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하루 한 글

난 이왕이면, 미쁘다

by 휴운



*

한글은 참 고마운 언어이다. 적어도 나의 모국어로써는 그렇다. 그 이유는 수없이 많겠지만, 일단 다른 언어들에 비해 배우고 익히기가 쉽기 때문이다. 훈민정음 서문에서도 세종대왕님께서 한글 창조하신 목적을 분명히 밝히셨듯이 누구나 쉽게 익혀 널리 쓰기 위한 문자가 아니던가.

그리고 자발적인 동기에 의해서, 또는 불가피한 이유로 다양한 외국어의 맛을 살짝씩 보아왔기에 이런 한글의 우수성을 더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 한글과 달리 여러 품사가 성별에 따라 다르게 표현되는 외국어들이 있다. 처음에는 충격적일 정도로 신선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시험을 위해 어쩔 수 없이 암기하고 익혀야 하는 상황에 봉착해서는 더더욱 세종대왕님께 감사한 마음과 함께 모국어에 대한 애정이 증폭되었다.


이렇게 한글은 단어 자체에 남성, 여성의 구분을 두고 있지 않는 언어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체감상 어떤 단어들은 왠지 단어에서 조금 더 남성성이 느껴지고, 어떤 단어는 여성성이 묻어나기도 한다.

그런 종류의 단어들 중 하나가 바로 '미쁘다'이다. '믿음직하다'. '믿음직스럽다'라는 말과 유의어로 쓸 수 있지만 왠지 조금 다른 결의 분위기를 품고 있는 단어. '믿음직하다'가 우직함을 한 스푼 더 품고 있다면, '미쁘다'는 보드랍고 사랑스러움을 한 스푼씩 톡 톡 더 추가한 느낌이랄까.

예를 들어보자면 이런 느낌이다.

'그 분의 말은 믿음직스럽다.'

'그 분의 말은 미쁘다.'

전자의 문장에서 언급한 '그 분'은 대상에 대한 아무런 사전 지식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남성:여성의 뉘앙스가 61:39 정도로 느껴진다. 예상 연령 또한 최소 40대 이상은 되어야만 할 것만 같다.

후자의 문장에서 언급한 '그 분'은 전자의 문장에서의 '그 분'과는 확실히 조금은 다른 느낌이다.

정확히 반대된다고 말하기에는 어렵지만 적어도 (나에게는) 다른 느낌으로 다가온다. 남성:여성의 뉘앙스가 29:71로 여성적인 분위기가 더 강하게 느껴진다.


이렇게 지극히 주관적인 견해로 인해 누군가 나에게 '믿음직 스럽다'는 말과 '미쁘다'는 말 중 어떤 표현으로 수식되고 싶느냐고 물어본다면 나는 후자를 택하겠다. '미쁘다'라고 소리내어 발음할 때 얇게 양 옆으로 벌어지는 입모양과, 양 입술을 튕기듯이 힘주어 '쁘'를 발음하는 순간이 왠지 웃음소리 같기도 해서. '이쁘다'와 묘하게 비슷한 어감도 꽤 마음에 든다. 이왕이면 다홍치마라고 하지 않은가. 품은 뜻도 근사하고, 뜻을 담은 모양도 예쁜 단어 '미쁘다.'


미쁜 사람이 되어야겠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마찰하며 또렷해지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