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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휴운 9시간전

지각 단풍이 남긴 장면들

유난히 무더웠던 여름이었다. 뉴스에서도 기록적인 폭염이라는 소식을 매일 전해주었다. 굳이 다른 소식통을 접하지 않더라도 온몸으로 체감할 수 있었던 올해의 여름은 떠나갈 듯 말 듯 그렇게 오래오래 우리 곁에 머물렀다. 그 덕분에 안 그래도 스쳐 지나가는 듯 느껴지는 가을이 더 짧게 느껴졌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절기매직의 신봉자이지만, 올해는 우리 조상님들의 삶의 지혜가 담긴 24 절기를 갱신해야 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처음으로 하게 되었다.


지금쯤 은행나무가 노랗게 물들었던 것 같은데 -

여전히 한낮에는 콧등에 땀이 송글 맺히고 등에 뜨거운 기운이 차오르던 10월이었으니. 휴대폰 사진첩 작년 이맘때의 장면들 속 알록달록한 풍경들이 낯선 세계의 풍경처럼 느껴졌다. 11월에 접어들어서는 이러다 가을 옷들 꺼낼 틈도 없이 바로 패딩점퍼를 입어야 할지도 모르겠다며 우스갯소리를 했다. (실제로 거의 그렇게 되어버리기도 했다.)


언젠가 한 신문의 칼럼에서 지각 단풍이라는 단어를 보게 되었다. 여름이 지나 강수량이 줄어들고 기온이 내려가면 다가올 추위를 나기 위해 녹색의 색소인 엽록소를 분해해서 물과 함께 체내에 저장하게 된다. 이때 녹색의 색소에 가려져 있던 나뭇잎의 여러 색소들이 고유의 색을 드러내게 되는 것이 단풍의 원리이다. 즉, 여름이 지나 기온이 떨어져야 단풍이 들기 시작할 수 있는 것인데 올해는 무더위가 오래 지속된 바람에 단풍이 드는 시기가 늦어지게 된 것이다. 졸지에 올해 단풍은 까딱하면 겨울이 오기 전에 보지 못하면 어쩌나 싶게 왕 지각생이 되어버렸다.


덕분에 유래없는 새로운 풍경들을 보게 되었다. 11월 말 서울에는 갑자기 폭설이 내렸다. 온 도로가 마비되고 초토화될 정도의 엄청난 눈이었다. 뉴스 영상 속 지분 90% 이상이 하얀색일 정도였으니. 내가 살고 있는 부산에서는 겪어본 적도 체감할 수도 없는 장면이었다.

하지만 우연찮게 개인적인 볼 일이 있어 폭설이 그친 바로 다음 날 상경하게 되었다. 김포공항에 내려 국내선 출구를 나오자마자 마주한 풍경은 조금 예상 밖이었다. 설원처럼 하얀 겨울 왕국을 상상했었는데, 노랑 빨강 단풍나무와 낙엽들 위에 소복이 쌓여있는 하얀 눈들. 마치 무대 위에서 공연 중인 가을이 차례에, 자기 차례인 줄 알고 올라왔다가 흠칫 놀라 황급히 사라진 겨울이의 자취 같았달까. 너 아무렴 내가 올해 지각 좀 했다기로서니, 이렇게 한창 내 빛깔 좀 뽐내보려고 하는데 찬 물 끼얹듯 온통 덥석 덮어버리기야? 하고 단풍들이 툴툴거렸을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샛노란 은행잎들 위로 소복이 쌓인 하얀 눈 무데기들의 풍경은 낯설었지만 새롭게 아름다웠다. 온통 하얗기만 했더라면 심심했을지도 모를 눈 내린 풍경들 속에서 빨강 주홍 노랑 알록달록한 나뭇잎들의 색감이 도시의 채도를 높여주고 있었다.


오늘은 패딩점퍼와 목도리 마스크로 무장하고 아파트 정원을 걸어가고 있는데 여전히 가을빛인 나무들을 만났다. 어느덧 동지를 지나 체감온도가 영하 10도에 육박한다고 하는데 마치 10월의 단풍시즌을 방불케 하는 나무들의 모습이 놀라웠다. 바스락거리는 별모양의 낙엽들이 차곡히 얌전히 곳곳에 내려앉아 있었다. 늘 겨울나무와 자연의 풍경은 모든 잎들을 떨어뜨리고 남은 앙상한 나뭇가지와, 건드리기만 해도 부러져버릴 것 같은 차갑고 건조한 느낌이었는데. 지각 단풍 덕분에 추위에 발을 동동거리며 옷깃을 여미면서도, 여전히 다채로운 풍경들을 눈에 담을 수 있게 되었다 생각하니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추운 날씨에 외롭고 쓸쓸해지지 마라고. 이렇게 고운 빛깔로 조금 더 오래 머무를 테니 추운 날씨에 마음의 빛깔은 무채색으로 물들지 마라고, 더 짙고 선명하게. 그 마음 왠지 따듯하고 뭉클하여, 아직 머무르고 있는 단풍의 장면들을 더 열심히 눈과 마음에 꼭꼭 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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