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물어야 터진다

by 월천강의

2011년. 교육 담당자로 근무할 때였습니다.


당시 회사는 1천억 → 2천억 → 4천억 → 8천억 → 1조 2천억 → 2조.. 해마다 급성장하는 상황이었고, 인원수도 그만큼 늘어났습니다.


분기마다 신입사원을 채용했습니다. 다른 회사의 1년치 교육을 1년에 4번씩 하게 된 셈이죠.


교육 준비 한 달, 교육 2주, 결과 정리 1주, 곧바로 이어지는 채용, 그리고 다음 교육 준비.. 1년 반을 그렇게 보냈습니다.


신입사원 입문교육은 교육 중에서도 가장 많은 예산을 투입합니다. 덕분에 최고의 강사님들을 모시고 입문교육을 진행할 기회가 많았습니다. 자연스럽게 교류할 기회도 생겼구요.



이분들 중, 당시 23년째 강의를 하고 계신, 업계에서 가장 명망 높으신 강사님을 만나게 되었고, 어찌어찌하다 보니, 저의 강의 능력? 을 알아보신 그분의 파격적인 스카우트 제의가 있었습니다.


들떴죠. OOO 소장. 명함까지 팠고, 잠실에 있는 사무실에 자리까지 받아둔 상태였습니다. 신규 과정 하나를 개발하는 숙제를 받아 열심히 준비하면서 신변도 정리했습니다. 환송회도 몇 차례 했습니다.



그런데... 결국 나가지 못했습니다. 사직서를 냈는데 사장님께서 단호하게 반려하셨습니다.


"강의를 하겠다고? 사업 계획서 제대로 써서 가지고 와. 그거 통과 못하면 못나가."


만약 'OOO 강사님 밑으로 간다'는 소문이 나면, 회사에선 괘씸죄로 다시는 그 강사님을 부르지 않을 것이기에, 강사님께 피해를 드리지 않기 위해 궁여지책으로 프리랜서를 할 거라 둘러댄건데, 독이 됐습니다. (당시의) 요즘 세상에 프리랜서는 너무 불안정하다. 여태 잘했고 성과도 냈는데, 그냥 다니라는 겁니다.


윗분들이 아껴주신다는 것을 저도 잘 알았기에, 결국 나갈 마음을 접었습니다. 그리고, 그 강사님과는 영원히. 인연이 끊기게 됩니다.


옳은 선택인지 아닌지 판단할 수 없었습니다. 약간의 슬럼프도 겪었습니다.



시간이 꽤 흘렀습니다.



퇴사를 단념하고 몇 달 후, 연구소에서 근무하는 선배님께 흥미로운(?) 얘기를 들었습니다.


"네가 밖으로 나가려 했을 때 갑자기 나타나 너를 아껴준답시고 말렸던 사람들. 그들이 벽이야. 관성이지. 그 벽은 평상시엔 드러나지 않아. 네가 그 테두리를 벗어나려 할 때만 비로소 모습을 드러내지.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 '힘'이야. '힘'을 길러야 해. 보이지 않다가 갑자기 드러난 그 벽의 힘. 얼마나 센지 이번에 확실히 느꼈을 거야.


만약 다음번에, 네가 다시 한번 지금 네가 있는 이 세상을 부수고 나아가고자 한다면, 얼만큼의 힘으로 부딪쳐야 하는지 이제 알았을 거야. 그러니, 다음번엔 꼭 그 이상의 힘으로 단 한 번에 깨부수고 나가. 그게 답이야."



그리고, 또 몇 달 후, 이번에는 업계에서 아주 명망 높으신 멘토님을 뵙고 술자리를 같이 했습니다.


그땐 시간이 더 지났기 때문에, 에피소드처럼 '그런 일이 있었습니다' 식으로 말씀드렸습니다. 잠잠히 들어주시다가 한 말씀하셨습니다.


"다 괜찮다네. 원래 그런 일도 생기는 법일세. 못 나갔다고 해서 아쉬워하지 말게나. 그때 나가지 못한 건 자네가 아직 여물지 않아서 그래. 잘 여물면 어느 순간 탁! 터지게 될걸세."



맞다!



그 이후, 저는 수행하는 마음으로 나름의 전문성을 쌓았습니다. 기획을 할 때도, 강의를 할 때도, 보고를 할 때도, 모든 것을 제 것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생각하고, 정리하고, 읽고, 썼습니다.


그로부터 약 5년 후, 저는, 그 틀을 단 한 번에 깨고 나갔습니다.


선배의 말은 맞았습니다. 큰 힘으로 벽을 밀어내자, 너무도 쉽게 무너뜨릴 수 있었습니다. 벽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습니다. 결국 '제 하기 나름'이라는 큰 진리를 깨달았습니다.


그 이후, 감사하게도, 지금까지 잘 살아왔습니다. 배움의 시간이 지나자 활용의 시간이 왔습니다. 지금은 제가 배운 것을 누군가에게 알려주고 있으니까요. 그리고, 그를 통해 저는 다시금 세상을 배우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터질 것을 기대하지 말고, 오직 여무는데 집중해. 그럼 언젠가는 자연스럽게 네가 원하는 세상을 만나게 될거야. 여물어야 터지거든."

언젠가 후배가 같은 고민을 가지고 찾아온다면, 저는 그에게 이렇게 말해주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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