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하루 한 글

기억의 풍화

by 휴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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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에게나 그런 시기가 있듯, 나에게도 마음이 깊이 무너지던 시절이 있었다. 차곡히 쌓인 기억과 에피소드들의 두께만큼이나, 그것들을 벗겨내는 과정은 사무치는 나날의 연속이었다. 매일같이 찾아오는 슬픔은 도무지 익숙해지지 않았고, 하루하루를 견디는 일이 전부였다.


그 시절, 친한 동생이 건넨 위로의 말은 오래도록 내 안에 남아 있었다.

“언니야, 지금 힘든 건 당연한 거야. 그런데 그 아픈 자리에 바람이 불어오면 모래가 쌓이잖아. 또 쌓이고, 또 쌓이고. 그렇게 한 겹 한 겹 덮이다 보면, 나중엔 다 흐릿해져. 기억도 잘 안 날걸?”


그 말이 나에게 건넨 감정은 위로였다. 선명하고 또렷하던 고통들이 세월 속에서 무뎌지고 흐려질 거라는 사실은, 언젠가는 괜찮아질 거라는 희미한 믿음을 심어주었다. 그리고 그 믿음은 실제로 나를 견디게 했다.


많이, 또 잘 기억하는 건 분명 유용하고, 어떤 시기엔 꼭 필요한 능력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만큼 잘 잊고 흘려보내는 능력도 꼭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기억은 다 품고 가야 하는 짐이 아니라, 때때로 덜어내야만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모래주머니 같은 것이기도 하니까.


아주 행복했던 기억조차 늘 현재진행형으로 또렷하게 떠오른다면—그 기억의 강도에 눌려, 그 뒤를 잇는 새로운 기쁨을 제대로 느낄 수 있을까. 모래 위에 공들여 그린 그림이 아무리 마음에 들어도, 결국은 바람에 지워져야 다시 새 그림을 그릴 수 있다.


기쁨이든 슬픔이든, 모든 기억은 한자리에 머물러 영원히 보존되지는 않는다. 햇빛과 바람, 시간과 침묵에 조금씩 씻기고 깎여나가는 것—그 풍화의 자연스러움이야말로, 다사다난한 삶을 버텨내는 데 큰 위안이 된다.

그리고 나는 오늘도, 잊힌다는 사실로 조금 더 살아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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