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을 버리지 마세요’라는 표현은 너무 진부하다. 그래도 ‘희망’이라는 이 말은 병마와 싸우고 있는 모든 환자들에게 꼭 해주고 싶은 말이기도 하다.
병원 안 병실에는 생물학적 의료행위가 더 이상 의미 없는 환자들도 많다. 하루하루 눈뜨는게 기적이라면 기적인 사람들도 수두룩이다. 그날의 병실 안은 내 와이프도 존재했다.
아내가 뇌종양 2차 재발 이후 1년 정도 항암치료를 받아 몸도 마음도 피폐해져 있던 어느 날이었다. 우린 아내의 치료와 관련해 한 사람과 인연을 맺은 적이 있었다. 사람이 위기에 닥쳤을 때는 썩은 끄나플이라도 잡고 싶은 것이 당연한 게 아닌가. 나 또한 마찬가지였다.
완치될 수 있다는 그의 말에 잠시나마 행복한 순간이 있었다. 하지만, 그 행복이 주는 단꿀이 벌의 독침과도 같아서 가슴 꽃에 씻을 수 없는 상처로 아직 남아 있다.
“저 환자말이야. 집착이 너무 강해. 말도 못해. 뭘 그렇게 살아 볼려고..”
순간 욕이 나올뻔했다.
살아야 할 마땅한 사람에게 나오는데로 지껄이는 그의 말뽄새에 화가 치밀었다.
이 여자는 나의 아내고 아이들의 엄마이며 최.진.희. 라서 아직 더 살아야하는데 그 입방정에 나의 아내는 병원에서 몇 일을 눈물로 밤을 새웠다. 치료와 관련된 사람으로 그날 그 순간의 감정적 행동이 아내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까 두려워 속으로 억누른게 후회가 된다.
지금 생각해도 그 말은 환자에게도 보호자에게도 하지 말았어야 할 말이었다. 더욱이 새로운 치료법은 손도 써보지 못했다.
아직도 그때를 생각하면 피가 거꾸로 솟는다.
병원에서 환자에게 당부하는 몇 가지가 있다. 그 중 첫 번째는 희망을 버리지 말라는 당부다. 환자의 의지에 따라 회복속도가 빠를 수도 느릴 수도 있기에 환자에게 희망은 무엇보다 중요했다. ‘어차피 죽을 텐데 뭐 ’라는 생각을 가진 환자라면 똑같은 치료과정에서도 회복은 더딜 수밖에 없다.
아내의 일은 억울하지만 긍정적 생각으로 우린 잊으려고 노력했다. 건강한 생각으로 얻는 희망이라는 약은 생각보다 약발이 쌔다.
한 사례로 아내를 간병하다가 얻어들은 이야기가 있다.
자녀들이 시한부 삶을 선고받고 투병 중인 어머니에게 깜짝 선물을 준비했다. 어머니가 완쾌되면 가족이 함께 살 집이라며 휠체어를 타고 이쁘게 꾸민 집으로 어머니를 모셔갔더랬다. 어머니는 자녀들과 남편의 노력에 고마움을 표하며 눈물을 터뜨렸고 자녀들은 우리 모두 희망을 잃지 말자며 함께 다짐했다고 한다. 증명하긴 어렵지만 어머니의 투병에 큰 힘이 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희망은 생각하기 나름이다. 길거리에서 만난 관상가가 나에게 ‘장수할 상이네요’라는 한 마디가 치료내내 희망이 될 수도, 치료법이 개발되었다는 뉴스 한 줄이 희망이 될 수도 있다.
현재 아픈 이들과, 그의 가족에게 말해주고 싶다.
[끝까지 희망을 버리지 마세요. 희망이 너무 멀게 느껴지면 당장 내일 뭘 할건지, 퇴원하면 뭘 할건지, 잠시 생각해보세요. 퇴원하며 마시는 카페모카 한잔이 희망이 될 수도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