인 지식을 갖추는 것에 더하여, 본인이 관심 있는 특정 주제들에 대해서는 더더욱 주체적으로 공부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해당 학과와 관심 연구주제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가 없다면, 무슨 연구가 필요한지, 어떤 연구가 현실적으로 가능한 지를 가늠할 수 없기 때문이다. 아울러, 연구를 한다는 것은 단순히 지식을 축적하는 것을 넘어서 새로운 문제의식이나 지식을 제시하려고 시도한다는 뜻임을 명심하자. 그냥 아는 게 많아지기 위해 책을 읽는 것에 더하여, 본인이 규명하고 싶은 진실 혹은 본인이 대답하고 싶은 질문이 무엇인지를 감지하고 필요한 문헌들을 적절하게 찾아내어 읽은 뒤 다음 질문으로 넘어가는, 그런 자기-기획적인 사람이 되어야 한다. 1)만약 본인이 이미 지식욕이 충만하고 능동적으로 공부하며 일상 속에서 세상에 대한 비판적인 해석을 제시하려고 노력하는 사람이라면, 이제는 아래에서 설명할 두 번째 종류의 준비에만 집중하면 된다. 2)만약 본인이 대학생활을 성실히는 했지만 특별히 주체적인 공부를 하지는 않았던 사람이라면, 그래도 지금껏 학부 과정을 따라오며 알게 모르게 기본적인 훈련을 받았을 테니 너무 걱정하지 말고 그저 지금부터는 좀 더 열정적으로 공부하는 습관을 만들며 아래의 두 번째 종류의 준비를 병행해보자. 3)만약 본인이 당장 무슨 공부를 하고 싶은지도 판단하기 어려울 정도로 훈련이 부족하지만 그래도 연말에 대학원 원서는 꼭 쓰고 싶다면...? 역시 일단 아래에서 설명하는 두 번째 종류의 준비에 대해 읽어보고 스스로 짧은 시간 내에 준비가 가능할지를 점검해봐야 한다. 결국 대학원 입시에서 첫 번째 종류의 준비는 두 번째 종류의 준비를 하기 위한 예비단계일 뿐이다.
대망의 두 번째 종류의 준비는, 구체적인 연구주제를 설정하며 그에 맞게 프로포절에 들어갈 내용들을 조사하는 과정이다. 주의할 점은 본인이 해당 분야에 대한 어느 정도의 지식이 없는 상태에서 연구주제를 일단 덜컥 설정해버리고 그와 관련된 내용을 조사하며 글로서 짜깁기하려는 식의 일방적인 접근은 부적합하다는 것이다. "오... (제대로 조사해본 것은 아니지만) 이 주제 왠지 재밌겠어... 무조건 이걸로 하는 걸로 하고 연구계획서에서 내가 이 분야와 관련해서 아는 것들을 풀어내야 하니까 이 주제와 관련된 내용들만 찾아서 읽어보자"는 식의 접근은 지양해야 한다. 연구계획서에서 제시하는 연구계획에는 현실성과 실효성이 있어야 하고 그것은 충분한 조사를 바탕으로 연구주제가 설정될 때에야 가능하기 때문이다. 물론 (특히 당신이 학부생이나 학부 졸업생이라면) 커미티는 당장 논문에 써먹을 수 있을 정도로 완벽한 연구주제를 당신이 벌써 발견했을 것이라고는 기대하지 않을 것이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의 실효성과 필요성이 느껴지는 연구주제를 설정하는 것은 본인의 역량을 드러내는 데에 필수적인 요소다. 연구주제를 설정하는 것과 자료조사를 하는 것은 쌍방향의 프로세스라는 것을 염두에 두고, 관심 있는 세부분야를 공부해보고→거기서 대답할 가치가 있는 이런저런 질문들을 뽑아내 보고→다시 그 질문들에 대답하기 위해 필요한 내용들을 공부해보고→새롭게 공부한 내용을 바탕으로 기존 질문을 더 발전시키거나 방향을 수정하고→더 공부하고→더 질문하고... 이런 식의 과정을 거치면서 유효한 연구주제를 설정해야 한다. 당신이 어느 정도의 기본지식을 갖춘 학부 고학년이나 졸업생이라면, 연구계획서를 타이핑하기에 앞서 본인의 연구주제를 구체화하는 이 두 번째 종류의 준비에 대부분의 시간을 쏟아붓게 될 것이다.
이 두 번째 종류의 준비를 하다 보면, 대학원 입시의 여러 요소들이 동시에 완성되어 가는 경이로운 기분을 느낄 수 있다. 예를 들어, 당신이 연구주제를 설정하는 과정에서 가장 큰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은 바로 현재 소속된 대학의 교수님이다. 교수님들과 연구주제에 대한 대화를 하고 조언을 받다 보면, 그리고 연구계획서 초안의 검토를 부탁드리다 보면, 그들은 당신의 지적 성향과 노력에 대해서 인지하게 되고 결국 양질의 추천서를 써줄 수 있게 된다. 또 다른 예를 들자면, 당신이 연구주제를 설정하는 과정에서 많은 텍스트들을 읽게 될 텐데 그중 상당수는 미국 내의 현역 교수들이 쓴 글일 것이니 당신은 예비 지도교수의 명단(즉 지원할 대학교의 목록)을 일부 자동으로 확보하게 되는 셈이다. 특히 만약 몇몇 저자에게 당신이 굉장히 직접적인 학문적 도움을 받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면 그들의 학교에는 꼭 지원하라. 당신이 연구계획서에서 "나는 박사님(예비 지도교수)의 연구물을 직접 검토했으며, 당신의 이런이런 주장을 나의 기반으로 삼아 저런저런 종류의 후속 연구를 하고 싶다"는 주제의식을 담아낸다면, 당신의 예비 제자로서의 매력은 대폭 상승할 것이다. 또한 여기서 역발상 꿀팁이 하나 있는데, 만약 연구주제를 구체화하면서 무수한 문헌들을 일일이 읽어나갈 시간이 없거나, 당장 폭넓은 독서를 하며 연구주제 설정을 시작하자니 너무 범위가 넓어 막막한 기분이 든다면, 일단 관심 있는 세부 주제를 공부하는 *현역 교수들의 리스트를 쫙 뽑아본 뒤 그들이 쓴 책이나 논문을 빠른 속도로 스키밍(skimming)해도 좋다 (만약 정말 시간이 없다면 서문/서론이라도 다 읽어보자.) 그러면 당신은 관심 분야의 지평이 조금씩 이해가 되면서 연구주제를 구체화하는 것이 편해지는 것은 물론이고 예비 지도교수의 목록까지 효율적으로 추려낼 수 있다. 물론 이건 이미 어느 정도의 기본지식이 축적된 학부 고학년 이상의 독자들에게 해당되는 이야기이다, 시간이 많다면 지엽적인 주제에 몰두하기에 앞서 폭넓은 지적 활동을 차근히 해보는 것이 더 도움이 된다.
*관련 분야를 공부하는 교수들의 리스트를 뽑아내는 방법은 이후에 "2-1 어떤 학교, 혹은 어떤 교수의 프로그램에 지원할까? (리서칭 및 리스팅)" 장에서 다루도록 하겠다.
4) 효율적인 글을 구조화하는 방법
이제 어느 정도의 예비연구가 진행되었다고 전제하고, 실제로 글을 쓰는 프로세스에 대해서 이야기해보자. 거두절미하고, 좋은 연구계획서는 간결하고 효율적이면서도 적합한 내용이 충분히 포함된 글이다. 그렇기 때문에 (1)연구계획서 전체의 큰 틀을 효율적으로 구조화하며 글을 쓰는 것과 (2)비록 내가 하고 싶은 말이 정말 많더라도 끊임없이 검토하며 (커미티 입장에서) 불필요한 내용들을 삭제하는 압축의 태도가 중요하다.
"전체의 틀을 효율적으로 구조화하며 글쓰기"를 먼저 생각해보자. 읽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글의 내용이 이리 갔다 저리 갔다 하면 읽는데 피로감이 들고 요지를 파악하기가 어렵다. 그렇기 때문에, 글의 내용을 문단 단위로 나누어서 각 문단 별로 제목을 붙인다는 생각으로 구조화하는 것은 독자를 배려하는 좋은 방법 중 하나이다. 독자 입장에서는 문단이 구분될 때마다 어느 정도의 내용 전환을 기대하기 마련이니, 당신의 연구계획서를 읽으며 "우선 첫 문단에서 말하는 전체적인 연구계획은 이렇고 //문단 바뀜// 이건 해당 연구의 사회적 중요성에 대한 이야기고 //문단 바뀜// 여기서는 왜 우리 학교에서 공부하고 싶은지를 썼구나, 조사 많이 했네..."와 같은 편안한 의식의 흐름이 발생하게 된다. 물론 특정 문단(제목)들로 내용을 엮고 그 문단들의 순서를 정하는 것은 개인의 전략과 기호에 따라 달라질 것이다.
당신이 지금 완전한 백지상태이고 글을 기획하는 것이 마냥 막막하다면 어떻게 시작해볼까? 역시 정답은 없겠지만, 나는 두 가지 방법을 상호보완적으로 섞어 사용했다: a)먼저 쓰고 문단화하기(내용에서 구조로) 그리고 b)문단화 된 계획에 맞추어 글을 쓰기(구조에서 내용으로). 즉 한 편으로는 위에서 설명한 "미래-현재-과거"의 하위 내용에 해당하는 다양한 정보들을 마구잡이로 브레인스토밍 하며 파편적인 글들을 써본 뒤 그 재료들을 바탕으로 나에게는 어떤 구조가 가장 적합할지를 고민해보고, 다른 한편으로는 전체적으로 어떤 내용을 어떤 순서대로 풀어내는 것이 나에게 가장 적합할지를 생각해본 뒤 그 구조적인 계획에 맞추어 내용을 만들어가는 것이다.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글의 전체 구조를 먼저 계획한 뒤 내용을 작성하고, 그렇게 작성한 내용을 보고 다시 구조적인 계획을 수정하고, 또 수정한 계획에 따라 내용을 추가하거나 삭제하고의 반복 작업을 하는 것이 가장 편리하지 않을까싶다.
여기서 한 가지를 꼭 기억해야 하는데, 원래의 계획이나 앞서 쓴 문장을 삭제 및 수정하는 것에 과감해져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위에서 언급한 "끊임없이 불필요한 부분들을 삭제하며 압축적인 글을 쓰는 것"의 핵심이다. 사연 없는 인생이 없는 만큼, 모든 사람에게는 각자의 감성과 지성을 형성한 아름다운 이야기들이 참 많을 것이지만 당신은 냉정해져야 한다. 그러니 커미티 입장에서 당신을 평가하는 데 중요한 내용, 즉 당신의 연구주제와 "직접적인" 관련이 있는 내용이 아니라면 과감하게 지우고,또한 "직접적인" 관련이 있는 내용이 너무 많다면 중요도에 따라 그중 일부를 과감히 포기해라. 연구계획서에 본인의 개인사나 감성을 담는 것은 때때로 훌륭한 전략이 되기도 하지만, 그것은 연구자로서의 사회적 책임감, 열정적인 주제의식 혹은 문체의 결을 드러내는 정도의 부차적인 효과로서 도움이 되는 것이지 감상만 가득한 글로는 커미티의 마음을 얻을 수 없다. 그들은 학생이자 "동업자"를 찾는 것이기 때문에 자신들에게 필요한 인재를 냉정하게 선별하려고 노력하기 때문이다. 내가 추천하는 방식은, 우선은 쓸만하다고 생각되는 내용을 최대한 많이 써서 글이 발전될 옵션을 여러 방향으로 확보함과 동시에, 글을 엮는 과정 내내 냉정하고 반복적인 검토와 다른 사람들의 피드백을 바탕으로 불필요한 내용을 깎아버리고 장황한 부분을 간결하게 압축시키는 과정을 밟는 것이다. 상당히 귀찮겠지만, 이런 압축의 과정을 거쳐야만 깔끔한 연구계획서를 만들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