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지버튼을 누른 날

by 휴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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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언제나 괜찮다고 말했다.
괜찮아요.
안 아파요.
속상하지 않아요.


놀이터에서 미끄러져 무릎이 까졌을 때도
선생님이 이름을 잘못 불러 혼냈을 때도
엄마가 내 얘기는 듣지 않고 동생 편만 들었을 때도
나는 아무렇지 않은 척을 했다.

그게 어른들이 좋아하는 모습이니까.

"재아는 정말 의젓하네!"
"참 잘 참는 아이구나!"

그래서 참았다.
또 참았다.



그런데 오늘은…

"야, 너 왜 그래?"
친구 하진이가 내 앞에서 울상이다.
"장난이었잖아. 뭐 그렇게까지 화를 내?"

나도 놀랐다.
내 입에서 큰소리가 툭 튀어나올 줄은.



하진이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교실로 들어갔다.
나는 멍하니 복도에 남았다.
왜 그랬지?
내가 왜 그랬을까?

밤이 되자 마음이 더 무거워졌다.
괜찮다고 말해도, 마음은 괜찮지 않았다.



그때였다.
책상 서랍에서 ‘딸각’ 소리가 났다.
검은색 리모컨 하나가 반짝거리고 있었다.

[정지 버튼]

버튼은 단 하나.
'정지'

나는 리모컨을 눌렀다.
모든 소리가 멈추고, 방 안이 고요해졌다.

그때 누군가 툭— 하고 나타났다.

“안녕.”
빨간 머리카락을 한 아이가 웃고 있었다.

"너 누구야?"
"너한테 화난 나."

곧 파란색 옷을 입은 아이가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나는 속상한 너야."

그 뒤로도 계속 나타났다.
작고 조용한 나,
눈물 많은 나,
짜증나는 나.

나는 물었다.
“왜 이제야 나타났어?”

아이들이 대답했다.
“너는 우리를 늘 감췄잖아.”
“우리는 사실, 계속 있었어.”

나는 그 아이들과 오래 이야기했다.
슬프다고 말하고, 억울하다고 말하고
조금 울기도 했다.

그리고, 리모컨의 버튼을 다시 눌렀다.
방이 다시 익숙한 소리들로 채워졌다.



다음 날 아침,
나는 하진이에게 먼저 다가갔다.

"하진아, 미안해. 나 어제 기분이 좀 안 좋았어."
하진이는 말없이 웃었다.
"나도 미안. 너 그런 줄 몰랐어."

학교 끝나고 집에 돌아오자
엄마가 물었다.

"오늘은 어땠어?"

나는 대답했다.
"조금 울었어.
근데 괜찮아.
이젠 진짜로 괜찮아."



그리고 내 방으로 들어가
내 방문을 조금 열어 두었다.

내 감정들이
언제든 들어올 수 있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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