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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elah Sep 18. 2016

[5] 순탄하지 않은 그러나 순탄한 미국 생활의 시작

[5] Not So Smooth Yet Smooth



미국의 학교는 학년의 시작이 3월이 아닌 9월에 시작한다. 한국에서 온 나를 비롯한 모든 학생들이 미국에서 학교를 다니기 시작할 때 두 가지의 선택권이 주어진다. 한 학기를 건너뛰어 높은 학년으로 등급 할지, 혹은 한국에서 이미 마친 한 학기를 미국 학교에서 다시 듣는 방법을 선택해 한 학기 늦춰 들어갈지. 예를 들어, 한국에서 초등학교 3학년 1학기까지 하다가 온 학생이 두뇌가 아주 뛰어날 경우, 그리고 영어 수업을 따라가는데 문제가 없을 경우, 그리고 부모가 허락한다면, 그 학생은 그해 9월부터 초등학교 4학년의 수업을 시작하게 된다. 반면, 일반적으로는 많은 부모들이 아이의 영어 실력 향상과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기 위한 방침으로 6개월을 반복하는 결정을 내린다. 때때로 몇 학교에서는 학생들에게 시험을 치게 하며 한 학기를 앞서 갈지 말지를 학교 측에서 결정하기도 한다.


나와 내 동생은 고민할 필요도 없이 한 학기를 늦췄다. 그 말인 즉, 나는 중학교 2학년 과정을 총 1년 반을 한 셈이고, 내 동생은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미국으로 왔지만 6개월을 더 6학년의 신분으로 지낸 셈이다. 그 반년의 과정은 나에게 있어서 아주 특별하고 고단하여, 잊으래야 잊을 수 없고, 잊으면 안 되는 중요한 삶의 교훈들을 가슴 깊이 남기고 간 시간이었다.


처음 경험하는 미국 학교생활은 초록색, 흰색, 베이지색이 고루 어우러져 만들어진 학교 교복을 사는 것으로 시작됐다. 한국에서 나의 중학교 교복이 생각났다. 나름 내 학교 교복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던 나로서는 새 교복을 몸에 입히는 것이 어색했고 한국에서 그 교복을 가지고 오지 않음이 아쉬웠다. (물론 그 교복을 새 학교에 입고 다니겠다는 것은 아니지만...) 하지만 6개월 후면 돌아갈 것이었기 때문에 아쉬운 마음은 쉽게 접었던 것 같다. 그때 당시 나와 동생은 미국에서의 생활이 6개월로 끝나지 않을 것임을 전혀 몰랐다. 사실 6개월이란 정확한 수는 훗날 엄마에게서 들어서 알게 된 것이었고, 그때 당시의 난, 수의 개념보다는 미국에 한동안 공부를 하러 온 것이라는 생각만 가지고 있었다. 미국에 얼마 있지 않다가 다시 돌아간다는 것을 나와 동생이 안다면 그저 놀고만 갈까 봐 염려되어 우리에게 사실을 얘기하지 않았던 것은 아닐까 하고 지금 이어서야 추측해본다. 분명한 것은 미국에서 학교를 다니기 시작하면서부터, 여기서 학교를 계속 다니고 싶다는 다짐과 결정이 내 마음에서 봄꽃이 피듯 힘차게 피어올랐다는 것이다.




2002년 1월 10일. 아는 사람이라곤 한국에서 미리 연락해서 알고 간 현지 유학원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없는 미국 동부 워싱턴 덜레스 공항에 내렸다. 지금으로부터 몇 년 전쯤 이 기억에 대해 쓴 내 글에 의하면, 새로운 시작을 대하는 나의 태도는 매우 의지에 가득 차 있었다고 한다. 14시간이 걸려 다른 나라에 와 있다는 사실 자체가 가슴을 뛰게 했고 주변의 공기의 냄새와 바람의 소리, 공항에 내렸을 때의 특유의 느낌 등, 새로운 땅의 모든 부분이 나를 반기고 있다고 적혀있다. 새 장소에서의 새 출발선 앞에서, 떨림과 흥분함과 두려움을 지니며 발을 띄고 있었다.


중학교를 들어가고 2학년이 되면서부터 엄마는 내가 한국식 교육을 어려워한다는 것을 인지했다. 무언가를 이해하고 내 것으로 만드는 데 있어 오랜 시간이 걸렸다. 10 과목에 그만큼의 시간을 들이고 공부하기란 시간이 턱없이 부족했다. 이해는 필요 없이 무작정 외우는 친구들이 대단해 보였다. 내 경우는 그렇게 외운다 할지라도 하루도 채 지나지 않아 기억이 나지 않았다. 이해가 되지 않는 내용으로 주어진 시간에 나를 이해시키기란 아무리 부드러운 모래라 할 지라도 모래로 탑을 쌓는 것처럼 어려웠다.


하지만 공부가 싫지는 않았다. 물론 친구들과 점심시간이면 공기놀이든 운동장으로 나가서 즐기던 고무줄놀이든 아니면 다른 반으로 가서 각자 좋아하는 이성의 아이에게 우리의 존재를 알리고자 눈도장을 찍고 냉큼 돌아온다던가 등 함께 어울려 노는 것을 좋아했던 것은 사실이다. 그렇지만 그만큼 새로운 것을 배운다는 것에도 재미는 있었다. 공기나 고무줄, 또는 복도뿐 아니라 운동장에서의 달리기는 내 몸이 쉽게 익히는 반면, 교과서의 내용을 잊지 않고 기억하기란 너무나도 어려웠다.


그런 내 모습을 엄마가 먼저 알아차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어느 날 엄마는 아빠와 며칠을 상의해 본 후 중대한 결정을 내렸다. 미국으로 유학을 보내자는 내용이었다.




이윽고 미국으로 온 지 한 달이 되어가던 때. 미국 학교를 가기 위한 나의 작은 준비라고 할까? 공부를 시작해야겠다 싶어 (물론 엄마가 생각의 불을 지폈을 것이다) 한국에서 들고 온 영어 문법책을 펼쳐서 들뜬 마음으로 공부를 하고 있었다. '정말 하나도 못 알아들으면 어떡하지?'라는 걱정보다 새로운 곳으로 간다는 설렘이 더 컸었다. 그리고 열심히 해보고자 하는 의지가 강했다. 나와 동생이 도움이 될지 말지 모르는 영어 문법공부를 하고 있을 때, 식탁 건너편에서 엄마는 운전면허를 따기 위해 Driver's Manual을 공부하고 있었다.


큰 미국 땅에서 차는 꼭 필요했다. 특히 버지니아 주엔 그 당시만 해도 버스나 지하철 같은 교통수단이 마땅치 않았기 때문에 차가 없으면 이동을 할 수가 없었다. 곧장 중고차를 파는 차 딜러샵 (Car Dealership)에 갔다. 번호판 없이 한동안은 운전을 할 수 있다는 말에 엄만 중고차 한 대를 마련했다. 그러다가 얼마 후 번호판을 받았는데 번호판을 받고 나선 얼마의 기간 안에 운전 면허증을 따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정확히 며칠의 기간인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엄마가 그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는 면허증을 소지해야만 하는 날짜가 열흘 정도 채 남아 있지 않았다.


동네 도서관 (Public Library)에 들려 여러 권 배치되어있던 운전면허에 관한 책 (Driver's Manual)을 집어 들고 집에 와선 엄만 한 문장 한 문장 번역을 하기 시작했다. 영어로 빽빽이 채워진 수십 장의 내용들을 기억해야 했다. 한글로 번역해 이해는 하되 면허시험을 영어로 쳐야 하기에 결국엔 영어로 문제를 풀 수 있는 능력 또한 키워야 했다. 한국에서 운전을 몇 년 동안 해보았던 엄마라지만 새 언어로 며칠 안에 시험을 패스해야만 했다니! 이건 모래로 탑을 만드는 정도가 아니라 아무 도구 없이 바닷물로 하늘을 찌르는 거대한 탑을 쌓아 올릴 수 있는지를 보는 어마어마한 것이었다.


동생과 나의 6개월의 생활을 보고 미국에 남지 말지 결정을 한다지만, 하루라도 원활한 생활을 하려면 교통수단이 필요했기에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운전면허증은 따야만 하는 필수적 요소였다. 또한 치밀한 계획적인 성격 탓에 엄마는 우리를 위해 두세 가지 플랜을 마련해 놓고자 했다. 혹시 우리가 남는다고 하면, 그해 9월부터 내가 진학해야 할 고등학교와 동생의 중학교를 정해놓아야 하기도 했다. 미국에선 초, 중 과정이 총 8년, 고등학교 과정이 4년이라, 나와 동생은 그 해 9월에 새 시작의 출발선에 또 놓이게 된다. 그 당시의 영어성적으로 갈 수 있는 곳이 한정적이었다. 희망을 가지고 그나마 턱걸이로 갈 수 있는 몇 곳을 지원하기로 했고 우리는 먼저는 2월에 시작할 새 학교에서의 수업 준비와 함께 9월에 가고자 하는 학교들의 입학시험 준비도 같이 했다. 그리고 엄만 건너편 식탁에서, 엉덩이를 띄지 않은 채 본인의 운전면허시험을 위해 공부했다.


엄마는 며칠 동안 영한사전과 매뉴얼만 들여 보며 밤을 새우다시피 했다. 운전면허를 따야 하는 기간이 촉박했기에 한 번에 붙지 않는다면 조금 더 공부하고 다시 시험치기란 사실상 어려웠다. 현지인들도 몇 번씩은 떨어진다는 운전면허 필기시험. 시험 당일 엄마가 혼자 시험장에 갔었는지 나와 동생이 따라갔었는지조차 기억나지 않을 만큼의 우리의 무관심 가운데 엄마는 해냈다. 한 번에 붙게 된 것이다. 그동안의 노력에 대한 보상이었고, 앞으로의 미국 생활의 길이 울퉁불퉁할지라도 그 길을 차라는 도구로 유유히 통과할 수 있게 된 셈이다. 시험에 붙고 시험장을 나오는 데 한국으로 돌아간 아빠에게서 전화가 왔다고 했다. 엄마는 전화를 받고 기쁨의 눈물을 터뜨렸다.


몇 달 후 나와 동생이 지원했던 학교들에게서 입학 결과에 대한 통지가 메일로 날아왔다. 우린 사이좋게 모든 학교 시험에서 떨어졌다. 그래서 고민할 것 없이 그해 9월 공립학교에 진학하기로 했다. 아무쪼록 나와 동생의 공립학교 진학으로 엄마는 미국에서 우리와 함께 남기로 되었다. 나중에 엄마가 알려준 사실은, 우리가 거주했던 버지니아 주의 패어팩스 카운티 (Fairfax County) 안에 우리를 보내고 싶은 사립학교가 없을뿐더러 주변 공립학교들이 미국 내에서 훌륭한 교육 커리큘럼으로 저명한 곳이었다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잘된 일이었다. 더 잘된 일은 우리 셋이 한 집에서 오붓하게 지낼 수 있게 되었다는 점과, 엄마의 운전면허 자격증도 나와 동생을 싣고 나르면서 매우 유용하게 쓰이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어쩌면, 이 곳 서부의 열로 뜨겁게 이글거리는 시멘트 도로 위에서 생생 달리고 지금 이 순간까지도 말이다.






<엄마에 관하여> 메거진은 "[1] 20일의 여름 여행, 엄마에게로"부터 시작되는 시리즈 글의 모음입니다. 1편부터 읽어주시면 글의 흐름과 이해해 도움이 되실 거예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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