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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elah Sep 04. 2016

[3] 2002, 노던 버지니아

[3] 2002, Northern Virginia

2002년 12월. 미국 동부지역을 덮는 강한 눈보라가 내리쳤다. 나는 그때 당시 중3이었고 미국 동부에 위치한 버지니아주에서 엄마와 남동생과 겨울 방학의 시작을 막 즐기기 시작할 즈음이었다. 미국으로 넘어간 지 한 달 뒤면 1년이 되던 찰나였다. 어려운 외국어와 반나절 마주하며 지독한 교실과 복도를 외롭게 거닐었던 지난 8개월 (3월부터 학교를 다니기 시작했고 6월 중순부터 8월까지는 여름 방학이었으니…). 미국에서 맞는 오늘부터 약 3주간의 첫겨울방학이 그리도 반갑지 않을 수가 없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하루 밤 사이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창 밖으로 생전 처음 보는 장면을 목격했다. 방학을 맞이하는 나를 위해 하늘이 주는 아주 거대한 선물이랄까? 어렸을 적 가족들과 스키장에 가서야 만 가짜 눈이라도 볼 수 있었더라면 (내 어릴 적 기억으로는 부산엔 눈이 거의 내리지 않았고, 그때의 난 스키장의 눈이 가짜라는 사실 또한 몰랐지만), 버지니아라는 조용한 마을에서 깊은 잠을 자고 깨어나 창문을 열어보니 밖엔 모든 것을 뒤덮은 하얀 눈이 두텁게 놓여있던 것이다!


어릴 적, 친척들과 다 같이 스키장에 몇 번 갔었던 걸로 기억한다. 처음 스키장을 갔었을 때 반짝거리는 눈으로 덮인 높은 언덕을 보며 나는 무슨 생각을 했었던가. 먼저는 눈이 너무 예뻤다. 가짜라는 것을 몰랐기에 그랬었을 수도 있었겠지만, 가짜 눈이라는 걸 알았다 할지라도 그 당시의 난 하염없이 반짝거리는 그곳을 바라보고 있었을 것이다. 둘째, 언덕 꼭대기에서 유유히 내려오는 사람들이 대단해 보이지 않았다. 스키를 배워보지도 못한 내가 어디에서 나온 자신감인지는 여전히 알 수 없지만 나 또한 그들처럼 별 어려움 없이 쌩쌩 내려올 수 있을 것만 같았다. 하얀 언덕이 주는 용기였고, 흰 눈 안에 나를 포함시키고 싶은 갈망이 있었다.


다른 어린이들과 스키 레슨을 받은 후 가족들과 줄 서서 케이블카를 타고 언덕 위로 향하는데 점점 아래로 보이는 사람들의 형체가 작아질수록 내 마음도 어느 순간 같이 쪼그라드는 것 같았다. 꼭대기에 올라서선 아래를 내려다보는데, 아찔했던 그 느낌이 잊히지 않는다. 그리고 나름대로 조심스레 스키를 타며 내려와 보는데 엉덩방아를 수차례 찍었던 것 같다. 넘어지고 일어서고를 반복하며, 다시 꼭대기로 올라가는 운동 또한 계속했다. 쉽지 않았던 스키였지만 그 눈을 밟으며 위에서 아래로 내려올 때 내 귀와 얼굴을 스치는 바람, 바람 소리, 넘어질 때 닿이는 눈의 촉감, 이 모든 것이 어린 나에겐 그야말로 새로운 세계였다.


찾아가야만 볼 수 있었던 눈이 이 조용한 마을에 무슨 일로 하루 밤사이 나타난 것일까? 크리스마스이브 아침, 저 아래에서 동생과 나의 이름을 외치는 엄마의 쨍쨍한 목소리가 들린다. 눈으로 덮여 형체를 잃어버린 엄마 차 주변의 눈을 치우러 나가자는 것이었다. 마트에 음식을 사러 가야 했기 때문이란다. 그때 수면 위로 뚜렷이 솟아오른 두 사실.


첫 번째, 마트까지 걸어가려면 한 시간 족히 걸리는 곳에 살고 있는 우리에겐 차가 중요한 요소구나.

둘째, 지금 내 앞에 일어나고 있는 일은 꿈이 아닌 지극히도 현실이구나.




엄마를 따라 동생과 집 밖으로 나오니 사방은 흰 물감으로 뒤덮여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애니메이션 <겨울왕국>에 배경을 이루는 장소보다 개인적으로 더 아름다웠던 것 같다. 약 10cm 쌓여있는 새하얀 눈은 한여름 캘리포니아의 해변의 모래알처럼 반짝반짝 빛이 났다. 흠 하나 없이 건드려지지 않은 수많은 푹신한 보석들이 줄지어 수북이 쌓여있었다. 한 걸음 두 걸음발을 떼고 걸어 나가본다. 폭신할 줄은 알았건만 프라푸치노에 올려 먹는 휘핑크림보다 더 부드러울 줄이야. 부츠가 아닌 운동화를 신고 있었는데 차가운 눈이 발에 닿여 녹아 흘러내렸을 수도 있는데 그 느낌은 내 기억에 없다. 가슴 뛰는 장소에 있을 땐, 내 가슴을 뛰게 하는 것 이외에는 눈에 보이지도 머리에 들어가지도 않는 법. 나의 서툰 기억을 탓하는 대신 혼자만의 논리를 적어본다. 그래도 두꺼운 외투를 입었던 것은 확실하다. 그때 몸이 무거워 움직이기를 버거워하며 집 밖을 나갔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계단을 내려오는데 동생도 나도 거동이 힘들어 웬 늑대 두 마리인가 하는 생각을 잠시 했었던 것 같기도 하다.


차 몇 대를 기웃거린 후 엄마의 은색 차를 찾았다. 색 대신 번호판의 숫자로 찾았다. 우리 손에는 엄마가 쥐어준 국자와 냄비가 있다. 엄마는 프라이팬을 쥐곤 비장하게 서있다. 외국에서 첫 12월을 나는 우리에게 눈이란 본래 창틀에 앉아 오랫동안 바라보는 동경의 대상이었다. 그런 상대의 진짜 크기를 알리가 없었으니 삽 같은 도구는 사야 한다는 생각을 해본 적 없이 우리는 가난했다.


이윽고 눈을 벗겨내는 작업이 시작됐다. 부엌용품을 들고 차에 흠이 가지 않게 조심스레 눈을 긁어내는 우리가 우스웠다. 얼마나 했을까? 잔잔하게 부는 바람에 의해 휘날리는 검은 머리 위로 태양이 떠올라있었다. 동생의 얼굴은 발갛게 상기되어 있었다. 그때 옆집 문이 열리고 금발머리의 외국 남자가 펑퍼짐한 파자마 바지를 입은 채 주차장으로 걸어 나왔다. 어느새 느지막한 오전이 되었던 것이다. 눈을 걷어내는 작업을 하면서 음의 높이가 오르락내리락하는 사투리로 너무 떠들었나 싶어 갑자기 등이 서늘해졌다. 설마 이쪽으로는 오지 않겠지… 생각하며 머리는 차를 바라고 있었지만 내 눈은 모서리를 주시했다. 그런데 그는 눈을 밟으며 성큼성큼 우리를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옆에 사는 사람인데 이거 쓰세요.”


그는 동생 키 만한 삽을 엄마에게 건네주었다. 엄마는 기다렸다는 듯이 바로 “Thank you!”를 외쳤다. 나와 동생은 얼떨떨했다가 엄마에게 바통을 받아 땡큐를 연신 내뱉었다. 그는 분명 크리스마스이브날 이른 아침의 소란스러운 우리로 인해 잠에서 깨어났을 것이다. 그리고 창가로 다가가 손에 삽이 아닌 다른 이상한 것들을 쥐고 벅벅 차를 긁어 눈을 쓸어내린 후 바닥으로부터 눈을 간신히 퍼내는 우리를 보며 딱하게 여겼을 것이다. 그리고 조용한 이브를 가지고 싶어 했을지도 모른다. 엄마는 삽을 건네받았고 그는 다시 눈을 푹푹 밟으며 집으로 들어갔다.


눈이 내리고 녹아내리지 않는 겨울 날씨였다. 차를 벗겨내는 작업은 거의 다 완성했고 차가 후진해서 나갈 수 있도록 차가 지나갈 바닥에서 눈을 걷어내는 작업만 남았다. 엄마 손에 있는 삽 하나로는 부족했다. 내가 쥐고 있던 냄비의 기량은 너무나도 초라했다. 무거운 냄비를 내팽게치고 털장갑을 낀 손으로 허리를 숙여 두더지처럼 눈을 파기 시작했다. 동생도 이어 국자를 버리고 나를 따라 했다. 얼마 되지 않아 손은 얼얼해졌고 더 이상 굴을 파는 것은 무리가 아닌가를 본능적으로 느꼈다. 나는 더 이상 못하겠다며 들어간다 했고 동생도 따라나섰다. 우리의 체온과 대낮의 태양 온도로 이제는 흙탕물이 된 땅에 이미 젖었을 법한 신발이 젖을라 조심스러운 걸음으로 집으로 들어갔다. 너무너무 추웠다. 13살과 16살의 조그만 십 대 들에게 10cm의 눈을 치우기란 결코 장난이 아니었다. 처음에는 부엌살림을 들고 눈에서의 새로운 놀이라는 생각으로 시작했지만 그 생각은 일을 마무리하기까지 버티지 못했다. 따뜻한 집으로 들어오니 몸이 사르르 녹는 것만 같았다. 눈을 털어내고 신발을 벗고 들어와 외투를 벗어서 부엌 식탁 의자에 걸었다. Dining room의 트인 창문 넘어의 밖은 더 이상 희지많은 않았다. 엄마의 은색 차도 본래의 색을 바라며 반짝였고 약간은 회색빛이 도는 하늘과 하나가 되어가고 있었다.


저 멀리서 큰 트럭이 아파트 마을 안쪽으로 들어오는 것이 보였다. 눈을 걷어내고 소금을 뿌리는 작업을 하는 살포차였다. 엄마 차가 주차된 열 뒤로 천천히 지나가니 어느새 도로는 시멘트 색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언제 눈이 가득 쌓여 있었나 싶었을 정도로 감쪽같았다. 차가 지나가는 것을 본 엄마는 다시 머리와 허리를 숙여 삽질을 계속했다. 남아있는 눈을 위해서다. 엄마는 엄마여서 우리가 느끼는 추위를 느낄 수 없었는지 눈이 없어질 때까지 눈을 팠다. 이웃에게 빌린 삽을 미안한 마음에 쓰고 빨리 가져다주고 싶어서였을까, 고개도 들지 않고 엄마의 작업은 계속됐다.


엄마도 똑같이 추웠을 텐데 그때의 난 나만 너무 추웠다. 이듬해 2월 미국 동부엔 더 많은 눈의 폭설이 내렸다. 그때도 물론 난 추웠다. 아빠 없이 엄마와 동생과 지내는 미국에서의 겨울은 그저 계속해서 추웠다. 눈이 오는 겨울날이면 유난히 더 그랬다. 엄마도 그랬을 텐데 그때의 난 무지했다. 서부로 넘어가기 전까지 눈은 계속해서 내렸고 엄마에게 눈을 치우는 것은 하나의 의식처럼 되었다. 해가 거듭날수록 난 그 행위에 무뎌졌고 엄마는 그 분야에 전문가가 되었다. 내가 나 자신만을 돌아보고 있을 때 엄마는 많은 부분에서 그녀도 몰랐던 그녀의 전문성을 발견하고 있었다.









<엄마에 관하여> 메거진은 "[1] 20일의 여름 여행, 엄마에게로"부터 시작되는 시리즈 글의 모음입니다. 1편부터 읽어주시면 글의 흐름과 이해해 도움이 되실 거예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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