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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람이는 늘 느렸다.
밥을 먹을 때도, 책을 읽을 때도, 말할 때도 느릿느릿.
“하람아, 빨리 좀 해라.”
“또 느려터졌네.”
친구들은 하람이에게 자주 이렇게 말했다.
하람이도 자기가 느린 걸 안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
마음이, 손이, 발이 전부 천천히 움직이는걸.
오늘도 하람이는 느릿느릿 등교하다가
학교 근처 골목길에서 이상한 간판 하나를 봤다.
《시간을 빌려 드립니다》
낡은 시계들이 주르륵 걸려 있고, 유리 너머에는
작고 동그란 가게 문이 열려 있었다.
“들어와 보렴.”
안쪽에서 누군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하람이가 가게 안으로 들어서자
수많은 시계들이 조용히 제각각 돌아가고 있었다.
가게 한가운데, 하얀 수염을 가진 노인이 앉아 있었다.
“너는 시간이 더 필요한 아이로구나.”
노인이 웃으며 말했다.
“하루치 시간을 빌려 줄게. 네 마음대로 써보렴.”
하람이는 얼떨결에 작은 유리병 하나를 받았다.
병 안에는 초록색 액체처럼 반짝이는 시간이 담겨 있었다.
“이건 다른 사람들 몰래 너만 쓸 수 있는 시간이야.
그동안은 아무도 널 재촉하지 않아.”
노인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그날, 하람이에게 마법같은 일이 벌어졌다.
아무도 그를 기다리지 않았고, 다그치지도 않았다.
천천히 책을 읽었고,
천천히 밥을 씹었고,
천천히 친구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친구도 이상하게 아무 말 없이 기다려 주었다.
모든 게 따뜻하고 부드러웠다.
하람이는 처음으로 자기 속도를 좋아하게 되었다.
그런데 집으로 돌아오니
부엌에서 엄마가 숨을 헉헉 쉬며 설거지를 하고 있었다.
옷가지가 쌓인 빨래통, 타이머가 울리는 전자레인지,
울고 있는 동생까지.
엄마는 여전히 시간이 부족한 사람 같았다.
하람이는 고민하다가,
자신이 빌린 유리병에서 시간 반을 남겨두고,
몰래 부엌 창가에 두었다.
“엄마가... 조금만 더 천천히 웃을 수 있으면 좋겠어.”
다음 날 아침,
엄마는 조용히 하람 옆에 앉았다.
토스트를 반으로 잘라 접시에 올려주며 말했다.
“오늘은 시간이 좀 남네.
하람이랑 같이 먹고 싶었어.”
그 순간 하람이는 눈을 껌뻑이며 웃었다.
가슴 속이 따뜻하게 말랑말랑해졌다.
그날 이후,
하람이는 천천히 살아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마음속으로 이렇게 말했다.
“내 시간은 나를 위해서도,
누군가를 위해서도 쓰일 수 있어.”